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8 : 클럽·클러버를 위한 변명 - “우리를 더 이상 삐딱한 눈으로 보지 마라”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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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den Birth _ 클럽·클러버를 위한 변명
   손혜영 |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 amorfati77@gmail.com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뜨젠느> <인스타일> 등의 잡지를 거쳐 <마리끌레르> 피처 기자로 재직중이다. 서른이 한참 넘은 지금도 록음악과 클럽과 페스티벌을 사랑해마지 않으며, 드라마틱한 삶을 여전히 기다리는 철들지 않은 여자.
 
“우리를 더 이상 삐딱한 눈으로 보지 마라”
 

이제 더 이상 놀이문화에는 당위성이 필요하지 않다. 사회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골정서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주말을 그저 즐긴다. 밀레니엄 이전의 20대들이 새로운 문화를 생성하는 데 골몰하고 새로운 장르를 ‘배운 후’ 즐겼다면, 21세기의 20대들은 본능적으로 즐길 줄 아는, 보다 넓고 즉각적인 취향을 가졌다. 조금 과장해서, 전 세대가 파이오니어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강했다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책임감 대신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중고등학교 국사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그리고 여전히 쓰여 있을 것이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한민족.’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30여 년의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예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걸’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회적 방탕아(?)의 낙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 한 인디 밴드가 공중파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옷을 벗고 설치는 바람에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은 하나로 묶여 된서리를 맞았다. 홍대 앞 클럽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모든 밴드들이 옷을 그렇게 자주 벗고 스트립쇼를 벌이는 거냐, 이런 저질문화를 양산하는 홍대 앞의 클럽데이를 없애라, 등등. 또한 얼마 전 모 가수의 억울한 심정 토로 뉴스에서도 알 수 있었듯 클럽 DJ이거나 클럽을 좋아하는 유명 클러버들은 항상 마약사건의 일차적인 확인대상으로 지목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수주의자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클럽문화는 서서히 성장해왔다. 90년대 초중반 홍대 주변을 근거지로 작게 자리를 잡았던 몇몇 라이브 클럽은 틀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인디펜던트 밴드’, 소위 ‘인디 밴드’라는 이름을 달고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연습을 하며 독자적인 유통망을 구축해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90년대 후반에는 자우림·델리스파이스·언니네 이발관·크라잉 넛·코코어 등의 밴드가 이름을 알렸다. 힙합의 기운도 마스터플랜이라는 클럽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동시에 일렉트로닉 음악, 하우스 음악 등이 외국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DJ들이 작은 클럽에서 음악을 틀면서 라이브 클럽이 아닌 댄스 클럽을 이끌었다. 강남에 나이트가 있었다면 홍대에는 클럽이 있었다.

클러버들이 나이트에 가지 않는 이유
90년대의 20대들은 ‘X세대’로 불렸다.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 나름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자라온 개인주의적인 젊은이들. 점차 자신들만의 문화적인 테이스트(Taste)를 갖기 시작한 세대들. 우리들은 대학시절 (미미하게 유지되던) 민주화를 위한 투쟁 대신 해외 유럽여행을 했다. 자연스럽게 관심은 ‘사회’에서 ‘나 자신’으로 넘어갔다. 공공의 적이 없어진 우리들에게 투쟁해야 할 대상은 획일화와 기성세대였고, 만들어야 할 것은 새로운 놀이문화와 다양성이었다.
이전 20대들의 화두가 ‘정치’였다면 새로운 X세대의 화두는 ‘문화’였다. 음악과 영화와 공연 시장이 활성화됐다. 전문 영화잡지, 전문 음악잡지들이 연이어 출판됐다. 어떤 의미에서 당시의 클럽문화는 이러한 일종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인디 밴드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드는 노래를 부르고 대형 기획사와 대형 자본으로 키워진 음악을 경계했다. 발라드 혹은 댄스로 양분되던 주류 음악계와 달리 클럽에서는 펑크·그런지·하드코어·힙합·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음악을 맛볼 수 있었고, 폴로셔츠에 면바지, 이스트팩 가방을 교복처럼 입은 친구들과 달리 독특한 의상이나 보헤미안 의상의 친구들이 개성을 뽐내며 클럽을 드나들었다. 홍대는 압구정과 다른 방식으로 클럽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비록 나이트에서도 클럽에서 나오는 가장 힙한 음악을 틀어주었다고 해도 클러버들이 나이트를 선택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부킹’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그간 주로 이루어지던 놀이문화는 ‘단체’를 통해 비롯됐다. 대학의 MT와 OT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너는 우리의 그룹에 들어왔으니 한 배를 탄 동지다, 그러니 막걸리와 소주를 하염없이 먹으며 놀자.’ 회식은 어떤가. 단체로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상대방을 즐겁게 하고 동지의식을 느껴야 했다. 개개인의 테이스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체에 들어온 이상 함께 즐겨야 한다. 거기에 단체 미팅(소개팅)이라니, 이것도 한국 아니면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일 것이다. 부킹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러 명의 친구들이 룸을 하나 빌리고 남의 도움으로 이성을 만난다.
하지만 클럽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개인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성을 만나고 싶으면 직접 가서 말을 건다. 춤을 추고 싶으면 춤을 춘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바에 앉아 술을 마신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굳이 단체로 함께 술을 마시고, 단체로 미팅을 하고, 단체로 춤을 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클럽은 철저히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놀이문화다.

강남·홍대 앞·이태원 … 3색 Taste
그리고 현재, 강남도 많은 것이 변모했다. 트렌드의 중심이었던 압구정은 오렌지족의 명성만을 남긴 채 ‘한 물’ 건너가기 시작했고, 강남역 근처의 나이트는 장사가 안 된다고들 했다. 부킹을 하고 싶으면 호텔의 나이트를 찾아가면 된다. 우리들에게 유명했던 나이트클럽은 결국 문을 닫았고 몇몇은 클럽으로 재탄생했다. 강남역의 클럽 매스나 청담동의 클럽 서클과 앤서, 그리고 최근 각광받고 있다는 에덴까지. 힙합·하우스·일렉트로닉 음악이 가득한 클럽은 홍대 앞의 벤치마킹이었다. 홍대 앞 클럽보다 럭셔리하고, 보다 패셔너블한 느낌을 가미한 클럽들이 강남을 다시 주름잡기 시작한 것이다.
홍대 앞 역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디 밴드들은 훨씬 더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라이브 클럽도 음악 장르·스타일에 따라 자신들의 성격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하며 세분화되고, 인원에 따른 크고 작은 공연장을 생성시켰다. 또한 크고 작은 하우스 클럽들이 모여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클럽데이’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주말 새벽에는 클러버들이 택시를 잡느라 한바탕 홍역을 치룰 정도가 됐다. 이태원은 새로운 밤의 강자가 됐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면서(학교에서 외국인 강사를 채용하기 시작한 것이 큰 계기였다) 유럽이나 미국 스타일의 펍과 클럽들이 이 문화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취향이 좋다고 알려진 호모섹슈얼이 모이는 게이 클럽도 유명해져서 요즘에는 이성애자들조차 춤을 추기 위해 들른다.

지금, 새롭게 부화중
이렇게 클럽문화가 변모하는 데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달라진 점도 크게 한 몫 했다. 이제 더 이상 놀이문화에는 당위성이 필요하지 않다. 사회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골정서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주말을 그저 즐긴다. 밀레니엄 이전의 20대들이 새로운 문화를 생성하는 데 골몰하고 새로운 장르를 ‘배운 후’ 즐겼다면, 21세기의 20대들은 본능적으로 즐길 줄 아는, 보다 넓고 즉각적인 취향을 가졌다. 조금 과장해서, 전 세대가 파이오니어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강했다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책임감 대신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예전 문화의 화두가 영화·음악 등의 보다 구체적인 장르였다면, 지금의 화두는 패션 혹은 스타일이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던 잡지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새로운 종류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잡지나 패션잡지가 인기를 얻는 시대다. 음악의 예술성이나 개성은 중요하지 않다. 클럽이라는 보다 트렌디한 스타일, 힙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다. ‘인디’ 밴드들 역시 더 이상 독립자본이나 독립유통이라는 단어를 통해 신념어린 뮤지션으로 엮이기를 원치 않는다. 아이돌 밴드에 대해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다양한 음악 중 하나를 선택해 연주하는 이들로 보이길 원하고, 오버와 언더의 구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또한 현재의 클럽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파티문화와의 접목이다. 클럽에 상주하는 DJ가 아니라, 유명한 해외 아티스트와 DJ들을 초청하고 새로운 테마를 만들어 매주 다른 분위기의 파티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패션 브랜드와 패션 매거진조차 자신들의 런칭파티나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클럽이라는 분위기와 스타일을 이용한다.
클럽문화는 밤 뒤편의 어두운 문화에서 트렌디한 패션문화로 부상하는 과정 중에 있다. 여전히 트러블메이킹의 장소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음주가무와 관련한 놀이문화가 항상 음성적으로 기능해왔음을 생각하면(혹은 음성적으로 비추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이는 꽤 괄목할만한 현상이다. 요즘은 이러한 클럽문화가 페스티벌 문화와 연결되기 시작한 듯 보인다. 다시 한 번 국사책의 한 문장을 떠올려 본다.
‘춤과 노래를 좋아한 한민족.’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