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발전소
‘돈이 되는’ 상상력
나는 전업뮤지션이라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먹고 사는데, 이 일에는 막대한 양의 상상이 들어간다. 어쩌면 깨어있는 매순간 상상을 하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상상력, 하면 떠오르는 소설 속 한 장면이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데뷔작인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 외국어대 러시아어과 학생인 남자 주인공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리따운 이탈리어과 여학생에게 홀딱 빠져있다. 평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토론하며 갈고 닦은 현란한 화술로 그녀와 교제하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대리석처럼 차갑고 최고급 화이트와인처럼 고상한 그녀가 허용하는 스킨십은 고작 둘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 정도다. 레닌의 붉은 군대처럼 거세게 치고 올라오는 20살의 리비도를 꾹꾹 억눌러가면서 그는 은밀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자신이 지금 잡고 있는 이 손 가죽의 세포를 머릿속에서 재분열시켜서 젖가슴을 구성하는 보드라운 지방질로 만드는 것이다.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
그녀!에게 피자는 젖었다 말린 신문지 맛
그러고 보면 상상력이 절실한 순간은 너무나 많다. 성적표가 도착하는 날에는 그날 어머니의 심리상태가 잘 그려져야 "공부가 전부야?!"라고 세게 나갈지, 아니면 나 죽었다고 엎드려 빌지 판단이 선다. 다이어트에 도전하는 여성에게는 이보다도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사고가 필요하다. 고구마 케이크는 달지 않고, 피자는 젖었다 말린 신문지 맛이 날 터이며, 호모 사피엔스의 암컷은 단언컨대 잉여지방을 몸의 굴곡에 저장하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친구가 '살쪘지?'라고 물어보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것 같다'고 대답해주곤 하는데, 풍력을 과대평가하고 몇 시간 전에 안았던 여자의 몸을 과소평가하는 것 역시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래도 역시 우리의 관심사는 '돈이 되는' 상상력이다. 속물이라고 자책하진 말자. 여기에서 '상상력'은 좁은 의미의 상상력(즉 남들이 미처 하지 못한 좋은 생각)이고, ‘돈’은 넓은 의미의 돈(요컨대, 교환가치)이니까. 여자친구의 가슴을 상상한다고 돈을 주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나는 전업뮤지션이라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먹고 사는데, 이 일에는 항상 막대한 양의 상상이 들어간다. 어쩌면 거의 깨어있는 매순간 상상을 하면서 산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모든 아이디어가 좋은 결과물로 잉태되는 것은 아니지만(살아남는 정자의 비율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면 이 글이 간간히 인터뷰와 방송에서 진행자나 작가·PD로부터 들은 질문, '어떻게 이런 노래를 쓸 생각을 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몇 자 적어본다.
정현종 시집 <섬> 무라카미 하루키 저 <1Q84>
메타포에 익숙하기, 음미하기
일단 상상의 나래가 움틀 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몽상가의 기질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선 메타포에 익숙해질 것을 권한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며, 양질의 은유는 그 언어가 피워내는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라 할 수 있다. 벌이 8자 춤을 추고 돌고래는 초음파를 발사하듯 인간은 은유를 구사하는 것이다. 또한 메타포를 음미하는 일은 사고의 비약과 압축에 익숙해지는 훈련이기도 하다. 잘 압축된 사고가 비약을 이루는 순간, 적어도 언어적으로 구축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영역은 없으리라. 기가 막힌 메타포가 잠재의식을 한바탕 휘젓는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정현종이나 황인숙·심보선의 시집을 손닿는 곳에 두고 짬짬이 읽을 것을 추천한다. 은유의 전문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다.
앞서 말했듯 언어감각이 곧 사고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평소에 드라마든 음악이든 영화든 좋으니 외국어로 된 문화를 대사나 가사를 음미해가며 하나 정도 즐기는 것도 좋다. 한국어가 '하늘색'으로 표현하는 색깔을 어떤 언어에서는 '물(水)색'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는 주어를 생략하는 데 익숙하며, 일본에는 여성어가 남아있고, 아랍인들은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다른 언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상을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나?
베스트셀러인 <상실의 시대>와 <1Q84>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젠가 영어로 소설 초안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외국어로 쓰면 자연스럽게 문장이 간결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다. 문장의 간결함뿐 아니라 테마를 낯설게 하기도 그의 숨은 의도였으리라 짐작해본다.
정바비
필요한 건 스킨십을 향한 스무 살 청년과도 같은 열정
마지막으로, 진부한 얘기지만 기록과 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디어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온다. 아이디어는 우사인 볼트처럼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눈앞을 휙 지나가버리기도 하고, 수십 개의 허들을 넘어서야 겨우 당도하기도 한다. 투포환처럼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발상도 있다.
내 경우에는 음악과 관한 아이디어들이기 때문에 보이스 레코딩 등 멀티미디어 첨부가 가능한 메모 어플을 쓴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 엎드린 채 태블릿으로 한번 훑어보고, 이동 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스마트폰에 스케치한다. 타블렛과 스마트폰이 메인으로 쓰는 데스크탑과 연동되어 있어 한쪽에서 수정하면 다른 미디어에서도 최신 데이터가 반영되니 이보다 편리할 수는 없다. 적어도 집요함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더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필요한 건 스킨십을 향한 스무 살 청년과도 같은열정뿐이다.
정바비
뮤지션 | juliahart@hanmail.net
‘돈이 되는’ 상상력
나는 전업뮤지션이라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먹고 사는데, 이 일에는 막대한 양의 상상이 들어간다. 어쩌면 깨어있는 매순간 상상을 하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상상력, 하면 떠오르는 소설 속 한 장면이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데뷔작인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 외국어대 러시아어과 학생인 남자 주인공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리따운 이탈리어과 여학생에게 홀딱 빠져있다. 평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토론하며 갈고 닦은 현란한 화술로 그녀와 교제하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대리석처럼 차갑고 최고급 화이트와인처럼 고상한 그녀가 허용하는 스킨십은 고작 둘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 정도다. 레닌의 붉은 군대처럼 거세게 치고 올라오는 20살의 리비도를 꾹꾹 억눌러가면서 그는 은밀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자신이 지금 잡고 있는 이 손 가죽의 세포를 머릿속에서 재분열시켜서 젖가슴을 구성하는 보드라운 지방질로 만드는 것이다.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
그녀!에게 피자는 젖었다 말린 신문지 맛
그러고 보면 상상력이 절실한 순간은 너무나 많다. 성적표가 도착하는 날에는 그날 어머니의 심리상태가 잘 그려져야 "공부가 전부야?!"라고 세게 나갈지, 아니면 나 죽었다고 엎드려 빌지 판단이 선다. 다이어트에 도전하는 여성에게는 이보다도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사고가 필요하다. 고구마 케이크는 달지 않고, 피자는 젖었다 말린 신문지 맛이 날 터이며, 호모 사피엔스의 암컷은 단언컨대 잉여지방을 몸의 굴곡에 저장하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친구가 '살쪘지?'라고 물어보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것 같다'고 대답해주곤 하는데, 풍력을 과대평가하고 몇 시간 전에 안았던 여자의 몸을 과소평가하는 것 역시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래도 역시 우리의 관심사는 '돈이 되는' 상상력이다. 속물이라고 자책하진 말자. 여기에서 '상상력'은 좁은 의미의 상상력(즉 남들이 미처 하지 못한 좋은 생각)이고, ‘돈’은 넓은 의미의 돈(요컨대, 교환가치)이니까. 여자친구의 가슴을 상상한다고 돈을 주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나는 전업뮤지션이라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먹고 사는데, 이 일에는 항상 막대한 양의 상상이 들어간다. 어쩌면 거의 깨어있는 매순간 상상을 하면서 산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모든 아이디어가 좋은 결과물로 잉태되는 것은 아니지만(살아남는 정자의 비율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면 이 글이 간간히 인터뷰와 방송에서 진행자나 작가·PD로부터 들은 질문, '어떻게 이런 노래를 쓸 생각을 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몇 자 적어본다.
정현종 시집 <섬> 무라카미 하루키 저 <1Q84>
메타포에 익숙하기, 음미하기
일단 상상의 나래가 움틀 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몽상가의 기질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선 메타포에 익숙해질 것을 권한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며, 양질의 은유는 그 언어가 피워내는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라 할 수 있다. 벌이 8자 춤을 추고 돌고래는 초음파를 발사하듯 인간은 은유를 구사하는 것이다. 또한 메타포를 음미하는 일은 사고의 비약과 압축에 익숙해지는 훈련이기도 하다. 잘 압축된 사고가 비약을 이루는 순간, 적어도 언어적으로 구축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영역은 없으리라. 기가 막힌 메타포가 잠재의식을 한바탕 휘젓는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정현종이나 황인숙·심보선의 시집을 손닿는 곳에 두고 짬짬이 읽을 것을 추천한다. 은유의 전문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다.
앞서 말했듯 언어감각이 곧 사고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평소에 드라마든 음악이든 영화든 좋으니 외국어로 된 문화를 대사나 가사를 음미해가며 하나 정도 즐기는 것도 좋다. 한국어가 '하늘색'으로 표현하는 색깔을 어떤 언어에서는 '물(水)색'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는 주어를 생략하는 데 익숙하며, 일본에는 여성어가 남아있고, 아랍인들은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다른 언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상을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나?
베스트셀러인 <상실의 시대>와 <1Q84>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젠가 영어로 소설 초안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외국어로 쓰면 자연스럽게 문장이 간결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다. 문장의 간결함뿐 아니라 테마를 낯설게 하기도 그의 숨은 의도였으리라 짐작해본다.
정바비
필요한 건 스킨십을 향한 스무 살 청년과도 같은 열정
마지막으로, 진부한 얘기지만 기록과 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디어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온다. 아이디어는 우사인 볼트처럼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눈앞을 휙 지나가버리기도 하고, 수십 개의 허들을 넘어서야 겨우 당도하기도 한다. 투포환처럼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발상도 있다.
내 경우에는 음악과 관한 아이디어들이기 때문에 보이스 레코딩 등 멀티미디어 첨부가 가능한 메모 어플을 쓴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 엎드린 채 태블릿으로 한번 훑어보고, 이동 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스마트폰에 스케치한다. 타블렛과 스마트폰이 메인으로 쓰는 데스크탑과 연동되어 있어 한쪽에서 수정하면 다른 미디어에서도 최신 데이터가 반영되니 이보다 편리할 수는 없다. 적어도 집요함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더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필요한 건 스킨십을 향한 스무 살 청년과도 같은열정뿐이다.
정바비
뮤지션 | juliahart@hanmail.net
고교 1학년이던 1995년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 원년 멤버로 데뷔. ‘줄리아 하트’ ‘바비빌’ ‘가을방학’ 등의 밴드로 왕성한 활동 중. 홈페이지 bobbych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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