상상력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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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 그림이 부쩍 ‘귀여워졌다’는 소릴 듣는다. 동글동글하고 몽실몽실하고 따뜻해졌단다. 그래, 무슨말인지 잘 알겠다. 귀여운 그림, 몇 년 동안 참 잘 우려먹었다. 이제는 다시 처음으로, 욕구불만을 그림에다 쏟아부었던 2005년으로 돌아가야지..
‘`만화적 상상력은 어디서 나올까`’
수준 높은 HS애드 사보 독자 앞에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그렇습니다. 당연히‘ 만화’에서 나옵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은 역시 <크레용 신짱>의 짱구 눈물이다. 맛있는 거 먹은 뒤의 리액션은 <미스터 초밥왕>의‘ 입 안의 밥알 쇼’가 최고다. 귀여운 눈망울은 <닥터슬럼프>의 아리가 명불허전이다(아리라는 말에 응가가 떠올랐다면 당신은 고수다).
뭐, 이런 거다.
밥`장 일러스트레이터 | blog.naver.com/jbob70
“대놓고 뻔뻔해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어제 저녁 홍대 앞‘ 툰크샵’에 들렀다. 만화 전문서점으로, 오랜 단골이다. 카드로 계산하면 싸게, 현찰은 겁나게 싸게 해준다. 여기는 손님부터 다르다. 시간이나 좀 때워볼 요량으로 들르는 손님은 찾아보기 어렵다. 빈손으로 나가는 사람도 없다.
서점 문을 열기 전에 지갑의 돈부터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사장님 얼굴엔 묘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여기에 누가 오는지 아세요? 제가 말씀드리면 깜짝 놀랄걸요.
그런 분도 여길 오냐며 말이죠. 그래서 저는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답니다. 흐흐흐.”
만화책은 모두 비닐로 싸여 있다. 미리보기 따위는 사치다. 비닐을 뜯는건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는 거나 다름없다. 뜯는 순간 먹은 걸로 친다.
그래서 듣보잡 만화를 고르려면 그동안 쌓아온 감각과‘ 운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표지에 가슴이 봉긋하게, 아니 터질 듯하게 솟은 캐릭터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간다. 하지만 워낙 많이 속아봐서 살짝 주저하게된다. 그런데 이건 뭐~ 내 손은 이미 <남편은 건강하고 개가 좋아>를 쥐고있다. 작가는 도쿠히로 마사야. <교시로2030>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은, 침실 목 좋은 선반에 꽂혀 있다. 이 작품도 감각과 운빨로 골랐다. 몇 년 전‘ 폐업’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비디오 대여점에서 한 질을 통째로 건졌다. 가까운 미래. 사람들은 칼·총·망치·둔기 따위를 잡히는 대로 들고 싸운다. 사지는 레고 부품처럼 튕겨 나간다. 예상보다 한발 앞서 가슴을 보여주고 섹스를 한다.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거장, 로저 코먼이라도 혀를 내두를 만하다‘. 만화적 상상력’, 대놓고 말하면‘ 똘끼’ 충만이다.
손에 쥔, <남편은 건강하고 개가 좋아> 비닐을 호기롭게 뜯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않는다. 주인공은 원조 여전사 팜 그리어를 뛰어넘는 육감적인 몸매로 하이킥을 날린다.
몇 페이지를 채 넘기지도 않았는데 가슴을 보여주고 섹스를 한다. 여주인공의 남편은 교수이자 호색한, 게다가 중년의 아저씨다. 신혼을 섹스로 보내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는 개로 다시 태어나 애완견이 되어 그녀 곁에 찰싹 붙어 다닌다.
그러면서 그녀를 만족시키는데, 이건 뭐….
어른이 되면 야한 걸 볼 수 있다. 야한 데도 갈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가지 말라며 엄하게 꾸짖는다. 왜냐하면 어른이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더군다나 나는 작가다. 만화책을 사도, 그 중에서 가장 야한 걸 골라도 괜찮다.
“전 작가입니다. 이런 걸 봐야 만화적 상상력이 쫙쫙 뻗치거든요. 하하~”라고 말하면 끝난다. 작가란 대놓고 뻔뻔해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처음으로 돌아가야지~”
난 1996년 대기업에 입사해서 2003년까지 회사원으로 일했다. 2003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웹사이트 설계를 하며 버텼다. 2005년부터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일러스트레이터·작가·북칼럼니스트로 먹고 산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회사원이라면 이런 글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회사원이었던 과거의 나나, 작가로 먹고 사는 지금의 나나 똑같다. 앞섶이 푹 파인 드레스 앞에서 절절맨다.
나의 영원한 멘토는 마광수 교수다. 80년대에 '멘토'라는 말이 퍼졌거나, 지금처럼 무슨 무슨 콘서트가 유행이었다면 그도 한 자리 꿰찼을 것이다. 대학교 다닐 때 한 학기동안 수업을 들었다. 수강생이 워낙 많아 대강당에서 했다. 그는 결코 음란하거나 천박하지 않았다.
박식하지만 현학적이지도 않았다. 답을 알려주기보다 질문 자체에 딴죽을 걸었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주제가‘ 조국 광복의 염원’이 아니라‘ 청포도는 맛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 누구를 잡아먹거나 물어뜯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성적 취향만 드러낼 뿐이었다. 그에게 섹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밑천이었다.
최근에 내 그림이 부쩍‘ 귀여워졌다’는 소릴 듣는다. 동글동글하고 몽실몽실하고 따뜻해졌단다.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 귀여운 그림, 몇 년 동안 참 잘 우려먹었다.
이제는 다시 처음으로, 욕구불만을 그림에다 쏟아 부었던 2005년으로 돌아가야지.
돌고래와 뱀, 머리카락과 입술, 가슴이화면 가득 휘몰아치던 빨간 그림으로돌아가야지. <남편은 건강하고 개가 좋아> 신간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일러스트레이터·작가·북칼럼니스트. 10년간 SK에서 회사원으로 지내다가 2005년 서른여섯에 그림을 시작했다. KB카드‘ 이효리’편 CF,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신세계백화점 벽화 등 다양한 작업을 했다.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비정규 아티스트의 홀로그림>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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