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5-06 : 광고와 문화 - 아줌마, 아저씨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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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 아저씨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조 재 원 I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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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주부다
 
아줌마파워
 
 
아줌마시청자'를 불러모은 TV드라마<아줌마>
다양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TV드라마<푸른 안개>

중년파워가 살아나고 있다?
아무래도 단정적 표현은 과장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아 비겁하게 물음표를 달아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중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현상만큼은 실재하는 사실임에 분명하다.
요즘 나이 든 직장동료와 대화를 나누면 새록새록 놀랄 때가 많다. 아줌마와 아저씨, 그리고 노처녀, 노총각들이 어떤 영화와 TV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의 생산물을 놓고 이렇게 열띠게 말발을 세우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족으로 덧붙이면 유감스럽게도 근 몇 달 동안 화제거리 가운데 광고는 발견하지 못했다.
광고 카피를 흉내내며 대화의 윤활유로 삼거나 “저 모델 예쁘네, 잘생겼네”하며 미모감별사 역할을 담당하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여간 심심한 게 아니다. 각설하고, 꺾어진 환갑의 세대들이 동요하고 있는 증후는 MBC TV 드라마 <아줌마>의 방영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친구>라는 영화로 폭발했으며, K2-TV 드라마 <푸른안개>를 통해 현재 절정을 이루고 있다.
 
‘아줌마’ 와 ‘빠줌마’ 
드라마 <아줌마>는 ‘치맛바람이 무섭다’고, 중장년층 여성 시청자를 브라운관 앞으로 대거 불러모았다. 솔직히 비(非)아줌마로서 아줌마의 현실을 그다지 체감하지 못해서인지 <아줌마>를 재미있게 시청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줌마와 아저씨가 이 드라마를 대하는 소감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지식인을 대표하는 장진구 아저씨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 이를 향해 똥침을 날리는 오삼숙 아줌마의 분투기’에 아줌마들은 ‘내 얘기 같다’는 속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아저씨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얘기’라는 불편한 기분을 맛보았다. 오삼숙을 이혼녀로 만들지 않겠다는 제작진의 애초 의도와 달리 오삼숙 아줌마가 결국 이혼도장을 찍고 당당한 이혼녀의 홀로서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스토리가 뻗어나간 배경도 ‘오삼숙 이혼’을 외치는 아줌마 시청자의 열렬한 요청에서 비롯됐다. 말랑말랑한 동화같은 얘기의 젊은층 대상 드라마에 소녀적 감성을 발동하며 눈높이를 낮춰온 아줌마들이 모처럼 현실밀착적인 얘기에 제 목소리를 낸 것이다 .
 
요즘 콘서트 현장에도 아줌마 부대의 발걸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문세나 김건모 같은 가수의 콘서트에 30, 40대 여성팬이 줄을 잇고 있다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 이들의 콘서트 참관 태도가 다분히 팔짱 끼고 방관하다가 박수로 마무리 짓는 점잖은 것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플래카드 같은 응원장비를 준비해오는가 하면, 팔을 뻗어 야광봉을 흔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들(idol) 가수에 대한 청소년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4월초 연세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이문세 공연에서는 3명의 아줌마 관객이 가수의 무대매너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실신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류의 프로그램에나 등장할 법한 얘기다. <아줌마닷컴>같은 여성 포털 사이트에는 조성모, 홍경민, 유승준, 차태현, 포지션 같은 젊은 스타의 아줌마팬클럽도 탄생해 있다.

그래서 최근 ‘빠줌마’혹은 ‘빠누라’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10대 극성팬을 뜻하는 ‘빠순이’라는 말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비하의 뉘앙스가 없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표출하는 중년의 반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또 반갑다.
핑클 같은 신세대 그룹이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라는 곡을 타이틀로 삼은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한 것도 문화주권을 찾기 시작한 386세대의 주머니를 겨냥하겠다는 노림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왕년의 ‘싸나이’, <친구>와 함께 돌아오다 
아줌마의 다음 차례는 아저씨였다. 아저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영화관을 향해서다. 아저씨의 반란을 유도한 작품은 현재 극장가에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흥행작 <친구>. 요즘 영화관 앞에 가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담배연기를 ‘후∼’내뿜는 중년 사내들을 심심치않게 발견할 수 있다. 모두가 <친구>를 감상한 이들이다. 영화구경이라면 젊은 데이트족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라며 뜨악하게 반응해 온 아저씨들이 <친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노스탤지어 코드’때문일 것이다.
남자라면 대부분 ‘과거에 나도 한번 놀아봤어’라며 객기부리는 것을 무슨 살아있음의 증거로 삼곤 한다. 이 영화는 학창시절 한번쯤 주먹의 혈기에 진한 동경을 품어 본 사나이들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렸다. 그것이 현명함과 타협이라는 준거에 익숙해져 시들고 무력해진 현재의 중년에게 어떤 활력의 에너지를 제공한 것 같다. 몸에 좋은 건강주스, 보양음식 등을 체면을 불사하고 찾으면서도, 가슴 한켠에 ‘한번 죽어보는 거야’라며 사발주를 맞대고 싶은 사나이들. <친구>는 바로 그런 남자의 가슴을 진실하게 이해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영화 <친구>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일 터다. 개인적으로도 그저 재미 이상의 강렬한 파문을 경험하기는 힘들었다. ‘롤라장’이라 불리는 롤러스케이트장의 풍경과 목폴라, 목에 붙인 파스 같은 ‘그땐 그랬지’류의 소재를 만날 때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했다. 잘 생긴 영화배우 장동건의 사투리 연기에도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우린 친구 아이가’라는 한마디로 일사천리되는 남자의 맹목적 우정관은 선뜻 수긍하기 힘들었다. 영화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의 우연성과 비극성을 얘기했지만, 친구가 친구를 죽이는 파국적 결말을 보면서 잘못된 룰에 봉사하는 어리석은 남자다움을 미화한 것은 아닌가라는 불만도 품어보았다.

그럼에도 <친구>에 대한 중년남성의 이상열기에 동조하고 싶어진다. 그러고보니 몇 년 전부터 복고가 대중문화계의 화두로 자리잡아 왔지만, 날 것의 복고에 대한 주목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키치적 문화조류와 만나 낯설고 새롭게 재해석된 복고의 패션성만 요란스럽게 활개를 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소비자의 허한 가슴을 달래주는 것은 조미료를 치지 않는 그냥 복고였는지도 모르겠다.
 
중년은 사랑을 모르는 세대? 천만의 말씀! 
중년의 가슴에 불을 당긴 또하나의 드라마가 있다. 바로 K2-TV 드라마 <푸른안개>다. 시청률은 불과 10%대 전후로, 히트작이라고 말하기에는 겸연쩍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에 오른 시청소감이나 주변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아무리 이 드라마의 연출자가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처럼 매니아 드라마를 만들어 온 표민수 PD라지만, 이번 현상은 중년의 시청자, 특히 성별로 따지면 남성들을 동요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푸른안개>는 40대 중반 유부남과 20대 초반 여성의 불꽃 같은 사랑을 다루고 있다. 불륜이 드라마의 단골소재이기는 하지만 중년남성의 사랑 상대가 딸벌의 어린 여자라는 이채로운 설정 때문에 방송 전 원조교제를 모티브로 다뤘다는 화제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엄밀히 말해 <푸른안개>는 원조교제같은 병적인 사회현상을 다룬 드라마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 ‘불륜이냐, 사랑이냐’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기에도 뭔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문제는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예상대로 극중 두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또 격렬하게 엇갈리고 있다. 아저씨층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호의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 아줌마층은 어린 연인인 이요원을 표적으로 ‘할 짓이 없어 유부남을 꼬드기냐’며 못마땅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거나, 가정 파괴의 비윤리적 드라마라며 비난을 퍼붓고 있다. 얼마전 회사에서 동료들이 다같이 <푸른안개>의 재방송을 시청한 적이 있다. 그날 방송에서는 빌딩 옥상에서 이경영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뒤늦게 도착한 이요원이 신나는 표정으로 다가와 이경영을 뒤에서 살포시 포옹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때 동료 가운데 일부 남성은 그야말로 자지러졌다. 이경영에게 자신의 감정을 대입한 누군가는 ‘으아∼’라는 짜릿한 탄성마저 내뱉었다. 어린 여자의 적극적 사랑표현이 가져오는 반향이 저 정도로 파워가 있을 줄이야.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님에도 놀랐다.
남성들이 <푸른안개>에 환호하는 이유는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대리만족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를 통해 중년에게도 ‘사랑의 갈증은 현재진행형이다’라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할 수 있다. ‘롤리타(Lolita) 신드롬’에서 자유롭지 못한 중년남성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도 엿볼 수 있다.

다채로운 트렌드가 혼재해 있는 요즘, 30대, 40대 문화시장이 때로는 폭발적으로, 때로는 묵직하게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유난스레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중독된 사랑이든 순수했던 어제에 대한 향수이든, 중년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는 요소는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성의 진한 향기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휴화산같은 소비자를 활화산으로 만드는 방법은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우리의 심장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는 셈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