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06 : Culture&Issue - '프라모델' 읽기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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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Issue_‘프라모델’ 읽기
 
  참을 수 없는
가벼운 모델링의 유혹
 
정 성 욱 | 영상사업팀 대리
swchung@lgad.co.kr



‘프라모델’, ‘조립식’, ‘과학모형’…. 누구나 어릴 적 한번쯤은 들어봤거나 손대본 완구들일 것이다. 마분지 상자를 열면 퍼즐조각처럼 분해된 ‘혼란(Chaos)’이 플라스틱 러너에 붙어서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리아드네(Ariadne)의 실을 쫓아가듯, 설명서를 보면서 이 무질서에 ‘조화(Cosmos)’를 부여해 완성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놀이’의 규칙이다.

‘내겐 너무 깊고 심오한 어른들의 놀이’

마치 보통사람들에게는 커가면서 버려지고 잊혀지는 ‘젖니’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프라모델은 사실은 어른의 취미에 가깝다. 본격적으로 즐기기 위한 장비나 재료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비용, 그리고 숙달되기 위한 시간과 노력,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의 장난감 놀이로만 보기에는 무척이나 넓고도 깊다. 단순히 조립만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리얼하게 색칠을 하고, 색칠 후 마치 시간과 환경에 의해 더럽혀진 것처럼 효과를 넣고, 나중에는 비네트(Vignette)나 디오라마(Diorama)처럼 이야기가 있는 장면을 구성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어느새 당신은 인간문화재 수준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프라모델에는 근본적으로 조립 시 ‘퍼즐’의 기능과 조립 후 ‘장식물 제공’의 기능이 있다면, 단순한 조립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후자의 기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인 셈이었다. 그래서 조립만으로 그럴싸하게, 멋있게 보이는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제조과정중 키트에 미리 색을 칠하는 방식이다. 반다이에서 나온 ‘스타트렉 시리즈’나 파인몰즈의 ‘붉은 돼지’ 사보이아기(機)의 경우 공장에서 도색작업이 끝나서 나온 물건이기 때문에 조립만으로도 완성품의 멋을 낼 수 있는 훌륭한 키트이다. 최근 들어 제품 구색을 맞춰나가고 있는 아오시마의 1/72 ‘프리페인티드’ 시리즈의 경우도 간단하게 자동차 모형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간단한 모델링’을 선도하는 것은 ‘건프라’ 분야다. ‘건담 프라모델’의 준말인 건프라는 1979년 일본에서 방영되어 현재까지도 일본의 서브컬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기동전사 건담’에 나오는 로봇병기를 소재로 만든 프라모델이다. 기동전사 건담은 로봇물에 현실적인 색채를 부가하는 당시의 트렌드에 맞춰 제작된 작품으로, 기존 애니메이션에선 찾아보기 힘든 전쟁의 고통과 상실의 고뇌를 솜씨 있게 다뤄냈다는 평가를 받았

다. 로봇병기들을 다루는 태도 역시 기존의 ‘만능 무적, 어린이의 친구’가 아니라 ‘댄디즘을 자극하는 로망의 기제, 필요악적 전쟁도구’라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로봇이라면 환장하는 아이들뿐 아니라 전쟁을 동경하는 성인층에도 어필했다. 바꿔 말하면 어릴 적에는 무작정 로봇이라고 좋아했던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된후에도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발표된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애니메이션과 비디오게임·소설·출판만화·완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온 건담시리즈의 저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건담 프랜차이즈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곳은 바로 완구분야. 아동용 TV 만화영화라는 것은 사실은 완구를 팔기 위한 30분짜리 TVC 인포머셜 혹은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가. 최초의 TV 만화영화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던 ‘건담’의 극장판 개봉과 더불어 반다이의 프라모델 키트 출시는 일본 남자아이들의 놀이문화를 규정지을 정도의 충격을 던져줬다. 건담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완구, 특히 조립식 ‘건프라’는 프랜차이즈 자체의 존재 의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기가 없었던 처음의 ‘건담’을 살려낸 속칭 ‘츄도모(츄각세이[중학생]+고도모[어린애]의 합성어)’세대를 결집시킨 것 역시 ‘건프라’였다. 건담 시리즈가 기본적 리얼리티를 지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구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고, 이제 28년이 된 ‘건프라’는 초기에는 상상도 못할 수준의 발전을 이룩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사용자 조립편의의 극대화다. 색이 다른 부분을 아예 별도의 부품으로 분할해 다른 색의 플라스틱으로 찍어냄으로써 단순 조립만으로도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도록 한 이런 식의 제조방법은 색칠이 번거로워서 프라모델을 멀리하는 많은 사람들을 건프라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적당한 투자와 그것을 보상하는 적당한 대가는 세상의 모든 효과적인 ‘중독’을 구성하는 메커니즘이다. 그 대가를 받을 때 느끼는 성취감 때문에 사람들은 PC방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눈이 빨개지도록 몹을 죽여가면서 캐릭터 레벨을 올리고, 강원랜드 카지노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며 슬롯머신을 당기기도 하는 것일 테다. 세상의 모든 ‘취미’는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취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도록 요구하고 거기에 맞는 대가를 제공하는 식으로 그 중독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취감’이다.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야 그 취미가 바로 자신의 직업과 동일하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경우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경우는 취미를 선택할 때 자신의 본업과의 사이에서 시간과 노력의 분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오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옛 추억을 떠올리며 동네 모형점에 들러 어떤 것이 좋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하나 사서 만들어보는 것은 어떤가?

* 본 칼럼에 실린 사진의 일부 원저작자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못했음을 알려드립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