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1-02 : 광고와 문화 - 전자민주주의의 毒이자 약, 안티문화의 두 얼굴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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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만수 I 뉴스메이커 기자

네티즌은 곧바로 ‘안티맨(anti-man)’이라는 오해를 살 정도로 안티사이트가 범람했던 2000년 안티신드롬! 저 80년대 오프라인(가두)에서는 학생운동의 온갖 구호들이 신문 사회면 기사를 장식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시대의 사회문화현상을 분석하는 데 ‘안티코드’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 중앙일간지는 2000년 문화결산 중 하나를 안티문화로 택했다.

안티를 지나 ‘안티안티’까지 등장

2000 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인기가 급상승한 강초현이 언론에 너무 자주 얼굴을 내밀자 안티강초현 사이트가 생기고, 이승엽이 프로야구 선수협에 가입하지 않자 안티이승엽 사이트까지 생겼다. 한 설문조사의 2000년 10대 뉴스 결과는 엽기(13.7%), 동창회 붐(12.3%), 안티문화 운동(5.9%), 불륜 폭로(5.3%) 순이었다. 언론기사 관련 DB사이트 카인즈(Kinds)에서 ‘안티’라는 검색어를 누르면 작년부터 지금(2001. 1. 15)까지 498건의 기사가 떠오른다. 이제 ‘안티’는 우리시대 문화를 조망하는 키워드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안티사이트가 생겨나게 된 제반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인터넷의 상용화에 따른 네티즌 인구의 증가가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배 문화, 기성문화, 기득권 문화에 대한 저항의 지점이 사이버로 공간이동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더 정밀한 것이 아닐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인터넷이 확산되어 그들만의 공감대 형성이 온라인상에서 용이해지고,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운동적’효과가 크다는 점 등에 힘입은 바 큰 것이다. 몇 년 전 안티 패러디사이트인 `<딴지일보>로부터 시작된 ‘안티’는 2000년 들어 정치·경제·연예·스포츠 등 각 방면으로 급속한 진출을 보였다.
실제로 ‘어느 당 총재에 대한 `지속적 비판’ 이란 슬로건을 내건 <안티창>,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안티사이트인 `<한국경제를 망친 사람들>, `<이인제를 반대하는 사람들 모임> 등의 안티 사이트는 e-폴리틱스(사이버정치학)의 연구대상이다. `<안티메디컬>은 병원에서 부당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안티스쿨>은 교수와 학교의 부조리에 대항한다. 또한 <안티수능인플레이션>,<안티몰카> 등 이름만으로 금방 그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사이트도 부지기수다.
더욱이 연예계는 안티 천국이다. 안티 조성모·H.O.T.·서태지·김희선·샤크라·젝스키스·핑클 ·SES 등등. 이 중 서태지는 미국 음악 도입, 신비화 전략 등이 비난을 받았고, H.O.T는 표절 의혹과 립싱크로, 조성모는 지나친 이미지 포장으로 안티 운동의 빌미를 제공했다. 신인 여가수 보아는 만 13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완숙한 춤솜씨와 외모가 화제를 낳았지만, <안티보아>는 “어린 소녀를 철저히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안티가 없으면, 역설적으로 스타가 아니라는 반증인 탓에 당사자가 자신의 ‘어용 안티사이트’를 만들기조차 한다. 우스운 것은 정치인들이 이러한 연예인들을 따라해 자신의 인기를 입증하려고 스스로 ‘관변 안티사이트’를 만들 조짐까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안티운동에 대항하는 ‘안티안티’까지 나왔을 정도라니, 소도 안 웃고는 못배기겠다.
하지만 지난해 6월에는 안티사이트가 위법이 아니라는 법원결정이 나왔다. 안티는 힘을 얻었고, 미운 친구의 안티사이트를 만드는 안티맨이 나올 정도다. 단순 홈페이지 수준의 안티 사이트가 마치 아메바처럼 짝(사회적 동의) 없이도 저 혼자 대량 무성번식중인 것이다. 네티즌의 한 종족이던 ‘안티즌’은 이제 오프라인에서는 비주류일지 몰라도 온라인에서는 주류 종족이 된 것이고, 바야흐로 ‘안티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그렇지만 종이 신문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는 안티사이트가 큰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중고교생들의 안티스쿨 사이트는 교육부의 두발규제 완화 발표가 나오기까지 10만 명에 가까운 학생으로부터 두발규제 반대 서명을 받았다.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초고속인터넷서비스 안티사이트 활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민단체가 조직적인 권리 찾기에 팔을 걷고 나서기도 했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가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초고속인터넷서비스 사용자들의 구체적인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티사이트가 오프라인의 건전한 시민단체처럼 온라인 아크로폴리스가 되어 전자민주주의를 이끌 초석으로 다져지고 있다는 말인가?

 

성역없는 비판과 소비적 욕설의 혼재

문학평론가 최성실은 한 인터뷰에서 “때로 어떤 안티사이트들은 하위문화의 범주에조차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제작과 운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안티 운동에는 정제된 토론과 입장 제시도 있지만 이유없는 욕설과악의에 찬 근거없는 소문도 난무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본질적인 측면에서 ‘안티’는 숙주(안티의 대상)를 필요로 하는 기생적인
존재다. 따라서 독립적 정체성 확보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안티는 낯설게하기 효과, 프로파갠다(propaganda) 효과에 쉽게 빠져드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안티가 사회적 당위나 이념적 지평 아래에서 뭉칠 때 오프라인의 파티(黨)적 수준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일부 언론기관에 대한 안티 사이트가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오프라인 행사도 있었고, 일부 지식인들의 계속된 기고, 지지성명, 강연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우리의 안티문화 수준은 ‘하위문화의 전도된 `폭력성’, 혹은 근년 들어 세계적 확산을 보인 증오, 엽기 문화의 ‘한국적 버전’이라는 비판도 만만찮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한 기고에서 “안티문화는 성역없는 비판이나 소비적인 욕설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안티문화를 통해 ‘사이버 아크로폴리스’와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를 동시에 방문하게 된다”고 꼬집는다. 죽이기와 흠집내기에 익숙해져 있는 일부 ‘설익은 안티맨’에게는 ‘옳고 그름’ 보다 ‘좋고 싫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안티의 순기능에 주목하자는 목소리도 드높다. ‘제5의 권력’이라는 네티즌들의 힘을 등에 업고 ‘사이버 정부(政府)화’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예컨대,
<사지마>처럼 소비자 보호운동 차원의 안티운동도 있고, <안티 엑스>처럼 유해 사이트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하는 ‘건전한 안티’도 있다.

문화적 역량 시험하는 야누스

문화평론가 정윤수는 “한 사회의 민주주의를 재는 척도에는 언제나 비판의 자유가 올라가야 한다”며, “안티의 자유는 한 사회의 정신적 성숙을 재는 잣대”라고 말한다. 안티신드롬을 십분 지지해야 마땅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인터넷의 자유분방한 구조는 오랜 동맥경화증을 치유할 수 있으며, 바야흐로 젊은 세대는 그들만의 언로를 창출하면서 정보의 일방통행, 수동적인 찬반의 거수기 노릇을 경쾌하게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젊은 세대의 안티는 그들의 우상에 대하여, 권력화하기 쉬운 스타에 대해서도 호미걸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기성세대의
도그마(dogma)를 희석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온라인에서조차 비판과 논쟁의 건전한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한 적이 없다. 따라서 비판을 목적으로 하는 안티에게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자신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안티사이트를 개설하고 비분강개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에 대한 안티의 자유를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로 대중 스타를 놓고 욕설과 비방이 오가는 안티사이트를 볼 때 기성세대가 성숙시키지 못한 비판문화를 답습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왜일까. 실제로 일부 연예인 스타 안티 사이트처럼 자기가 옹호하는 대상을 절대적인 무오류의 존재로, 비난의 대상을 저질의 쓰레기로 취급하는 안티사이트는 단지 흑색 선전의 장일 뿐이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최근 안티문화의 흐름은 벗고 벗기는 폭로 저널리즘이라기보다 그것을 은밀히 엿보며 즐길 뿐인 일종의 관음증 환자의 태도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안티문화는 ‘무늬’만 비판, 폭로, 저항일 뿐 냉소주의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방관자적인 구경꾼에게 세상은 ‘그저 쇼’이며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의 그런 짓’에 불과하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안티조차 ‘그저 그런 부류의 불장난’이라는 냉소의 블랙홀에 빠진다.
그래서 대다수 문화비평가들은 “인터넷 상용화와 권위주의 해체 분위기가 증폭된 것이 스타나 정치·경제·문화권력, 집단에 대한 안티 운동이 활성화된 주된 이유”라며
“앞으로 안티 운동이 저질적이고 악의적이며 소모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지, 아니면 건전한 비판과 토론의 공공영역이 될 지는 전적으로 우리사회의 참여적 민주주의를 숙성시키는 문화적 역량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안티가 전자민주주의의 독(毒)인지 초석인지는, 아직 우리의 디지털문화가 정립 단계이기에 좀더 두고보자는 결론이다. 이는 역으로 안티는 현재 우리에게 ‘독이자 약’, 그 야누스적인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