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대리/CP(조동완 CD)
고민은 지난 해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디지털 기술 이미지 광고를 시작한 99년의 캠페인을 이어갈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TV-CF의 표현방향도 2, 3년후에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올 LG/전자CU의 디지털 제품들이 가져올 ‘생활의 즐거운 변화’.
많은 고민이 거듭되고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사라지기를 몇 달. 긴 고민과 토론 끝에 우리가 선택한 소재는 ‘오지’였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도 LG / 전자CU의 디지털 기술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디지털 기술을 차가운 기술이 아닌 따뜻한 기술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광고주와의 협의를 거쳐 광고에 등장할 제품은 디지털 TV와 IMT-2000으로 결정 되었고, 디지털 TV는 낙도의 초등학교를, IMT-2000은 실크로드를 배경으로 콘티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디지털 LG’를 상징할 수 있는 징글(jingle)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소리로도 우리의 TV-CF를 기억하도록 하였다.
조용한 섬마을의 작은 소동
1차로 제작된 디지털 TV편은 낙도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디지털 TV와 함께 더 넓은
세상을 만난다는 내용.
먼저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헌팅팀을 3개조로 구성, 남해안의 섬들을 훑고 다녔다.
헌팅 장소의 가이드 라인은 학교 주변에 마을이 보이지 않을 것, 외진 느낌을 줄 것,
학생 수가 가능한 적을 것 등이었다. 2주간의 헌팅을 거쳐 찾아낸 곳은 경상남도 통영군 소매물도의 자그마한 학교였다. 정식 명칭은 ‘매물초등학교 소매물도 분교’. 그곳은 우리가 원하던 가이드 라인에 딱 들어맞는 학교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언제나 쉽지는 않은 법. 학교의 위치나 주변 환경은 좋았으나, 97년에 폐교된 학교라는 것이 문제였다. 학교 건물 안은 마치 영화 <XX괴담>의 무대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함께 간 아트 디렉터와 세트맨들은 하늘만 보며 묵묵부답.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좋은 여건을 갖춘 학교를 찾는다는 보장도, 그리고 시간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 우리는 부딪치기로 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결국 대매물도에 있는 매물초등학교에서 교실 하나를 꾸밀 만큼의 책걸상, 게시판 등을 임대해 교실 개축 작업에 들어갔다. 빌려온 비품들로 학교를 꾸미고, 바닥, 천정, 유리창을 수리하고 잡초만 무성하던 운동장까지 깨끗이 정리해서 촬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각종 기자재와 비품들의 이동도 끝마쳤다. 자동차 길 하나 없는 작은 섬마을의 산꼭대기에 위치한 학교까지 하나하나 사람들이 들고 지고 나르는 일이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한 반을 재현해야 했기에 촬영 스태프는 물론 모델의 숫자도 일반 CF에 비해 훨씬 많았다. 섬의 인구는 30여 명인데, 쵤영팀은 무려 40여 명. 광고 카피대로 ‘파도와 갈매기만이 친구’였던 소매물도가 늦겨울에 난데없이 여름 피서철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등장하는 교사와 학생들은 모두 서울에서 데려간 모델들. 특히 여교사 역을 맡은 박마리 씨는 광고 심의과정에서 실제 초등학교 교사인지를 확인해달라고 할 정도로 실감나는 연기를 했으며, 어린이 모델들도 지나치게 깨끗한 도시물(?)을 빼기 위해 며칠간 옷도 안 갈아입히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낙도 초등학교의 분위기를 내도록 했다.
모래, 바람 그리고 태양과 함께 한 15일
두번째로 제작된 것은 IMT-2000과 함께 실크로드 탐사를 떠난 대학생들의 이야기.
수천킬로미터에 걸친 실크로드에 인접한 주변 국가들을 검토한 결과, 촬영 장소는 인도 서북부 자이살메르시 일원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지대인 타르사막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촬영 준비. 9시간을 날아 인도 봄베이 도착, 그곳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자이푸르시로 4시간, 다시 자이푸르시에서 자이살메르시까지 버스로 17시간. 그렇게 인내심과 체력을 테스트하며 선발대가 현지에 먼저 도착, 촬영 장소 헌팅과 현지 모델 미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그런데 마음이 급한 우리와는 달리, 한없이 느긋하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낙천적인 인도 사람들과 일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간단한 일이 아니
었다.
난관은 또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워낙 땅덩어리가 큰 나라여서 이동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일이었다. 그 뜨거운 날씨 속에 에어컨도 없는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것부터, 공항에서 자이푸르, 자이살메르까지 가는 동안의 교통편도 예정대로 잘 연결되지 않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봄베이에서 모델 미팅, 장비 확인, 후발대를 위한 교통편 예약 등을 마치고 자이살 메르시로 이동하여 촬영 장소 헌팅에 들어갔다. 봄베이는 ‘지옥의 도시’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지저분하고 거지들로 가득차 있었지만 자이살메르시는 인도 서북부의 관광도시답게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콘티 내용을 바꾸고 싶을 정도로. 헌팅을 마치고 며칠 뒤 합류한 본대와 함께 촬영 개시. 첫 컷의 무대는 자이살메르시 에서 70km 떨어진 사막이었다. 덜컹대며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멈추는 것이었다.
45km 지점에서 마을 사람들의 폭동이 일어난 것. 차가 갈 수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촬영 첫 날부터 이렇게 일이 꼬이다니.
급히 차를 돌려 다시 30km를 이동, 다른 사막으로 향했고 끝내 헌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사막에서 겨우 촬영을 시작했다.
현지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에이전트들은 모든 것이 “No Problem!”이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다가는 큰일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우선 그들이 가져온 기자재부터가 문제였다. 촬영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모니터가 찍찍대며 보였다 안 보였다를 거듭하더니 푸르륵 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뿐인가. 제너레이터, 팬 등 자질구레한 기자재들도 툭하면 고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중엔 제일 중요한 카메라가 고장나지 않는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기차 씬을 찍을 때만해도 그랬다. 새벽녘에 예정된 기차에 탑승, 라이트와 카메라를 설치하려고 들어가니 웬걸, 기차는 모두 칸막이가 쳐진 침대칸으로 바뀌어 있었다.
분명히 우리가 예약한 것은 일반 객차였는데, 정말 황당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갑자기 수리에 들어가게 됐으며 언제 올지도 모르니 기다려보라는 한가한 대답만 되풀이할 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이구, 답답해!”
그뿐인가. 촬영 도중 자이살메르시에서는 홀리 축제라는 전통 축제가 열렸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즐거운 축제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축제였다. 그 축제의 풍습이 아무에게나 물감주머니를 던져 온 몸이 물감 범벅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촬영 기사는 온 몸으로 카메라를 보호하며 간신히 빠져나왔고, 의상과 조명기자재를 비롯한 각종 소품과 기자재를 보호하기 위해 스태프들이 온 몸에 시뻘건 물감칠을 하며 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뀌는 사막 지형,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햇살, 보이지도 않는 잔모래 바람이 하루 종일 불어 입속에는 늘 모래가루가 씹혔다. 처음에는 새롭다는 느낌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독특한 향료가 가미된 음식,
사막에서 끓여 먹던 모래 섞인 라면 등, 수많은 어려움으로 가득찬 15일간의 촬영이
힘들게 끝났다.
디지털 기술과 광고의 행복한 조우
갖은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도 무사히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시사를 마치고 TV를 통해 우리의 땀과 노력이 깃든 TV-CF가 방영되고 있는 중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소비자들은 정보나 기술의 혜택을 일방적으로 제공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는 소비자들이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킬 수 있는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그러한 디지털 기술을 소재로 하는 광고 역시, 고객들에게 일방적으로 기업의 메시지만을 강요하는 광고보다는 이제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내는 광고가 되어야 함은 분명한 일이다. 광고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공감, 그리고 디지털 기술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인 쌍방향성,
이 둘은 어쩌면 LG/전자CU의 TV-CF 속에서 행복한 조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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