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3-04 : Special edition - 문화 창조와 소비 메커니즘의 합리적 산물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문화자본으로서의 향수 >

문화 창조와 소비 메커니즘의 합리적 산물

현택수 I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skyofparis@yahoo.co.kr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첨단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의 복고풍이 일고 있다. 현재 복고의 바람은 패션, 헤어디자인, 영화, 대중가요, 음식, 놀이 등 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불고 있다.
올드 패션의 선글래스, 화려한 모피와 가죽 코트, 몸에 쪽 달라붙는 옛 양복 차림과 어울리는 테크노 뽕짝 가요, 아련한 멜로 영화나 드라마, 촌스런 광고, 구시대의 허름한 소품으로 장식한 주점, 구슬치기와 말뚝박기 놀이 등 흘러간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겨운 스타일들이 유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하나의 문화 기호가 되어 문화 마케팅의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하여 여러 가지 아리송한 의문점들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과연 우리 모두가 변하여 과거의 사고와 취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현재의 요구에 의해 과거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것일까. 복고 스타일과 취향도 합리적 소비를 겨냥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향수와 복고풍 스타일의 유행을 퍼뜨리는 자들은 누구인가.

선별, 유통, 유행 과정 거치는 기획생산품

복고풍은 대다수 사람들이 첨단 유행을 좇아가는 주류적 경향에 반하여 하나의 비주류적 경향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런 비주류를 주류화가 되도록 부추기고 만드는 데에는 문화생산자, 분배자, 언론의 힘이 작용한다.
만일 지금 내가 70년대 장발스타일에 판탈롱 바지를 입고 거리에 나간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에의 향수를 갖고 한번쯤 복고 스타일로 변신을 원한다 하더라도 아무것이나 복고풍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복고 스타일도 문화생산자들에 의해 선별되고 유통업자, 언론 등에 인정되어 유포되고 유행된다. 따라서 현재 복고풍패션이 유행한다 하더라도 집안 장롱 속에 오랫동안 간직해 놓던 아버지, 어머니가 수십 년 전에 입던 옷을 입으라는 말은 아니다.
일단 패션디자이너와 업계의 패션 리더에 의해 복고 형식과 그 대상의 윤곽이 확정된 다음에 이것이 유행되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복고풍의 도입도 마치 새로운 첨단 패션의 창작과 같은 발표, 인정, 유포 과정을 밟는다. 복고 스타일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를 위한 진일보처럼 과거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복고는 정확히 말해서 과거 그 자체 전부가 아니라 과거의 일부 혹은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의 요구와 목적에 맞도록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복고풍 스타일의 생산과 소비는 궁극적으로 합리적 소비를 겨냥한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보여진다..

문화 현상에서 복고는 창조와 마찬가지로 새로움과 낯설음의 미학을 동반하는 재창조이다. 절대미(絶對美)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특정 시대에 존재하는 미의 가치는 평가에 따라 변화한다. 복고풍이 현재에 도입될 때 복고의 미학적 가치는 재평가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과 문화 현상에 있어서 복고는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새로운 창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사람들은 현실적 필요성과 미래의 기대감에서 과거를 불러온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현실의 결핍에 대한 위안이나 반항에서 비롯되나 퇴행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는 과거 그 자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고 현실적 요구에 의해 새롭게 변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향수와 복고는 현실의 부족함을 메워주고 소비를 다양화하는 동시에 차별화하는 기호로 나타난다.

현실적 ‘조건’과 융화된 상품

문화생산자들과 소비대중이 맘껏 즐기고 있는 복고 현상의 키워드는 문화의 다양성과 차별화이다.
아방가르드의 미적 혁신과 진취성은 때로 엽기적일 정도로 의외의 낯설음을 동반한다. 미와 취향에 있어서 낯설고 새로운 것은 항상 앞서 존재하는 그 무엇만이 아니라, 과거 속에 잊혀져 있다가 불쑥 돌출하는 잠재태로서의 새로움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것의 출현과 유행은 기존 문화의 장을 다양하게 하는 동시에 분류하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패션디자인과 컬러의 복고 유행은 현재의 디자인과 컬러의 선택 범위를 넓혀주고 있는 동시에 이를 위계화(位階化)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잊혀진 과거의 남루한 디자인과 컬러는 풍요한 시대에서 촌스럽지만 ‘엽기적인’ 미(美)처럼 다가온다. 반면에, 불황과 경제위기에 빠진 시대에서는 과거의 디자인과 컬러가 경제성장의 안정과 풍요를 상징하며 현실에 필요한 ‘필수적인’ 혹은 ‘사치스런’ 미처럼 등장한다.

과거는 일률적이지 않는 다양한 모습으로 낯설게 현재에 나타난다.
우선, 지난 시대의 사고나 물건들은 촌스러우면서도 색다른 미로서, 혹은 값싸고 실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의 필수적 요구와 이색적 취향이 결합된 양상으로 복고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복고는 과거 그 자체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기 보다는 현실적 요소와 융합한 퓨전 현상으로 나타난다. 패션과 기호 식품, 광고 등에서 복고는 퓨전화함으로써 과거의 촌스럼과 궁색함을 탈피하여 기이함과 새로움으로 현실적 결핍을 교묘히 메워준다.
따라서 젊은층과 서민 대중은 안정과 재미를 느끼면서 성공적으로 현실적인 선택에 다다르게 된다. 즉, 그들은 한정된 현실적 조건에 의해 옛 것을 ‘필수적으로’ 선택한 것인데, 그것이 소비 주체의 ‘선택적’ 취향의 결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때 복고의 의미와 가치는 옛 것이되 반드시 옛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의 보편화에 의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향수와 복고는 복고/첨단이란 이분법적 대립항이 주는 차별적 의미와 가치에서 촌스러움/세련미, 늙음/젊음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고, 서민/부자의 계층적 차별을 뛰어 넘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의 향수가 주는 따스하고 풋풋한 인간미와 정이 현실의 삭막함과 아방가르드의 불안감을 떨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중년층과 신세대 젊은이들 모두에게 어필하여 성공한 광고나 상품의 사례는 외견상 그것들이 바로 이런 구별과 차별의 경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적, 구별적 요소가 ‘외견상’ 그렇게 모호하게 인식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지, 향수와 복고적 문화생산과 소비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복고적 취향과 문화생산, 소비는 본질적으로 고급이 아니다.

복고풍의 허름한 주점을 예를 들어보자. 이곳은 빛 바랜 영화포스터와 일그러진 문짝, 희미한 전등 아래 찌그러진 주전자, 텁텁한 막걸리 등 50~60년대의 소품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런 곳으로 술과 안주를 찾아 오는 이들은 누구일까. 외양상 중장년 세대는 과거의 향수 때문에, 신세대 젊은이들은 문화적 호기심에서 이런 복고주점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그런 주점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이들의 발길을 끄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자본화’하여 표출되는 보편적 인간 심성

한편, 과거의 향수와 복고풍이 일방적으로 촌스러움과 서민적 취향, 인간미 등만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복고풍 패션의 유행에 따라 화려한 색상의 고급 모피와 가죽제품이 인기가 있다고 하자. 이는 복고의 돌풍을 따라 귀족적 신분과 부를 나타내고 싶은 사람들이 과시욕과 차별화의 욕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도 복고풍의 디자인을 뽐내는 차들이 눈을 끌고 있다고 하는데, 원래 올드카(old car)는 귀족과 부자들의 골동품 수집 취향의 품목이다. 따라서 이런 디자인의 차들은 상류층과 신분상승을 기대하는 중상류층의 계급 구별의 기호를 겨냥한 차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수와 복고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과 욕구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이 표출되는 동기와 방식은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 다르다. 향수와 복고의 기호는 신분과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코드로 상징화되고 자본화된다.
즉, 이것은 문화생산자들이 새로운 기호와 소비욕구를 창조하고 자극하기 위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의 소재를 복원, 개조, 개발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복고 열풍도 그리 특이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복고현상이 특이한 만큼 미래 첨단 스타일의 유행도 특이한 것이다. 모든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현실의 요구에 의해 새롭고 특이하게 기획되고 실행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에 있어서 창조나 재창조, 그리고 소비란 항상 새로운 방식과 형식으로 나타난다. 설사 그것이 외견상 과거스타일의 반복이거나 모방인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따라서 향수와 복고풍 스타일의 유행이 낡은 미학의 고수와 구태의연한 소비를 의미하지 않고 은연중 새로움과 이색적임을 표방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문화소비는 합리적인 계산 아래 특이하고 새롭다고 인식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현대사회에서 소비자는 문화기획자나 생산자들의 마케팅 전략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맹목적으로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소비자 개개인들은 유행과 언론의 영향도 받지만,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문화적 취향에 따라 주체적이면서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다.

향수와 복고풍 스타일의 유행도 이러한 외부적 조건과 내부적인 소비성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과거에의 순수한 향수감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은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말처럼 소비는 현대 인간의 존재와 생활양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복고풍 스타일의 유행과 소비에 있어서 우리의 존재와 의식의 본질은 위와 같은 문화창조와 소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가운데 잘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