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가 예술로 밥을 먹고 사는 이들에겐 힘든 현실이라는 데 있다. 예술가가 예술보다 ‘현실(세상)’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 아일랜드 인디 영화 <원스>의 얼개는 지극히 단출하다. 남자는 진공청소기를 수리하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체코에서 온 여자는 가정부로 일하고, 틈틈이 거리에서 꽃을 판다. 여기에 ‘음악’이 파고든다. 그런데 이 음악이 예술이다. 멜로디는 귀에 착 감기고, 가사는 가슴을 후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한 컷의 이미지였다.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레 매만지기 시작한 남녀가 오토바이에 몸을 의지해 드라이브를 떠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장면. 가진 건 없지만, 오직 음악을 하겠다는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들이 소리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울컥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술이란 이런 것일 게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담담한 눈빛처럼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질문을 품고 있는 것, 그리하여 좀처럼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변화한다.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제도’의 ‘밖’에서 바라보노라면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듯하지만, 그 심연의 본질은 변한 적이 없다. 분명한 건 예술에 변화를 추동하는 외부적인 요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술의 표면에 일렁이는 변화가 동세대 대중의 기호와 취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한 번 살펴보자.
소녀시대·원더걸스는 ‘반복과 중독’이라는 트렌드의 산물이다. ‘미드’ 열풍을 몰고 온 <프리즌 브레이크>는 ‘속도감’을 의미한다. 우스꽝스런 분장과 “선배니~임~”으로 시작하는 유행어로 재미를 안겨주는 <분장실의 강 선생님> 같은 개그 프로그램은 30초마다 웃겨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 이유는 하나. 대중은 설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는 또 어떤가. <포춘 코리아>의 신기주 기자는 고사 직전에 빠진 한국 영화가 다시 날갯짓을 펴게 된 것은 새로운 감독들과 새로운 영화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추격자>를 제작한 김수진 대표(영화사 비단길)도 “1970년대생 이후 감독들하고만 영화를 하겠다. 그들은 어쩌면 유전자가 다른 것 같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1974년생)과 <과속 스캔들>의 강형철 감독(1975년생)을 지칭한 듯하다.
1990년대 초에 데뷔한 강우석·김의석 감독, 1990년대 말에 모습을 드러낸 김지운·봉준호·박찬욱 감독에 이어 지금 한국 영화의 떠오르는 감독들이다. 영화의 화법과 템포·시대상, 그리고 영화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고 평가 받는 감독들이다. 이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시대의 공기’였다. 경찰서에 걸린 ‘전두환’ 사진과 연쇄 살인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감독은 그 시대를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목과 같이 쫓고, 쫓긴다. 그게 전부다. 관객들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재미있다고 여긴다.
예술은 변화한다,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가 예술로 밥을 먹고 사는 이들에겐 힘든 현실이라는 데 있다. 예술가가 예술보다 ‘현실(세상)’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뮬라크르, 복제, 스펙터클 등 오늘날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언어의 조합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인터넷·이동·정보화·자동화·소비문화 등 예술에 가해지는 시대적인 변화상을 꼼꼼히 되짚어야 한다.
우선 ‘문화적 복제’ 현상을 보자. 지금 우리는 장 보드리야르가 얘기한 대로 ‘복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시뮬라크르, 즉 원본이 없는 복제물, 원본 없이 만들어진 구성물이 시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영화, 음반, TV 속 이미지는 더 이상 원본과 복제물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걸 일러준다. CNN을 통해 보이는, 9.11 테러로 허망하게 무너져가는 쌍둥이 빌딩의 참혹한 이미지는 할리우드 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폭력·전쟁·죽음 등의 충격이 ‘스펙터클’이라는 비주얼적인 충격으로 압축된다. 영화 같은 비현실적인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하고 있다. ‘미디어’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똑같은 촛불집회를 놓고 어떤 미디어는 “법이 죽었다”고 일갈하고, 어떤 미디어는 “제2의 민주화”라고 정의한다. 스스로의 관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디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모두 다 미디어가 ‘편집’한 유행에 맞춰 살아간다.
<꽃보다 남자>를 통해 상상, 그 이상의 하이판타지 로망스를 꿈꾸다가, 지금은 <찬란한 유산>에 꽂혀 있다. 이것도 언제 ‘빛바랜 유산’이 될지 모른다. 사소한 사건을 ‘이벤트’로 만들어내는 미디어의 능수능란함에 김연아는 “씽씽씽~”노래를 부르고 있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을 낳고,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를 복제하는 현실 속에 예술가와 수용자들이 한데 모여 사는 형국이다. 이 사이에 수용자는 물론 예술가조차 ‘구경꾼’이 되고 만다.
구경꾼에서 관찰자로, 관찰자에서 산책자로
그렇다고 우울해 할 수만은 없다. 발터 베냐민이 명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사진이라는 복제기술의 발명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우라의 상실’만은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기술적 복제가 문화적 복제를 통해 문화 자체를 복제하는 ‘복제 문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그에게 복제란 새로운 변형과 창조의 원천이었다. 다른 이들이 원본과 진실이 소멸하는 시대를 비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는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물론 예술가가 전 지구화와 신자유주의로 촘촘히 엮어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 힘에 겨운 일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간파한 것처럼 세계는 평평하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하다가 사표를 던진 로버트 라이시가 역설한 대로 우리는 모두 ‘부유한 노예’에 불과하다. 예술가도 어쩔 수 없다. 개인적 선택과 사회적 선택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세상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보편적 가치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예술가라는 걸 잘 알고 있다.일찍이 베냐민은 ‘보는 자’로서의 인간을 세 가지 스타일로 구분한 바 있다. 구경꾼·관찰자·산책자가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관찰자는 미리 규정된 체제 안에서 보는 사람, 관습에 박혀 있는 사람”이다. 관찰자란 자신의 의지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사회적인 제도나 관습,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들의 배치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보는 사람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베냐민의 표현을 훔치자면 지금 이 시대의 대중은 구경꾼이요, 그보다 조금 더 사유한다고 여기는 지식인과 예술가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그렇다. 예술가란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 구경거리에 정신을 빼앗긴 구경꾼이 되어서도, 단순히 시대에 순응하는 관찰자도 아닌, ‘자기 개성을 확보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베냐민의 ‘관찰자’는 들뢰즈에겐 ‘유목민(노마드)’이 될 것이다. 제도적인 질서와 관행들, 권력과 위계의 문법을 거스르며 새로운 규칙을 창안하는 자이다. 예술이 시각문화와 비주얼 컬처로 확장되어 가는 지금, 들뢰즈는 태도와 실천을 강조한다.
고정된 자아의 정체성과 계급적 범주에 얽매이지 않는 것, 자본의 욕망을 나의 욕망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사유하고 운동하며 스스로를 실험하는 존재가 되라고 격려한다.
오해하지는 말자. 스펙터클 사회란 피할 수 없다. 디지털, 신자유주의 세상도 피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호흡하는 시대의 공기와 조건을 거역할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고민은 필요하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스로 창안하는 스펙터클, 자본과 소비의 스펙터클에 파열음을 내는 스펙터클, 차이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균열 내는 스펙터클을 고민해야 한다.
그게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광고인도 포함된다. 개성을 잃지 않은 산책자, 사유하고 실험하고 운동하고 실천하는 유목민. 이들이 생산하는 예술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