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엑스포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2010 상하이엑스포’. 2010년 5월부터 10월까지 184일 동안 열린 이번 엑스포는 우리에게는 특히 한국의 소리와 색으로 200여 개 참가국 1억여 명의 관람객에게 문화적 즐거움을 선사한 이벤트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공연보다 어려운 공연준비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상설공연은 엑스포 개막 이래 6개월 동안 아침 10시 첫 공연을 시작으로 하루 12회, 각 20여 분씩 펼쳐졌다. 전통공연·비보이·재즈발레·퓨전국악 등 다채로운 내용으로 구성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로 관람객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인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점이 최대 과제였다.
그러나 현장에선 공연 이전의 문제들이 발생했다. 필로티 공간으로 구성된 한국관 상설공연장은 거의 야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좁은 무대와 열악한 시스템, 그날그날 날씨에 그대로 노출된 공간 등은 공연 진행 자체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개막 20일 전, 선발대로 입국한 우리의 첫 번째 도전이 시작되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중국은 없는 것도 많았다. 시간, 그리고 사람과의 싸움이었다. 서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명 자재도 몇 번의 전화를 거쳐 한두 개, 그것도 한국보다 서너 배나 되는 가격을 주고 구해야 했고, 일부는 한국에서 공수까지 했다. 복잡한 엑스포 사이트의 출입과 보안문제로 인해 부피가 큰 시설들은 밤 12시 이후에나 반입이 가능했고, 작업인부들에게 주간임금의 두 배를 지불해야 했다. 할 수 없이 시스템 스태프들이 설치작업에까지 동원되었다. 무대 만들랴 조명과 음향 설치하랴 복잡한 와중에 한쪽에선 공연단의 연습이 계속되고 스태프는 야간에 시스템 체크와 리허설까지… 그렇게 하루를 48시간처럼 사용하면서 개막일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얼쑤〜” 상하이가 들썩들썩
사물놀이패의 신명나는 길놀이와 전통 타악공연을 시작으로 VIP와 함께한 5월 1일 한국관 개관식이 열렸다. 5월의 푸르른 날씨 속에 상설공연은 매회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 앞에서 펼쳐졌다. 언어가 필요 없는 곳, 단지 눈과 귀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을 할 수 있는 상설공연은 입에서 입으로 인기가 전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급기야 5월 중반부터는 새치기를 해서 넘어 들어오는 관람객들과 공연 후 나가지 않고 자리에서 버티는 관람객들로 공연 전과 후에는 늘 진행 스태프들과의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의 소리와 춤은 상설공연장뿐만 아니라 아시아광장 야외무대에서도 신명나게 펼쳐졌다. 상하이엑스포 조직위원회의 반대와 감시(?)속에서도 유일무이하게 ‘한국 주간’의 타이틀 아래 공연을 진행했는데, 한국의 장단, 한국의 색, 한국의 멋으로 길 가던 시민들까지 사로잡아 아시아광장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첫날 저녁에 펼쳐진 ‘난타’의 30분 공연에는 아시아광장 최대의 관람객이 운집해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어냈다. 그렇게 ‘한국의 날’과 ‘한국 주간’이 있었던 상하이의 5월은 온통 한국의 가락과 춤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한국의 추석연휴기간에 맞춰 진행된 민속주간 역시 중국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한국관 내 필로티 공간에서의 다양한 체험행사들과 공연, 아시아광장에서의 태권도 시범과 클래식 연주, 전통국악과 현대국악 공연까지…
한국관 공연은 연일 엑스포뉴스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아〜 한류!’ 중국의 군대까지 출동했다
말로만 듣던 한류의 열기는 뜨거웠다. 상하이엑스포조직위원회에 이미 사전 공연신고를 마친 한국의 유명 스타들이 1만 8,000명 수용 규모의 컬처센터(Culture Center)에서의 코리아뮤직페스티벌(Korea Music Festival) 공연을 허가 받았다. 바로 그날, 그러니까 5월 30일은 조직위에서도 기다리는 날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공연 일자가 다가올수록 상하이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고, 5월 30일자 엑스포 입장권과 컬처센터 입장권 암표가 나돌기 시작했다. 당초 조직위에서 모든 안전과 경호를 책임지기로 했으나, 상황이 심상치 않자 공연 3일 전 긴급회의를 소집하더니 우리에게 공연을 취소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닌가. 수송계획과 안전대책·경호대책을 보고하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한류 열풍이 오히려 역풍으로 돌아오는 상황이었다.
발주처인 코트라(KOTRA)와의 긴급회의를 통해 우리는 강공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허가된 공연에 대해 안전과 경호대책을 세우는 것은 조직위의 몫이며, 우리는 공연을 강행할 것이고, 공항에서부터 발생되는 모든 안전 관련 책임은 조직위에 있음을 통보했다. 그리고 공연 이틀 전, 다시 조직위와의 회의가 열렸는데, 상하이시 공안과 교통국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마침내 수송계획과 안전계획이 협의되었다.
드디어 5월 30일…전날 새벽부터 내리던 비도 엑스포사이트 입구에서부터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중국 팬들의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아침 9시. 사이트의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팬들은 100미터 달리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컬처센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500명의 공안으로는 이미 통제불능 상태!… 급기야 군대가 투입되기 시작했다. 7,000명의 군인이 동원돼 인간띠로 장벽을 만들었고, 그 와중에 표를 받지 못한 팬들은 인간장벽 밖에서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공연시간인 저녁 7시까지 공연장 주변은 경찰·군인·기자·관람객·관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중앙국악관현악단과 경기도립무용단의 1부 행사가 끝나고, 마침내 한류스타들의 공연 시간. 그런데 007 작전보다 더한 조직위의 비밀작전으로 인해 행사를 총괄하고 있는 나조차도 슈퍼주니어·보아·강타·f(x) 같은 스타들이 어디로 도착했는지, 공연 후엔 어디로 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날의 코리아뮤직페스티벌 공연 후폭풍 또한 거셌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일부 중국 팬들로 인해 온갖 루머가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고, 이후 컬처센터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일본 SMAP의 공연이 취소된 것은 물론, 그 어떤 국가도 컬처센터에서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만이 유일한 공연국가였다.
See you in EXPO 2012 Yeosu
184일 동안 비바람이 불었다. 북이 넘어지고, 40도를 웃도는 더위에 조명이 타들어가도 100여 명의 공연단과 스태프들은 ‘사.명.감’이라는 단어 아래 하나로 뭉쳐 아픈 허리와 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약 2,200회의 공연을 진행했다. 10월 31일. 마지막 공연 후 관람객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뒤로 하고 시스템 전원을 내리는 순간까지 어느 누구하나 쉬고 싶다는 말도, 아프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관람객, 북소리 장단에 어깨를 들썩이는 관람객, 비보이의 열정에 환호하는 관람객 등 문화에는 국경도 정치도 이념도 없었다. 그들도 즐기고 있었고, 우린 또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2012년 여수에서는 3개월 동안 또 한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우리들의 시간이 온다. 이 시간을 우리는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얘기했다는데… 난 동감할 수 없다. 한국적인 것은 그냥 한국적인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가꾸고 어떻게 어디에서 전달하느냐가 세계의 공감을 얻어내고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관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류’는 있지만 아직 ‘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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