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평균적인 이미지의 대중'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의 발견’이라는 개성
추구 경향도 약해지며, 성별과 세대 간의 정보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때때로 ‘시장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중’을 낳는데,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매스 히트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제품 권유자를 타깃으로 매스 마켓을 공략
패션은 물론이고, 헤어스타일에 정성을 들이는 일본의 젊은 남성들은 패션잡지 지면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헤어스타일링의 필수품인 정발제[整髮料] 브랜드를 내놓고 있는 시세이도(資生堂)는 uno(ウ一ノ)라는 오래된 브랜드를 리뉴얼 출시하면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소비자 반응으로 히트 상품을 낳고 있다. 서로 다른 소비자 반응 중 하나는 ‘미리 설정한 마케팅 목표에 따른 의도한 결과’이고, 또 하나는 ‘예측하지 못한 시장반응’에 의한 것이었다.
시세이도의 남성용 정발제 우노(uno)의 마케팅 담당 과장은 일선 소매점에서 입수한 판매실적 데이터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작년 8월에 ‘파이버 네오’ 시리즈로 새롭게 브랜드를 출시한 뒤로, 그 전까지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여성 소비자의 구매비율이 20%에 달했기 때문이다. 시세이도가 1992년에 우노를 처음 출시한 이후 일관되게 남성용 브랜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는데도 이러한 결과를 나타낸 것은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왜 남성용 정발제 브랜드에 여성 구매자가 20%나 출현하게 된 것일까? 구매현장을 관찰한 시세이도 측은 다름 아닌 ‘젊은 여성’이 우노를 주로 구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제품의 인기 비결은 풍성한 머릿결 감을 연출하는 ‘에어로 무브’, 그리고 촉촉한 윤기를 제공하는 ‘아쿠아 글로시’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원래는 두 제품 모두 머리를 길게 기른 남성을 위해 기획, 출시된 제품이었다. 아울러 구매 여성의 세부 관찰 결과 세팅한 헤어스타일이 잘 망가지지 않는다는 점이 제품의 편익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여성용 제품은 머릿결의 유연함을 중시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헤어스타일의 세팅 파워가 약해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헤어스타일을 강하게 세팅할 수 있는 정발제를 왜 여성 소비자가 구매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패션에 있어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강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남녀 관계가 이성 관계보다는 친구 관계와 같은 감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시세이도의 진단이었다. 스타일이 멋진 남성들의 헤어스타일을 본 여성이 자신도 한 번 써보고 나서 제품의 품질을 실감하고, 그것이 소비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이라고 시세이도 측은 분석하고 있다. 물론 브랜드 인지도 향상과 상품의 시용 욕구를 자극한 요인으로는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 인지율이 80%가 넘는 영국 영화배우 올랜도 블룸(Orlando Bloom - 유럽용 GAP CF에 출연)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것도 플러스로 작용했다.
당초 올랜드 블룸은 남성 소비자의 인지율이 50%정도 밖에 되지 않아 광고모델로 기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세이도 측은 ‘여성이 남성에게 우노를 권하게 하자’는 의도를 갖고 일부러 제품 사용자보다 권유자에게 타깃을 맞춘 광고전략을 활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광고전략은 광고를 본 여성이 우노에 흥미를 가지게 하는 촉발제가 되었고, 그 결과 매월 판매액은
브랜드 리뉴얼 이전에 비해 두 배 정도 증가했다고 전해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아동용 제품의 타깃을 어린이의 부모로 설정하듯이 사용자(User)와 구매자(Buy-er)를 식별하는 전통적 마케팅 전략과는 달리, 구매자 입장에서 유력한 상대방(이성)이 제품 권유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여 구매를 촉진하고자 한 것이 오히려 뜻하지 않은 여성 시장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우노의 이러한 성공사례는 소비자의 기호를 세분화해서 상품개발을 하는 종래의 마케팅 수법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대중시장, 즉 매스 마켓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또 소비자들의 인식에는 어쩌면 남성제품, 여성제품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연령·세대 구분 않는 초성숙 소비사회의 단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제품을 다 갖추고 살게 된 지 오래된 요즘을 일본에서는 ‘초성숙 소비사회’라고 부른다. 이른바 초성숙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는 자신이 좋다고 여기면 남성용이건 여성용이건, 또는 20~30대 상품이건 중년용 상품이건 꺼리지 않고 소비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구하려고 하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초성숙 소비사회에서 상품이 제공하는 편익의 인지는 그 상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몫이기도 하다. 또한 구매한 제품을 크리에이티브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소비자층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출시된 상품이 마케터가 상정한 당초의 타깃 소비자가 아닌, 예기치 못한, 또는 의도하지 않았던 소비자층에서 구매, 사용되는 시장 상황은 언제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그동안 여성의 성역이었던 분야에 남성이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하는 시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향수가 그랬다. 지난 3월에 유니레버 저팬이 발매한 ‘악스(AXE) 프레이그런스 바디 스프레이’가 히트하면서 남성용 향수시장은 두 배나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신주쿠(新宿)에 위치한 이세탄(伊勢丹)백화점 남성관 8층에는 남성전용 데이스파(Day Spa)가 등장했다. 미스트 사우나로 피로회복, 땀구멍을 청결하게 해주는 트리트먼트, 캐비어를 사용해 얼굴피부 노화 방지 효과를 어필하는 안티에이징 페이셜 등의 코스가 메뉴로 마련되어 있다.
고객층의 중심은 3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남성. 스파 이용료는 30분에 1만 엔 정도의 결코 만만치 않은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미용에 신경 쓰는 중년 남성들이 고객으로 줄을 잇게 되었다. 이렇듯 일본의 미용 관련 시장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 의욕을 보이며 남성용 메뉴 개발에 더욱 힘을 쓰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별로 구분된 고유의 시장이 존재해 왔지만 일부의 시장에서는 그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거들을 착용한 중년 남성의 등장
“손님. 이건 여성용 가방인데요.” “그래도 이건 남자가 들고 다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비즈니스맨을 위한 가방을 출시하는 일본의 고급 비즈니스 가방 브랜드 TUMI의 매장에서는 이런 대화를 종종 들을 수 있다고 판매원은 전한다. 곡선미를 살린 이 가방은 여성 비즈니스 고객을 타깃으로 한 상품이지만 구매자의 반 이상은 남성이다. 비즈니스 백의 기능성을 추구하는 여성이 남성용 가방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처럼 단지 성별의 벽만 무너진 것은 아니다. 세대 간의 벽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내의 제조업체 트라이엄프 인터내셔널 저팬이 내놓은 남성용 거들은 2006년 2월에 발매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상품이다. 올해 들어 남성용 기본 속옷상품과 같은 수준으로 팔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트라이엄프는 지난 98년에도 남성용 거들을 상품화했지만, 당시에는 전혀 팔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트라이엄프가 도전하는 배경은 남성 소비자의 변화 때문이다. 남성들이 미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거나, 드러나지 않는 화장을 한다거나, 케이크나 디저트 이야기를 화제로 삼는 등 예전과는 다른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남성용 거들의 타깃 소비자는 맵시 나게 옷을 입고 싶어 하는 20~30대 젊은이였다. 하지만 남성용 거들에 손을 댄 사람들은 젊은 남성들만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배가 나와 내장지방 증후군을 걱정하는 중고년층 남성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트라이엄프는 작년 4월에 배를 눌러주는 거들을, 11월에는 힙업 효과를 강화한 타입의 거들을 출시했다. 그러면서 거들을 여성만이 아닌, 남성용 언더웨어의 기본 아이템으로 성장시키려고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는 거들을 내리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는 중년 남성이 늘고 있다는 뉴스보도도 나올 것이라는 예측도 전혀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는다.
남과 다른 나’에서 ‘대중의 한 사람’으로
이제까지 보아 온 몇 가지 최근의 마케팅 성공사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눈여겨보자. 작년 9월 광고회사 덴츠(電通)가 16~59세 남녀 1,800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자기 자신을 대중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72.2%에 달했다. 소비재 시장에서 한동안 ‘매스’의 시대가 가고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강조되어 왔지만, 소비자가 실감하고 있는 부분과는 동떨어진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 여름, 여성들 사이에서 가오(花王)가 출시하고 있는 남성용 샴푸 ‘석세스’의 인기가 높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광고 캠페인은 없었던 가운데 일어난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인기를 모으게 된 계기는 상품평가 구전 사이트에 있었다.
그 중 하나, ‘아이 스타일’이 운영하는 화장품 정보 전문사이트 ‘앳 코스메(@cosme)’에 ‘석세스는 머리를 상쾌하게 해준다’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장마나 여름철의 심한 더위 때문에 두피가 땀과 지방분비물로 끈적끈적거리는 것이 신경 쓰일 즈음에 올라온 이 게시물을 보고, 자신도 사용하고 있다고 댓글을 다는 사람이 줄이어 등장했다. 그러면서 대형 프로모션 행사를 펼친 제품과 다를 바 없이 큰 화제를 모았다. ‘남들과는 다른 나’ 가 아닌, ‘나도 그들과 같다’는 공감대 형성이 인터넷 상에서 상품평으로 열을 올리는 소비자들의 집결을 도운 것이다.
‘당질 0’ 맥주에 매료된 ‘숨어 있던 대중’
그렇다면 이처럼 ‘평상시에는 숨어 있는, 대중이라는 덩치 큰 타깃’을 어떻게 드러나게 할 것인가?
그러한 도전을 시도한 사례가 있다. 아사히맥주가 선보인, 맥주에 포함되는 당질(糖質)을 완전히 없앤 발포주 ‘스타일 프리’가 그것이다. 브랜드 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맥주를 마시면서 고민하게 되는 비만이라는 리스크를 줄인 신상품이었다.
일본에서 당질 함량을 반으로 줄인 제품은 있었지만, 제로 수준으로 출시한 제품은 처음이었다. 작년 3월 발매 당시에는 한 해 600만 상자(큰 병 1억 2,000만 병) 매출이라는 목표 판매수량을 내걸었는데, 판매실적이 호조를 보여 800만 상자로 목표를 상향조정했다. 여기에는 ‘건강지향 맥주’라는 한정된 수요의 상품을 인지시키려는 탁월한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다. 처음에는 맛을 어필했다. 맥주를 즐겨 찾는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 즉‘저칼로리 맥주는 맛이 연하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건강을 택하자니 맥주의 맛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소비자의 불만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발매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히맥주의 상품개발부장은 자신의 집 근처에서 대량으로 버려진 스타일 프리의 빈 캔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 보며 계절별로 신제품 출시가 많은 맥주 시장에서 ‘맛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마시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회고한다.
아사히 맥주는 작년 7월부터 TV광고에 ‘당질 0’라는 문구를 넣어 방영했고, 12월부터는 보다 직접적으로 ‘당질 0는 아사히’라고 소구했다.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당질 제로는 맛있다’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새로운 고객층 개척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이 맥주의 남성 소비자는 50대가 중심이지만, 여성에게는 모든 성인 연령대에 걸쳐 팔리고 있다고 한다.
고도 성장기와 같이 1세대 4인 가족이라는 평균적인 이미지의 대중이 일본에서는 사라져가고 있다. 한편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의 발견’이라는 개성 추구 경향도 점차 약해지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성별과 세대 간의 정보격차도 낮아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때때로 ‘시장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중’을 낳는다.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매스 히트로 연결될 수 있다고 업계 관계자는 조심스러운 진단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일본의 소비재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이 보이는 의외의 반응을 새로운 시장 개척으로 전환한 성공사례, 소비자 개개인이 아니라 공통된 편익을 제공하여 매스 시장을 일깨우는 성공사례가 적지 않게 보고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