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초는 짧고, 20초는 길다 3
예나 지금이나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카피라이터가 돼요?”다. 카피는 실무를 하면서 카피로 크는 거란 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방법이 따로 있지 않을까 계속 묻는다. 어떻게 하든 들어만 간다면 카피로 크는 길에 들어선다. 어떻게 클까? 여기 어리버리한 여자 카피라이터가 광고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전설의 카피라이터 신입교육을 받으며 커가는 과정을 소소하게 풀어본다.
이 카피가 30초에 다 들어가?
카피를 길게 써서 줄이는 연습. 세스코 TV광고를 준비하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선배가 알면 기겁할 크리에이티브와 전혀 상관없는 광고. 정보전달이 목적인 인포멀 광고를 만들게 되었다. 바퀴벌레 잡는 세스코, 런칭부터 크리에이티브한 광고로 유명했던 세스코가 달라졌다. 고객에게 왜 세스코가 필요한지, 바퀴와 개미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가 무엇인지 리얼하게,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톤으로 이야기 해주기를 바랐다. 2개월에 걸친 해충 교육을 받고 나서야 아이데이션에 들어갔다. 지금도 세스코가 대단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부분이다. 인포멀 광고는 정확한 정보가 주는 신뢰성이 생명이라는 광고주의 생각으로, 광고제작이 급할 텐데도 2달의 교육기간을 주었다는 점이다. 아는 것도 많으니 카피도 술술 많이 써졌다.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하려니 카피만 1분. 다행히 세스코가 우리나라 최초로 케이블TV를 중심 매체로 광고 캠페인을 전개했기에 망정이지 공중파였으면 몇 번 나가지도 못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케이블이라 해도 1분은 드문 상황. 30초로 가차없이 줄여야 했다. 거짓말 보태서 이틀 동안 줄였다. 화장실에서 똥 누면서도 줄이고, 밥 먹으면서도 줄이고. 나중엔 그 카피가 그 카피 같은 혼돈의 시기에 접어든다. 혼돈의 와중에 카피가 딱 맞게 줄여진 순간은 엉뚱하게 다가왔다. 두두둥! 화장실에서 '볼 일' 님을 보실 때, 해결이 되었다. 지저분하다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요. 책상머리 컴퓨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 두들길 때보다 다른 일을 할 때 머리는 더 잘 돌아간다. 아이데이션이 막힌다면 책상 앞을 떠나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아라.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선배 한 분은 회사 건너편 커피숍에서 카피를 썼다.
암튼 세스코 광고는 대박을 터트렸다. 기특하다. 심카피! 잘 팔리는 광고의 한 획을 긋다니. 아래 1분짜리 카피를 정리해 놓았다.
“카피님들〜 30초로 줄이는 라이팅에 도전해 보실라우?”
<세스코 : '바퀴'편>
여 : 식중독으로 고생했어요. 뭐 잘 못 먹은 것도 없는데… 어머 바퀴
남 : 세스코입니다. 보세요, 바퀴는 이런 신선한 음식까지 병균을 토해내서 식중독, 알레르기, 천식을 일으키죠.
여 : 진짜요? / 남 : 네 / 여 : 어머! 어떻게 약 뿌려야겠다! 약! / 남 : 잠깐! 세스코와 상의하세요.
여 : 눈에 보이는 바퀴만 없애면 되겠지 했는데...
남 : 한 마리가 보이면 수 많은 바퀴가 숨어 있다는 증거죠. 그래서 보이는 바퀴만 죽이면 더 많은 바퀴를 살려두는 셈이죠. 세스코는 숨어있는 바퀴와 알까지 싹 없애드립니다.
여 : 눈을 씻고 봐도 없지만, 그래도... / 남 : 세스코에 전화하세요.
여: 대단해요,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면 100% 환불까지 해준대요.
남 : 정기회원은 밖에서 들어오는 바퀴예방은 물론, 살균서비스까지 무료죠.
Song : 1588-1119 세스코.
왜 브랜드 네임이 길어져?
카피 중에는 전형적인 품목들이 있다. 제약은 그 중 하나다. 효능 효과를 전달하는 제약광고는 마치, 프레스로 찍어낸 광고처럼 같은 포맷을 갖는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대낮. 어제 한 야근에, 짤라집 김치찌개를 푸짐하게 먹은 난 책상과 이마의 아름다운 키스를 즐기며 졸고 있었다. 누군가 책상 위에 스윽 놓고 가는 기미가〜 퍼뜩 잠이 깬다. '아니 아니 내가 죽을려고...낮잠을!' 가까스로 혼미한 정신을 수습한 후에 보니 활명수 하나가 떡 하니 올려져 있다. 웬 활명수? 파티션 너머 들려오는 선배님 말씀. "우리 팀 광고주다. 3시에 TV-CF 오티다. 한 병 먹어 둬라."
<동화약품 까스활명수 'Q'편>
남Na : 아무리 소화가 급해도 확인할 께 있습니다 부채있나 본다
한진희 : 부채 있음 / 남Na : 활명수가 맞나 보다. / 한진희 : 활명수 맞음
남Na : 백 년을 이어온 약효 까스활명수 Q 부채확인 활명수 확인
한진희 : 소화확인
아니 활명수 TV-CF 오티를 잡았으면 잡았지, 싫어하는 활명수를 먹으래! 역시 오늘도 궁시렁 궁시렁. "너 또 궁시렁 거리지. 몸에 좋은 거야. 그러니 먹어!!!" 불호령이 떨어진다.
다시 들려오는 선배 목소리. "너, 그거 시제품이다. 라벨 보면 좀 다를 거다." 아..아..아니 시제품이라니요. 그럼 내가 모르모트란 말씀. 아니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시제품을 먹이다니...혈압 급!상승 직전. "이번에 광고할 신제품이다. 까스활명수도 아니고, 까스활명수 Q다. 이름이 달라졌어. 효과가 더 좋아졌다고 카피 써 봐라."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조렇게, 쌈 싸 먹고 찜 쪄 먹어도 근사한 게 안 나온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애교작전.
"선배님! 이게 최선이에요. 이게 최선. 베스트. 원더풀입니다. 제약광고는 너무 어려워요. 신입에게는 더 힘들어요. 백 배 천 배 힘들어요." "신입은 힘들지. 제약이 비슷비슷해 보여도 어려워. 생각을 해 생각을. 카피를 쓰지 말고." "아니, 선배 저도 생각이라는 놈을 합니다. 그 놈의 생각이 엉뚱하게 'Q' 하나는 더 붙여서 날 힘들게 해." 이런 류지만요... 깨갱〜 "섭섭아, 광고주 제품을 사랑해라 그럼 카피가 보인다. Q가 붙어서 효과가 끝내줘. 이건 대단한 발명이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온 몸이 근질거려. 막 이러면서 빙의가 되면 카피쯤이야 쉽지. 봐라. 까스활명수에서 까스활명수Q가 됐어. Q가 하나 더 붙은 것 말고, 이름만 보면 뭐가 달라졌지." 머뭇거리자, "몇 자인지 세어 봐." "5자에서 6자로 늘었어요." "그래그래. 늘어났지. 한 글자가 늘어난 건 한 글자가 길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게 카피지.
우리가 효능효과를 모르면 소비자도 잘 몰라. 어렵게 의학적인 용어를 설명할거니?" "아니요!" "쉽게 좋아졌다고 말해라. '길어졌다'와 '좋아졌다'를 갖고 카피 읊어봐." 오잉? 둘이 무슨 관계가? 둘이 별로 친한 것 같지 않습니다. 표정에 내 생각이 나타났는지. 선배는 한숨을 쉬며 "빙의!!!! 빙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배는 포기한 듯 "이런 건 어떨까? '좋아질수록 이름도 길어집니다.'" '우와 죽이는 카피옵니다 선배.' 선배 머리 위로 후광이 비추어오는 착시현상까지. 기발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Q는 하나 더 첨가 된 성분의 약자니 좋아진 거다. [좋아질수록 이름도 길어집니다] 무슨 말이필요한가.
카피는 이런 것이다. 애석하게 집행은 안 되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카피 접근법이다.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카피는 기발해진다.
이번엔 진짜 카피 없이 가자!
한창 기발한 카피로 이슈가 되고 있던 '좋은사람들'이 카피가 아닌 비주얼 임팩트가 강한 광고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순간 제작팀 모두는 당황 당황.
팀장님은 과감하게… 본부장실로 뛰어 들어가 비상사태라는 설명과 함께 카피라이터를 두 명 더 투입시켰다. '응? 비주얼로 승부하겠다는 말씀에 카피라이터를?'
팀장님의 확고한 지론 중 하나. 비주얼이 메인인 광고는 카피가 더 잘한다. 그러니 카피를 보강한다. 반대로 카피가 메인인 광고는 아트가 더 많이 붙는다. 쌩(生)말이 더 튀는 카피라는 지론 하에. 첫 아이데이션 회의. 이번 광고는 슬로건도 없이 간다. 카피는 브랜드 네임이 전부다. 당황, 당황이 황당이 되어버렸다. 카피라이터 3명이 카피를 안 쓰고 그림만 죽어라 찾았다. 그 광고가 제임스딘 ‘팜므파탈’이다. 30초 광고에는 카피가 일부 들어갔지만, 15초는 마지막 브랜드 네임 '제임스딘 팜므파탈'이 전부인 광고. 카피를 과감하게 절제한 광고다. 평생 딱 한 번 해보았다.
카피들이여. 아마 우리나라 광고 특성상 카피가 없는 광고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경험하면 알게 된다. 침묵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 카피는 없다.
<제임스딘 '팜므파탈'편>
Na : 제임스진 팜므파탈
저염도 냉장과학을 이기는 품격 높은 카피를 찾아서
잠시 하우젠을 한 경험이 있다. 2004년도인가보다. 백색가전에서 품격 높은 프리미엄 브랜드로 카피의 톤앤매너가 무지하게 품격 높다. 럭셔리한 제품의 카피를 잘 쓴다고 자부하는 나도 힘들게 했었던 품목, 하우젠 김치냉장고다. 지금은 없는 명배우 장진영이 모델로 나와 품격 높은 분위기로 끌어가던 하우젠 김치냉장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지기 직전에 나갔던 광고의 카피가 이렇다.
‘장진영: 마음을 담을수록, 하우젠의 맛도 깊어집니다. 멋도 맛입니다. 하우젠 김치 냉장고.’
이런 카피 톤에서 갑자기 LG김장독의 저염도 냉장과학 같은 키워드를 만들어서 광고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얼마나 많은 카피와 시안이 들어갔을지 상상도 못하리라. 저염도 냉장과학을 이기는 강력한 키워드도 못 찾고 있고만, 품격까지 높이라니.... '아줌마들은 품격을 원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품격 높은 카피를 원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럼 카피를 그렇게 써야 한다, 그러나 확실하게.
확실한 카피의 품격은 물건을 팔아주지만, 어정쩡한 카피의 품격은 물건이 매장에서 오랜 시간 자리만 지키도록 해준다.
<하우젠 '김치냉장고'편>
여Na : 김치는 온도가 조금만 변해도 맛이 달라집니다. 디지털 온도과학 하우젠 김치냉장고
장진영 : 한 번 드셔볼래요?
품격이 필요하면 과감해져라. 우선 모든 카피는 자막으로 처리해라. 모든 멘트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해라. 카피의 양은 최대한 줄여라. 두 줄 이상 넘어가지 마라. 품격 높은 카피는 천천히 분위기 잡고 읽어줘야 고급스러움이 산다. 제품의 특성을 말하기 시작하면 품격은 땅에 떨어진다. 스펙은 보일 듯 말듯. 아예 넣지 마라.
카피를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노트에 붙여놓는 습관을 들이려고 애썼다, 안 그러면 자꾸 잊어먹어 버린다. 기억할 것도 할 것도 많은 신입이라 더 그랬을 거다. 그 시절, 노트에 붙여 놓은 몇몇 격언(?) 같은 것들이 있다. 지금도 갖고 있는 TV-CF 관련 자료 중 하나.
<TV-CF 광고 10계명>
1. 마지막 3초의 반전이 크리에이티브의 핵심이다.
2.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아이디어가 무진장 있다. (소재의 선입견을 버려라)
3. 사람의 삶을 가장 리얼하게 그릴 때 공감을 얻는다. (생활의 단면을 리얼하게 보여줘라. 그들의 언어를 빈틈없이 채집하라)
4. 서로 걸맞지 않는 요소들을 결합시켜 보라. (조금 삐그덕 거리더라도 틀림없이 튈 수 있다)
5. 광고란 새로운 생활 패턴을 주도할 수 있는 문화다. (광고의 힘은 보기 보다 크다)
6. TV밖에 앉은 사람을 TV안으로 끌어들여라. (시청자와 마주 앉아 대화하듯이 카피를 써라)
7. 그림이 전혀 없는 광고도 TV 광고일 수 있다. (카피, 자막 위주의 크리에이티브도 훌륭한 TV광고, 카피라이터가 특히 노력해 주어야 할 몫.) 반대로 카피가 전혀 없는 광고도 TV 광고일 수 있다. 역시 카피라이터가 특히 노력해주어야 할 몫.
8. 목에 힘주는 공익광고는 이제 졸립지도 않는다. (공익광고, 정부광고도 더 이상 훈장님 말씀은 곤란~)
9. 권위와 품격을 기대하는 사람에겐 그렇게 해줘라. (격조 높은 카피를 원하는 광고주가 많다. 또, 그런 광고를 수용하는 소비자도 생각보다 많다. 그럴 땐 그렇게 해줘라.)
10. 인간의 뇌세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단순한 메시지를 반복하여 세뇌시켜라. 그것 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키면 좋다
이 10계명을 꼭 지키라는 건 아니다. 어떤 부분은 지금의 광고상황과 분명 괴리감이 있다. 하.지.만. 지키면 좋다. 일에 바빠서, 때로는 기계처럼 카피를 써야 할 때 한 번 펼쳐보고 마음을 다 잡는 문구로 사용해도 썩 괜찮은 10계명이다. 3회에 걸쳐 10계명을 광고와 연결시켜 쉽게 풀어 내려 했다. 4번과 5번은 예를 들어주지 못했고, 7번은 한 상황만 예를 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10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믿는다. 혹시, 모릅니까? 어허…광고 안 보시는군요. 여기, 보너스로 인쇄광고 10계명까지 알려드리죠. '앗! 선배가 카피는 보너스로 더 쓰는 것 하지 말랬는데.' "오랜 시간 공들여서 쓴 카피는 보너스가 없다"는 선배의 말. 카피라이터들이라면 압니다. 남들은 쉽게 던지는 "하나만 더 써줘." 이런 요구가 카피라이터에겐 주름살 하나 더 늘리는 일이란 것을 말입니다. 아〜 이번 칼럼은 선배가 뜬금없이 일을 시키던 신입이 그리워지는 글입니다.
두두두둥〜〜 그래서 인쇄광고 카피 10계명은 다음 호로 휘리릭〜 넘깁니다.
심의섭
Chie Copy | adel@hsad.co.kr
나를 사랑하기가 제일 어렵다. 특히, 크리에이터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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