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1-02 : 크리에이터@클리핑 - 眞짜 jeans이다. 디젤이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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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원 CD I 이현종 CD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중에서

허물기란 세우기보다 힘들고, 버리기란 구하기보다 힘이 드는 법이다.
찻잔 만한 컨셉트 속에서 허우적대며 알량한 아이디어로 옥신각신 할 때 디젤 같은 캠페인을 만나면 우리의 집착이 얼마나 안쓰럽고 가여워 보이는지...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날아오르는 붕(鵬)새를 보고 ‘도대체 저 붕새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인가’라며 의아해하는 메추라기의 모습으로 비유해본다면 너무 큰 자괴감일까.
어쨌든 디젤에게는 나와 너, 그리고 세상 전체를 부정하고 참 자유를 얻은 붕새의 풍모가 느껴진다. ‘진짜 진(jeans)의 정신이란 이런 것이야’라며 세상을 향해 통렬한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眞짜 jeans이다. 디젤이다.


성공의 도식과 기존 질서에의 부정(否定)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850년대 샌프란시스코. 독일계 미국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가 천막 등에 쓰이던 캔버스천을 잘라 금광의 광부들에 입히기 시작한 작업복이 청바지의 시작이라고 보면 진(jeans)의 역사도 줄잡아 150년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jeans의 어원을 보면 재미있게도 이태리의 제노아(Genoa,
제노바)항까지 거슬러가게 된다.


옛날 제노아항에서 선원들이 즐겨 입던 작업복이 지금의 청바지 형태였으며, 데님(denim) 직물은 프랑스의 Nimes에서 직조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인들은 제노아를 Genes로 발음했고, 이것이 영어로 넘어오면서 Jeans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미국 실용주의 문화의 상징이 된 청바지, 나아가 저항과 자유의 만국공통어가 된 청바지의 어머니는 이태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바지의 숨은 종주국, 이태리가 뒤늦게나마 자존심 회복에 나선 것은 90년대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그리고 그 깃발은 ‘디젤( DIESEL)’이 들었다.

물론 디젤의 시작은 렌조 로쏘(Renzo Rosso)가 처음 생산을 시작한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광고를 포함한 본격적인 마케팅 활동에 눈을 돌린 것은 1991년부터였다.

“그들은 생산지향적이었으며 그전까지만 해도 대규모의 마케팅 캠페인은 해본 일이 없었죠. 하지만 렌조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방법이 맞다, 라고 직감했고 우리도 그들이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를 더 많이 개발해내게 되었죠.”

광고대행권은 스톡홀름의 Paradiset DDB에게 맡겨졌으며, 마침내 요나손(Joakim Jonason)의
그 ‘전무후무한 도발’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요나손의 스타일이 디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쉬운 일 같지만 당시의 그를 보는 눈길은 그리 곱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어요. 하지만 디젤은 이해를 했고 특히 우리의 생각을 말할 때 디젤이 관심을 갖는 유일한 사항은 단지 비용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손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 골간은 ‘부정(否定)’이다. 유명 브랜드인 리바이스(Levi’s)와 리(Lee)가 옥신각신 고만고만한 싸움을 하고, 나머지 진 브랜드들도 그들을 추종하며 길들여져 가고 있을 때 요나손은 그들 전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아니, 그들이 뿌리박고 있는 미국식 인스턴트 문화, 자본주의 질서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이 세운 번영과 성공의 도식과 가면들을 낱낱이 벗겨내고 조롱하고 비웃었다. 저항의 크기와 강도가 이쯤 되면 숨이 막힐 정도다. 제임스 딘의 똥폼(?) 잡는 저항은 왠지 젖비린내고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크리에이티브에 날개를 달아 주다

“결국 디젤의 상대는 디젤 외의 모든 세계였어요. 때문에 캠페인의 기본은 반(反)광고(anti-ad)와 반기존질서(anti-establishment)였어요. 우리는 발림수작 부리는 광고들에 짜증이 났거든요. 기법이라든가 전략이라든가, 어떻게 보면 새 날라가는 소리들 아니예요. 결국 크리에이티브의 도움으로 광만 내는... 어쩔 때는 크리에이티브의 마지막 하나까지 말살해 버리잖아요. 우리는 아예 정반대의 방법을 썼어요. 컨셉트와 전략은 크리에이티브에 날개를 달아주고 가능한 한 크리에이티브가 강력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어야만 했죠.
광고물들에서 지켜야 할 건 오로지 ‘성공한 인생(Successful Living)’이라는 컨셉트만 들어있으면 된다는 것이였죠. 우리는 소비자들에게 좀더 많은 것을 주고 싶었죠. 크리에이티브하지만 캠페인의 틀에 빡빡하게 얽매이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디젤의 커머셜들을 보면 각각이 다 달라보입니다. 하지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컨셉트는 지키고 있죠. 지금까지 한 20여 편의 커머셜을 만들었는데 다른 회사라면 아마 20여 개의 서로 다른 캠페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꼬집은 황당한 광고 ‘5am mono village편<광고 1>’과,
미국식 영웅주의를 희화화한 ‘Little rock, Alkansas편<광고 2>’로 디젤은 예상을 뒤엎고 97년 깐느의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반자본주의적, 혹은 반미국주의적 기호들로 가득 찬 디젤의 표현 스타일 속에는
아름다운 모델들이 진부한 모습으로 또는 기괴한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성과 사회성 있는 이슈들은, 기성질서를 꼬집기 위해 디젤의 심술궂은 유머가 가장 즐겨 찾는 먹이감이다.
그 유명한 2차대전 참전 용사들의 금의환향 장면이 돌연 게이들의 축제로 돌변하기도 하며(당시 미국에서는 게이들의 입대문제가 사회문제가 되었음)<광고 3>, 미국의 자유무역주의정신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 미국 담배와 그 위의 아름다운 모델을 대비시킴으로써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그들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고발하기도 한다<광고 4>.
그리고 볼을 잡기 위해 다투는 흑인 농구선수들을 난장이로 만들고, 그 위로는 백인 레퍼리를 거인처럼 숨김으로써 인종차별이라는 내재적 모순을 우화적으로 비꼬기도 한다<광고 5>.

몇 가지 광고물들을 통해 디젤의 정신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광고 6>
그림은 대저택의 만찬장임을 암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광고물이 95년도 크리스마스와 신년 사이의 축제기간에 집행됐다는 것인데, 인간의 탐욕, 특히 부자들의 탐욕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의로 집행 시기를 맞춘 것으로 보여진다. 돼지는 ‘돼지처럼 욕심 많은’ 부자들을 상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디젤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식탁에 몰려 있는 일단의 무리들(돼지들)에서 비껴서 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높이의 차이를 통해 그들을 내려다봄으로써 그들과 디젤의 관계를 대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에 대한 디젤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공한 부자들을 노골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성공 좋지, 이 돼지들아!

<광고 7>
음식을 서빙하는 발가벗은 남자승무원. 그리고 그 승무원을 가운데 두고 욕정의 몸짓으로 유혹하는 중년의 여인들. 비행기 안은 흡사 혼돈의 도가니다.
레그 룸(leg room)으로 봐서는 비즈니스 클래스. 그 정도면 역시 인생에 성공한 자들 아닌가. 비행기에 기울기를 준 것은 혼돈의 상황을 더 부채질하기 위한 장치.
반면에 욕정의 소굴 속 한쪽 편에는 디젤을 입은 젊은 여인 둘이 그들과는 반대편에 있는 창문을 향하고 있다. 그 혼돈으로부터 탈출을 갈구하듯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맞으며...

그들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원색적인 대립이 다소 유치해 보이지만 한번 더 들여다보면 주제의식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이것은 정반대의 기호를 통해 남성의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즉, 비즈니스 클래스로 여행하며 여자승무원들이나 음험한 눈길로 바라보는 성공한 중년 남자들의 성적 위선을 역설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재미있는 장치는 비행기의 기울기를 통해 욕정의 무리들을 아래쪽으로, 디젤 여인들을 위쪽에 둠으로써 디젤 여인들을 보다 영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광고8>
이와 같은 대립적 구성을 벗어나 디젤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인 ‘플레이보이’편을 보자.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한 플레이보이의 침실.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여자 다루는 솜씨에 스스로 도취된 모습이다. 테이블 위에 있는 단서들로 볼 때 그는 결혼도 수 차례 했으며 만만치 않은 재력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액자 속의 사진들로 보아 그는 디젤을 즐겨 입는 사람이다. 부와 성적 매력을 동시에 갖춘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입는 옷, 디젤. “이 옷을 입으면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공식이다. 바로 거의 모든 광고들이 말하는 공식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광고가 설치해 놓은 덫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디젤맨을 통해 기존 상품 광고들의 사탕발림식 상투성을 넌즈시 비꼬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여성의 상품화라는 비도덕이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남자의 얼굴에 메인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남자의 우월성을 과시함과 동시에 동침 여자는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냄으로써 아무 것도 아닌 대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결국 이 광고는 성공을 향해 뛰는 남자들, 그 남자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돈만을 갈구하며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인면수심의 자본주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비난을 두려워 않는 문제작에 도전


3시간 45분짜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연출한 이태리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를 기억할 것이다. 사실 그는 스파게티 웨스턴-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의 대부격이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독특한 선율 속에 망토를 두르고 입술이 닳듯이 담배를 굴려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기에 가까운 총 솜씨는 존 웨인의 서부극보다 덜 교육적이기 때문에 훨씬 재미있다. 미국의 정통 서부극을 농락하며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레오네처럼 디젤 또한 미국의 정통 진들을 마음껏 농락했다. 하지만 디젤의 우스꽝스런 농담 속에는 차가운 이성이 칼날처럼 도사리고 있다.

“유머는 사람들을 귀 기울이게 만들고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만들죠. 하지만 전 유머와 심각함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해요. 한가지 속에 여러 차원의 이야기들이 녹아 있길 원하죠.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거든요.”

디젤의 광고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요나손의 말을 빌리자면
‘화제성’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전 쇼킹한 광고와 화제성 있는 광고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소비자들을 깜짝 놀래키는 광고는 의미가 없죠. 하지만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광고들은 일종의 문제작들입니다. 문제작들은 대체로 비난을 받을 때도 많구요.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해야 변화와 발전이 있거든요. 전 이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모든 행위들을 존중합니다.”

대부분의 패션광고들은 번드르르한 벽지 바르듯 우습지도 않게 돈만 발라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디젤은 다르다. 디젤 광고는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유명한 빨간색 로고박스가 구석에 박혀있지 않아도, 디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애매모호한 풍자성은 위트와 논쟁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도시패션의 새로운 의미와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면에서 리바이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당당하다.

“리바이스는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아요.
리바이스 커머셜들이 점점 더 우리 걸 닮아가고 있는 게 보이거든요. 물론 그들은
대단히 뛰어나죠. 하지만 정말 훌륭한 광고를 만들고 싶다면 경쟁자가 뭘 하고 있든 신경 안 쓰는 편이 낫습니다. 제 생각엔 오히려 장애가 되거든요. 그들과 같은 걸 만들지 않기 위해 알 필요는 있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작품들을
아주 세밀하게 뜯어보면 볼수록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을 베끼게 됩니다. 완전히 다른 걸 창조해내기란 참 어려워지게 된다는 얘기죠. 하지만 전 옛날 광고들과 아주 형편없는 광고들을 보는 건 좋아해요. 때때로 이런 것들에서 놀라운 자극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일전의 어느 세미나에서 오길비 앤 매더의 원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닐 프렌치는 “크리에이터로서 될 성 부른 떡잎인가를 볼 때 그 사람에게 반항정신이 있는가를
보라”고 한 적이 있다. 결국 문제아들이 많은 나라, 반항아들이 많은 회사에서 시대를 일갈할 수 있는 진짜 크리에이티브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전 한번도 크리에이티브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산다는 게 크리에이티브한 거 아니예요? 그리고 누구나 다 크리에이티브하게 태어난 거니까요. 그런데 유독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온통 ‘크리에이티브, 크리에이티브’하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고바닥만큼 크리에이티브하지 않은 곳도 없는 것 같아요. 옛날 아이디어를 계속 베껴먹으며 똑같은 쓰레기들을 줄기차게 만들어내니 말이죠. 광고하는 사람들, 너무 게으른 것 같아요. 누군가 유명해지기만을 기다리죠.
그러다 이 감독이다 싶으면 재빨리 전화 걸어서 ‘나도 그렇게 한 편 찍어주쇼’, 순 이런 식이죠. 그게 나쁘냐구요? 꼭 그렇게 얘기할 수만은 없겠죠. 그렇게 해서 일이 되긴 하거든요. 하지만 심지어는 자기들도 뭘 말하고 싶은 지 대책 하나 없으면서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내라고 조를 때도 있어요.”

요나손의 일침을 원리주의자의 독설로 폄하해버리기에는 우리 광고계의 입장이 편안치는 않다. 표절과 모방 시비로 얼룩진 지난해를 돌이켜 볼 때 크리에이티브라는 말을 함부로 말하기에도 낯부끄러우니까 말이다.
시간과 돈에 모든 혐의를 돌리거나 아니면 함량 미달의 크리에이티브를 들고 와서 몰라준다고 볼멘 소리나 해대는 크리에이터들을 볼 때면 진짜 크리에이터를 만나기가 진짜 크리에이티브를 찾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셨습니까.

그럼 이제 다 허물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껍데기는 가라고.


(디젤 진 광고참조 인터넷 사이트:
www.diesel.com/diesl_guides/필자 주.)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