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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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모든 실재를 알고 있지만 그 환상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즉 르네 갈리마르의 환상, 그리고‘ 본인의 환상’이 영화의 중요한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해보라. 15년을 같이 산 부부, 물론 둘 사이에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아내가 남자였다?
남편은 아내가 남자였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수많은 궁금증은 몇 개의 의문으로 모아질 것이다. 사랑과 섹스, 그리고 두 남자 사이의 아이 등등.
이는 최근 상연되고 있는 연극 <M. 버터플라이(M. Butterfly)>의 주요 골격이다. 이 연극은 1986년 프랑스 법정에서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희곡은 데이비드 헨리황이 집필했다. 연극이 세상에 빛을 볼 때“, 실화 자체가 지극히 매혹적이다. 이 이야기를 다루며 실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평을 한 바와 같이 실화 그 자체부터가 매우 흥미롭다. 이 연극은 지아코모 푸치니의 1904년 작 오페라 <나비 부인(Madam Butterfly)>과도 암시적으로 연결돼 있어 흥미를 끈다.
연극의 내용은 이렇다. 1964년 중국 베이징. 프랑스 영사관 직원 르네 갈리마르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보고 여주인공 송 릴링의 가녀린 외모와 우아함에 매료된다. 그 첫 만남부터 15년의 동거생활을 거치며 프랑스에서 함께 살던 두 내외는 법정에 서게 된다. 이혼 때문이 아니다. 죄목은 국가기밀 유출 혐의. 자신의 아내라고 생각했던 송 릴링이 남자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르네 갈리마르의 환상이 빚어낸‘ 현실 아닌 현실’의 가건물이 철거되자 그는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막이 내려진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선 ‘두 남자’
연극에 등장하는 르네 갈리마르와 송 릴링은 각각 실화 속 버나드 브루시코(Bernard Boursicot, 1944〜)와 쉬 페이푸(1938〜2009)다. 1964년, 둘은 대사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동거에 들어간다. 버나드 부르시코가 베이징과 쉬 페이푸 모두에서 정이 떨어질 무렵에 둘 사이에는 갑작스레 아들이 생기기도 했다. 이후 그들은 파리로 옮겨 살았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부양하던 버나드 부르시코는 어느날 경찰에 체포된다. 그가 베이징 대사관과 몽골 울란바토르 대사관에서 일하던 시기에 500여 건의 문서가 사라진 것이 이유다. 하지만 법정에는 버나드부르시코만 서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 쉬 페이푸도 함께 섰다. 아내는 남성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아니 버나드 브루시코에게 중요한 것은 간첩 혐의가 아니었다. 법정에서 버나드 브루시코와 쉬 페이푸의 진술은 계속 엇갈렸다. 쉬 페이푸는 자신이‘ 남장여자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버나드 브루시코가 잘못 알아들어‘ 남장 역할’을 한 여자로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버나드 브루시코를 사랑하여 굳이 정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버나드 브루시코는 쉬 페이푸가“ 난 여자이지만, 엄격한 아버지가 아들처럼 키웠다”고 고백했노라 했다.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 버나드 브루시코의 환상은 여러 곳에서 작동했다. 둘 사이의 섹스는 늘 어두운 곳에서 빠르게 끝났기에 버나드 브루시코의 환상은 단단히 유지될 수 있었다. 쉬 페이푸는 성기를 감추며 남자라는 사실을 숨겼고, 자신이 처녀라는 혈흔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둘 사이에 생긴 아들 또한 쉬 페이푸가 돈을 지불하고 데려온 아이였다. 하지만 버나드 부르시코는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애정과 자부심을 가졌다.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유산계급이었던 쉬 페이푸는 공산당의 강 동지라는 이와 연루됐고, 버나드 브루시코는 그들을 도와 중국 정부를 위한 첩보활동을 하다 법정에 서게 된 것이었다. 둘은 기밀유출 혐의로 각각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쉬 페이푸가 남성으로 판명되자 이에 충격을 받은 브루시코는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미수에 그쳤다. 사면된 이후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쉬 페이푸는 유명세를 이용해 서양에서 경극배우로 활동하다 2099년 사망했고, 버나드 브루시코는 현재 생존 중이다.
장르·작품을 넘나들며 둔갑하고 진화하는 환상
연극 <M. 버터플라이>를 집필한 데이비드 황은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외교관(르네 갈리마르)이 찾은 것이‘ 자기만의 나비부인’, 즉 오랜 세월 동양 여성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적 교본이 되다시피 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자기희생적인 여주인공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M. 버터플라이>는 제목에서부터<나비부인>을 암시하거나 극중에 <나비부인>의 한 장면을 인용하기도 한다. <나비부인>은 연극 <M.버터플라이>의 한 장면 (연극열전 제공) 일본 나가사키에 사는 게이샤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녀는 미군 장교 핑커튼의 일본 현지처가 되나 미국에서 다시 결혼한 그에게 아이를 빼앗기고 자살한다. 1904년, 이 오페라가 초연된 이래 세계의 내로라하는 귀족과 지도자 등 명사들은 틈만 나면 호화무대를 찾았다. 그들은‘ 희생’과‘ 순종’으로 점철된 동양여성의 이미지와 마주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비부인> 무대에서 프리마돈나는 죽어가며 눈물로 기모노를 적셨고, 그녀를 지켜보는 객석의 뭇 남성들은 동방의 섬나라와 동양여인에 대한 환상으로 자신을 적셨다.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 즉‘ 동양의 여자는 순종적이다’는 것은 어떠한 체험과 검증의 결과이기보다는 서구인들이 동양여인에 대한 환상 씌우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M. 버터플라이>에서 송 릴링이 <나비부인>의 주역을 맡았다는 것, 그리고 연극의 도입부에 르네 갈리마르가 자신을 오페라 속의 미군 핑커튼이라 상상하고 자신의 ‘나비’를 찾는 장면이 배치된 것, 이는 <M. 버터플라이>가 서구 남성들의 시선과 그에 대한 전복을 그리며 <나비부인>을 교묘하게 뒤집은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제목에 붙은‘ M’자는 남자인 Mr.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깨지지 않길 바라는 건 결국 ‘나의 환상’
뮤지컬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작곡가 클로드 미 셸 쇤버그와 작사가 알랑 부브리 콤비는 <나비부인>을 바탕으로 <미스 사이공>을 제작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나비부인>의 미군 핑커튼과 게이샤가 베트남전쟁을 치르는 미군 파일럿과 베트남 여인으로 재구성됐다. 이 작품은 1989년에 런던에서 초연됐는데, 역시 동양 여인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주인공인 킴 역을 동양계 배우로 설정한 무대가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 킴 역을 맡은 동양계 배우는 50명이 넘는다.
<M. 버터플라이>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에 의해 1993년 영화화되기도 했다. 제레미 아이언스(르네 갈리마르 역)와 존 론(릴링 역)이 출연했다. 영화나 연극이나 재밌는 것은 관람을 하는 동안 관객 또한 르네 갈리마르의 환상을 옹호하거나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분장으로도 지우지 못한 존 론의 남성적인 선과 골격을 최종적으로 덮어 여성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관객의 몫, 즉 관객의 환상이다.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와 존 론이 애무를 할 때마다 진실이 밝혀질까 긴장하는 것 또한 제레미 아이언스가 아닌 철저히 관객의 몫이다. 관객은 모든 실재를 알고 있지만 그 환상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즉 르네 갈리마르의 환상, 그리고 본인의 환상이 영화의 중요한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P.S. 한국에 공연되고 연극 <M. 버터플라이>에서 무대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새장은 자신을 가두는 환상, 혹은 환상에 갇혀버린 르네 갈리마르의 심리를 형상화하는 미술장치 같다. <M. 버터플라이>는 1990년에 국내에 처음 소개됐고, 1992년 재공연된 기록이 전부다. 오페라 <나비부인>을 부분적으로 인용했고, 송 릴링의 경극연기 등 다양한 예술양식이 연극의 서사와 맞물린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 bstsong@naver.com
공연 보고 이야기하는 남자(약칭 ‘공연 보이남’)로, 이런저런 무대연구소를 운영중이다. 음악평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고, 음악이 있는 무대라면 연극·무용·뮤지컬 등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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