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6 : The Difference - 술맛의 '차이'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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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fference
술맛의‘ 차이’

차이를, 다양성을 지키고 늘리는건 별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 됐다. ‘아무거나’하는 태도도 문제이겠지만, 비교우위의 법칙에, 시장에 맡겨놓는 것도 문제다. 결국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더 부지런해져야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 다양한 것들의 공존을 허락하는 것, 나아가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
종교·인종·민족 같은 데서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났다. 최근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에서 보듯 동성애·이성애 등 성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젠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가 되고 있다. 문화다양성, 생태계 다양성 같은 사안에선 국제적으로 이미 여러 협약과 선언이 발표됐다. 차이·다양성 같은 개념은 이젠 논쟁이나 토론이 아닌, 실천의 영역에 들어섰다.

 

‘이것만’ VS ‘아무거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의 하나로‘, 이것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이것만 고집하면서 다른 걸 허락하지 않는 태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하지만 자신은 이걸 고집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른 걸 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배타적이지만 않다면, 각자의‘ 이것만’이 존중된다면, 차이와 다양함은 더 꽃피어날 수도 있다.
‘이것만’과 상반된 태도로‘ 아무거나’를 꼽을 수 있다‘. 아무거나’는 최소한 배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폭력이나 전쟁을 유발할 위험은 없다. 아울러 말 그대로‘ 아무거나’엔 관용과 너그러움이 있다. 하지만 문화에 관한한‘ 아무거나’는 차이와 다양함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무슨 영화 볼래?” “ 아무거나.” “ 넌 누구 소설이 좋아?” “아무거나.” “ 이 냉면 집 갈래? 저 냉면 집 갈래?“” 아무데나.” “ 무슨 옷이 좋아?” “ 아무거나.”
어떻게 보면 광고·연출·집필·옷 만들기·요리 등 모든 문화적 창조행위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이기도하다. 남이 만든 걸 똑같이 따라한다면 누가 그걸 예술로 인정하겠나. 예술작품, 혹은 문화상품 앞에서‘ 아무거나’라는 태도를 취하는 건 문화 자체를 무화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유달리 즐겨찾으면서도 여차하면‘ 아무거나’를 외치는 게 있다.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국산 소주 혹은 국산 맥주를 시킬 때 사람들은 여차하면‘ 아무거나’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과 술을 마셨지만‘, 처음처럼’과‘ 참이슬’ 중에‘, 오비’와‘ 하이트’와‘ 카스’ 중에 어느 하나를 고집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아, 주류회사 관계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죽어라고 자사 제품만 시켰다).
대개는 이랬다“. 소주(맥주) 뭐 드릴까요?“” 아무거나 주세요”, 혹은“ 참이슬이요(카스요), 안 시원하다고요? 그럼 처음처럼(하이트) 주세요.”
20대까지는 국산 소주와 국산 맥주의 브랜드별 차이를 구별해 보겠다고, 그 안에서 자기 취향을 찾아보겠다고 애를 쓸지 모른다. 나도 20대까지는 그랬던 것 같고. 하지만 계속 그러기란 쉽지 않다.
한국 맥주? 영문 위키피디아에‘ Korean Beer’를 치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한국 맥주엔 오비·하이트·카스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중 하나만 갖다놓는 식당이 많다.’

 
‘차이’를 희석시키는 ‘소맥’
희석식 소주를 이만한 품질로 내놓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으니, 한국 소주 자체는 훌륭한 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 사람들의 전체 알코올 소비량 가운데 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다.
맥주를 많이 마시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국산 맥주에 소주를 타먹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소맥’이라는 이 독특한 칵테일은 국산 맥주와 국산 소주가 아니면 탄생하지 않았을 거다. 실제로 향이 진한 외국 흑맥주나 밀맥주에 소주를 섞으면 비릿한 단맛이 역겹게 다가오기 십상이다. 하지만 국산 맥주와 국산 소주로 만든‘ 소맥’은 뭐랄까, 국산 맥주의 싱거움을 소주의 알코올과 단맛이 은근히 채워주면서 그만의 풍미를 만들어낸다. 크게 맛있는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영어로‘ 낫 뱃(Not Bad)’은 된다. 그게 입에 붙으면 자꾸 마시게 된다. 중독성까지 갖춘 듯하다.
소맥이 유행하면서 국산 소주와 맥주를 시킬 때‘, 아무거나’는 더 유행어가 됐다. 더불어 우리의 술 문화가 가난한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차이’를 지키는 데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거나’가 꼭 나쁘기만 한 걸까. 점심 때 뭘 먹을까 고민하기 싫어서 구내식당을 찾을 때가 있다. 거기서 메뉴를 정해주니 고민 안 해도 된다. 이것저것 비교해서 우위를 따진 뒤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사실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 밥 먹는 일처럼, 그 선택이 일상이 되고 실무가 돼버리면 더욱 더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거나’라고 말할 거다.
우리에게 술 마시는 일이 밥 먹는 일처럼 일상이자 실무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 거래처 사람 접대하랴, 같은 부서원들끼리 단합하자고 회식하랴, 각종 동창회 참가하랴,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런 모양이다‘. 아무거나’ 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술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술 마시는 일이‘ 실무’가 된 술 문화.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이전에 그것 자체가 외국의 술 문화와 다른‘, 차이’를 간직한 또 하나의 문화인 것이다. 이 문화도 언제 바뀌어 사라질지 모른다. 신세대들 술 마시는 걸 보면 그런 조짐이 보인다.
이쯤에서 짚어야 할 것 같다. 비교해서 우위를 따져 선택하는 일이 차이와 다양성을 보장하는 데 꼭 좋기만 한걸까. 경쟁은 어느 선까지는 다양화를 부추기지만, 지금 같은 무한경쟁은 1, 2등만 남겨 놓고 나머지를 다 퇴출시킬 수도 있다.
어느 경제학자가 그랬다. 세계화는 로컬 차원에선 다양성을 증대시키지만, 글로벌 차원에선 감소시킨다고. 한국 술로 막걸리 10종, 소주 10종이 있었다 치자. 세계화가 진행돼 한국에 데킬라·럼·위스키·와인·사케·진·보드카·꼬냑이 들어와 시장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 8가지 술이 각 3종씩 살아남은 대신 막걸리와 소주도 3종씩만 남게 됐다면, 결국 한국의 술은 20종에서 30종이 돼 더 다양해졌다. 그런데 세계를 놓고 보면 어떤가. 최소한 소주·막걸리 14종은 줄어들지 않았나.
이제 차이를, 다양성을 지키고 늘리는 건 별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 됐다‘. 아무거나’ 하는 태도도 문제이겠지만, 비교우위의 법칙에, 시장에 맡겨놓는 것도 문제다. 결국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
누군가 좋은 술을 새로 만들어 내놓으면 그게 좀 비싸도, 그걸 마시기 위해 멀리까지 가야하더라도, 최소한가끔씩은 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나?

 

임범

문화평론가 | isman1@hanmail.net
<술꾼의 품격> <내가 만난 술꾼> 등의 책을 썼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