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이라는 콘텐츠 자체의 브랜드력도 있었지만, 공동제작을 맡은 덴츠와 하쿠호도, 그리고 니혼TV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불황을 일컬어 ‘100년 만에 한 번 올까말까 하는 불황’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제파동은 우리가 지난 97년 IMF 외환위기 때 경험했던 것처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이 정도(正道)인가’를 의심하게도 한다. 달리 말하면 기존의 방식과 가치관에 대한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 것이다.
매체사, 광고회사 수익모델의 위기
일본 경제도 예외 없이 작금의 불황과 혼란의 복합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가운데, 세계 시장을 석권한 기술력과 안정적인 내수기반으로 견고한 구조를 자랑하던 일본 기업들의 수익성도 커다란 타격을 입고 있다. 기업들의 이러한 수익성 악화는 아직까지 ‘투자’라기보다는 ‘경비’의 의미가 강한 광고비의 삭감으로 이어졌고, 이는 이른바 ‘철옹성’이라고 불렸던 방송사나 신문사, 그리고 광고회사 등 광고업계의 수익구조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2008년도 결산발표가 한창인 요즘, 아직 발표되지 않은 후지TV 이외의 니혼TV(NTV), 도쿄방송(TBS), TV아사히(EX), TV도쿄(TX) 등 주요 방송사들은 각각 14억 엔, 38억 엔, 19억 엔, 2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후지TV(CX)도 전년도 수준을 크게 밑도는 이익감소나 적자가 아니냐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또한 광고회사 1, 2위인 덴츠(電通)와 하쿠호도(博報堂) 역시 각각 204억 엔, 32억 엔의 적자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실적 발표들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의 톱뉴스를 장식하는 등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다. 아마도 한국의 경우라면 최근과 같은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기업이 도산한 것도 아니고 적자를 좀 낸 것일 뿐인데 웬 호들갑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위에서 말한 방송사 및 광고회사의 적자나 이익감소 자체가 거의 대부분 각사(各社)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회사마저~’ ‘그 방송국마저~’ 등, 소위 ‘가장 믿는 구석’이라 할 수 있었던 업계마저도 저조한 실적을 면치 못한 점에 대한 우려 섞인 반응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수익모델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던가를 반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광고업계의 수익모델 위기의 전조는 2007년 가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표 1>.
일본의 각 방송국의 스폿 판매고가 갑자기 전년 동기 수준보다 5%~10%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특별한 원인이 발생하지 않는 한 전년 수준을 유지하거나 조금이라도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듯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은 조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나타난 일시적인 기업의 출고량 조절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그런 한편으론 광고매체로서의 TV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징조가 표면화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세계적인 불황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수익모델 재구축의 키워드, ‘콘텐츠 창출 및 커뮤니케이션 능력’
덴츠의 경우 이번 적자의 주된 원인이 해외 출자기업의 주가 하락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수익모델의 한계를 노출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업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수익의 70% 정도를 기존의 4대 매체가 차지하고 있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심플한 광고업계의 수익모델의 취약성이 지적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수면 위로 부상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은 ‘늘 있을법한 적자요인’들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의 광고수익을 올렸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요인들이 반세기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그들의 고공비행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지적된다.
첫째, 광고주·광고회사·방송사 간에 이루어지는 광고매체(기존의 4대 광고매체) 거래가 상호간의 오랜 관계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구조(賣り手市場-우리테시죠, Buyer's market; 수요가 공급을 웃돌아 파는 쪽이 유리한 입장에 있는 시장 상황)와 상관행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광고회사와 매체사들이 가지고 있는 편중된 정보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호되는, ‘철옹성’이라 불릴 정도의 강건한 수익구조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일본 사회에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터부시 될 정도다). 심지어 이러한 거래구조는 각 방송국 광고수입의 40~60% 이상을 상위 1, 2위의 광고회사에게 의존하는 운명공동체적인 기업관계 구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익성이 지금처럼 악화되기 전부터 광고업계 내에서는 이미 수익모델 개선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제 그 성과가 보다 구체적으로 힘을 발휘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의 적자나 이익감소 규모가 이 정도에서 그친 것도 그 동안 일궈온 수입원 다각화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덴츠의 경우 올림픽·월드컵·만국박람회 등 국가 차원의 이벤트를 많이 주관해 왔다. 그러는 가운데 방영권과 입장권 판매 네트워크 구축, 행사 내용 편성과 연출, 행사 전체 지휘 능력 등에 관한 노하우는 일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개최되는 각종 대형 이벤트의 성패를 좌우하는 차원에까지 이르렀다<표 2>.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덴츠의 이러한 활동들이 일반대중(소비자)에게 새로운 이벤트(콘텐츠·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기업들의 광고투자를 유도하는 시스템 구축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TV광고 역시 프로그램과 더불어 TV의 콘텐츠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한 요소라고 인식하고 있다. 개별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구입 유도나 이미지 구축이 아닌 콘텐츠 개발의 일환이라는 그러한 의도는 일견 의아심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광고주와 함께 TV의 콘텐츠를 개발해 제공함으로써 TV에 더욱 다양한 볼거리가 생기고, 그에 따라 광고매체로서의 TV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그런 매체에 광고를 내보내는 기업의 이미지도 함께 고조된다는 인식이 일본 특유의 신뢰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관계 구축은 그들이 창출해 내는 콘텐츠 전반에 대해 일반대중에게 높은 신뢰감을 갖게 하는 유용한 커뮤니케이션의 툴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영화·음악·출판 등과 같은 종래의 콘텐츠 업계가 수 년 전부터 TV방송국과 광고회사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 지닌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네트워크를 이용하기 위함이다.
한 예로 지난해 일본에서 흥행에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崖の上のポニョ)> 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 감독의 작품이라는 콘텐츠 자체의 브랜드력도 있었지만, 공동제작을 맡은 덴츠와 하쿠호도, 그리고 니혼TV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흥행순위 상위권의 대부분의 영화가 이러한 공동작업에 의한 것이다<표 3>.
지금은 그 세력을 많이 잃었지만, 일본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서적·신문·잡지 등 인쇄매체의 영향력이 아직 건재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그동안의 콘텐츠 산업의 중심은 출판사나 신문사였다. 특히 영화의 경우 원작의 판권은 대부분 대형 출판사들이 쥐고 있었고, 영화화하여 화제가 되면 더할 나위 없는 선전효과를 얻어 더 많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영화제작에 투자를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199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의 중앙 방송사들과 주요 광고회사 등이 적극적으로 영화산업에 뛰어들면서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특유의 ‘신뢰 네트워크(광고주=기업)’를 이용한 막대한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투입함으로써 영화산업 전체 규모의 성장과 영화제작의 활성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콘텐츠와 커뮤니케이션의 융합이야말로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한 새로운 도전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도전은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새로운 조직체를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광고회사들은 지난해부터 내부조직 개편은 물론, 관련 회사의 인수합병 등 조직의 체제를 대대적으로 재구축해 오고 있는데, 역시 그 중심에는 보다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발휘라는 키워드가 있다.
한 예로 덴츠에서는 그동안 부서 간에 산재해 있던 콘텐츠 개발, 뉴미디어 개발, 프로모션 등의 기능을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센터와 비즈니스 통괄국으로 통합해 광고주의 다양한 니즈에 폭넓고 구체적인 솔루션 제공할 수 있는 조직구축을 실현하고자 하고 있다.
일본이 지닌 보수적인 성향의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도전이 반드시 기존의 방식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광고업계는 보여주고 있다. ‘재인식하고 재검토하여’ 기존의 방식에서 새로운 도전의 힌트를 찾는 것, 그래서 어쩌면 ‘새로운 도전’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본의 발전을 지탱했다는 그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 또한 있다. 결국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광고업계 부활을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지금까지 이루어 온 그들의 ‘성공신화’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