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디어 빅뱅(Big Bang)이 시작되다
디지털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은 미디어의 유형과 수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다. 또한 단순히 수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 간 융합도 활발히 일어난다. 디지털 기술은 미디어 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전달 및 사업방식을 통합하기도 하며, 다양화와 융합의 속도 역시 빠르고 복합적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신문과 잡지·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미디어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지만, 21세기에는 새로운 매체지형이 그려지고 있다. 전통매체에 인터넷과 DMB·IP-TV 등 신규 매체들이 어우러져 미디어 세상은 더 이상 구획이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학자인 로저 피들러(Roger Fidler)는 이를 ‘미디어 모포시스(Media Morphosis, 매체 융합)’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미디어 세계가 공동진화(Coevolution)·융합(Convergence)·복합체(Complexity)라는 3C 원리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다매체·다채널화와 동시에 각 매체가 통합하는 상황에서 미디어 기업 간의 경쟁은 가열될 수밖에 없다. 또 정보와 오락의 공급 과잉 속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더욱 강화된 시장원리가 작동된다.
이 같은 미디어 빅뱅을 이끌어 가는 두 개의 힘이 발견된다. 디지털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혁신, 그리고 미디어 비즈니스의 다양화·다각화이다. 특히 디지털 기술 활용은 전통적인 미디어 비즈니스에 변화를 요구한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콘텐츠 제공의 무료화와 매체 간 경쟁의 심화로 나타난 외부 요인 때문이다. 따라서 미디어 기업은 사업하기가 더욱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수익모델 창출도 어려워지고 있는데, 이는 국내외의 공통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터넷의 발달은 개인들에게 ‘정보=무료’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신문과 잡지를 포함한 뉴스정보 미디어 분야는 기존 사업 형태로는 점차 수익을 창출하기 힘들어졌다. 미래의 독자인 젊은층의 인쇄매체 이탈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최근 무료 신문이 속속 출현하고 있다.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사도 안주할 입장은 아니다. 타 매체의 약진으로 TV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광고수입 역시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KBS는 2004년 사상 최대인 638억원의 적자를 냈다. 예상 치로 잡았던 광고수익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케이블과 위성·인터넷 등 뉴미디어는 어떤가. 기상도를 보면 전세계적으로는 ‘맑음’, 한국에선 ‘짙은 안개’다. 세계 미디어 트렌드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두 개의 자료가 있다. 하나는 세계신문협회(WAN: World Association of Newspaper)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신문트렌드(World Press Trends)’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 저널리즘연구소가 발표하는 ‘연차보고서(An Annual Report on American Journalism)’이다. 이 두 보고서의 2004년판에서 일치하는 점은 신문과 잡지, 지상파 방송의 독자와 광고수익은 줄고 인터넷과 케이블 등 뉴미디어 시장의 파이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도 안심할 입장은 못된다. 무료화와 또 다른 뉴미디어의 출현으로 수익구조가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에서 특별한 성장세를 보인 포털사이트 사업이다. 최근 다음·야후·네이버·엠파스 등 포털 사이트 간의 경쟁이 더욱 뜨거워진 가운데, 이들은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을 정비하고 새 수익모델을 찾아내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출범 10년 만에 사업적인 측면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케이블 방송에도 ‘디지털 쓰나미’가 밀려온다. SK텔레콤과 KT 등 거대 통신사업자들이 잇따라 방송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SK텔레콤은 TU미디어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일본 MBCo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위성DMB 사업에 진출했다. 또한 스카이라이프 최대 주주로 이미 위성방송 사업에 진출해 있는 KT도 IP-TV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로써 1995년 케이블TV 사업의 허가로 중계유선 방송이 전쟁을 선언했던 것처럼 케이블 업계와 통신사업자 간 힘겨루기는 불가피해졌다.
이렇게 2005년 한국의 미디어 상황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빅뱅’ 그 자체다. 어떤 미디어가 경쟁력을 갖추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자가 결정된다. 결정권은 시장에서 소비자가 쥐고 있다. 또 정부가 방송과 통신 등 미디어 정책을 어느 쪽으로 가닥 잡느냐에 따라 그 물줄기가 달라질 수 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 매체를 방송으로 보고 규제를 편다면 통신사업자들이 사업에 진출해도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출범 3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시장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미국·일본·홍콩 같이 방송과 통신의 벽을 허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통신 사업자가 막대한 자본으로 기존 방송 시장을 차지하고, 새롭고 질 높은 서비스로 고객을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미디어 산업의 진로가 바뀌겠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기존의 규제는 크게 완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2. 쟁점의 핵심: IP-TV, 방송인가 통신인가
IP-TV는 인터넷망을 통해 다채널 방송프로그램을 가입자에게 전송하는 서비스로, 셋톱박스를 설치해 일반 TV 모니터로 시청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TV가 인터넷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즉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방송 콘텐츠의 실시간 전송이 가능해지면서 생겨난 방송통신 융합형 서비스인 것이다.
그러나 사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관련 부처인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런 가운데 융합형 서비스인 만큼 이를 방송과 통신 중 어디에 넣어야 할지 아직 개념 정립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IT-TV는 통신망을 이용하는 부가적인 서비스이므로 ‘부가통신’ 역무에 속한다고 보고 있지만, 반면에 방송위원회는 방송법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별한 방송의 형태인 ‘별정 방송’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IP-TV가 방송과 통신 중 어느 규제 영역으로 결정되는지에 이해 당사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규제 주체와 방식, 강도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통신 쪽은 산업을 강조하기 때문에 규제가 없는 편이며, 반면에 방송은 공공성을 강조하면서 아직 철저히 규제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방송시장 진입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정통부와 방송위는 2005년 1월 국무조정실과 함께 ‘멀티미디어 정책협의회’를 열어 이 문제를 협의했으나,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정보통신부는 정면 돌파가 아닌 우회전략을 내놓기도 한다. 통신사업자와 케이블TV 업계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 IP-TV를 ‘ICOD’라는 새 이름으로 바꿔 부르겠다는 것이다(ICOD는 ‘주문형 인터넷 콘텐츠; Internet Contents On Demand’의 약자로, 실시간 방송의 의미를 완화한 용어).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2005년 2월 한경 와우TV와의 인터뷰에서 “현실적으로 IP-TV를 통한 실시간 방송이 힘든데도 TV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방송계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어 앞으로 ICOD로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실체는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꿔 현실을 회피하겠다는 방책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IP-TV을 둘러싼 규제기관의 싸움은 사실상 방송통신통합기구와 연관돼 있기 때문에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방송위원회가 정보통신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IP-TV 시범사업을 직접 추진키로 함에 따라 통신·방송 융합정책 주도권을 놓고 양 기관 간 전면전이 예고됐다. 특히 그동안 ‘IP-TV 도입 불가’를 외쳐온 방송위원회가 ‘방송영역에서 직접 진흥·규제’라는 초강수 카드를 들고 나오면서 그 입장선회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방송위원회가 이 같은 기세를 몰아 ‘방송통신구조개편위원회’설립 주도권까지 쥐려 한다고 풀이하고 있는데, 양휘부 방송위 상임위원은 ‘IP-TV를 놓고 (정보통신부와) 전면전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보통신부가 “방송위원회는 민간기구로서 방송업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위헌소지가 있다”고 반박하면서 두 기관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정책 방향은
그런데 IP-TV를 통신사업자들과 정보통신부가 주장하는 대로 ‘부가통신서비스’로 규정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사업자들은 진입 규제와 영업규제를 거의 받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케이블 사업자들은 IP-TV가 케이블TV와 동일한 서비스이기 때문에 방송법 상 동일한 진입규제 및 내용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방송위원회가 IP-TV를 방송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토론회에서 케이블 사업자들은 2년의 유예기관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케이블 사업자들이 경쟁력을 갖춘 다음에 통신사업자들이 방송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통신사업자들은 이미 케이블 사업자들이 ‘트리플 서비스’, 방송프로그램 제공뿐 아니라 전화와 인터넷 사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미 많은 지역에서는 저가를 내세워 케이블 사업자들이 통신사업자들의 인터넷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는데, 일부 디지털멀티미디어센터(DMC)를 운영하는 사업자들은 단단한 시장기반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기존 미디어가 뉴미디어를 견제를 한다는 점이다. 라디오가 발명되었을 때는 신문이, 텔레비전이 출현했을 때는 라디오가 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체 간 보완제로 발전했을 때는 상호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이는 역사적인 경험에서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정책의 역할은 수용자들의 편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동시에 산업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수용자의 선택 기회가 늘어나고, 양질의 서비스를 저가로 제공받을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나와 있다. IP-TV의 조기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방송영상진흥원의 권호영 박사는 ‘IP-TV를 별정방송사업자로 규정해 방송법의 범주에 넣고, 규제를 현재의 종합유선방송사업자보다 완화해 적용하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IP-TV에 대해 진입 규제를 하지 않고, 영업규제와 내용 규제를 현 케이블TV보다 약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IP-TV 서비스의 조기 도입을 위해 정보통신부의 대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IP-TV는 비록 통신망을 이용하더라도 방송서비스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방송규제 기관이 관장해야 하며, 또한 통신사업자의 방송시장 진출을 의미하므로 방송사업자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통신사업에 비해 비교적 엄격한 진입규제를 받고 있는 SO의 입장에서는 IP-TV에 대한 진입 규제의 철폐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케이블TV의 진입 규제는 네트워크의 규모의 경제에 근거한 자연독점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에 IP-TV는 이미 깔려있는 통신망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터넷 접속서비스는 이미 여러 사업자에 의해서 경쟁적으로 제공되므로 자연독점성에 근거를 둔 케이블TV의 진입규제를 IP-TV에 적용할 수 없기도 하다. 따라서 SO에 대한 규제도 IP-TV 사업자와 같은 수준으로 오히려 완화하는 것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유사한 서비스에 서로 다른 규제가 적용되는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장을 두고 통신사업자와 케이블 사업자간의 투쟁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4. IP-TV 미래
우리가 규제 담당기관을 두고 위와 같은 논란을 벌이고 있는 사이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IP-TV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는 미디어 융합시대를 맞아 복합 서비스가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현재 통신시장의 포화로 인해 새 수입원을 찾아야 하는 통신사업자들이 방송을 그 탈출구로 삼고 있다. 반면 방송 쪽은 거대 통신사업자가 진입하면 방송계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며 일전불사를 다짐한다. 결과적으로 통신사업자와 케이블 등 방송사업자 간의 한판 전쟁은 불가피해질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부와 소비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많은 학자들은 케이블 사업자와 통신사업자의 ‘일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1995년 케이블 방송 사업을 추진할 때 나타난 중계 유선방송 사업자와의 충돌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거대 사업자들이 시장에 진입할 때 기존 사업자의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하면서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결국 케이블 사업자들에게 시장에서 독과점이 형성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유로운 M&A가 이뤄질 수 있도록 법적인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미 중국과 일본 등에서 IP-TV 가 서비스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통신사업자들의 IP-TV 진출을 더 이상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즉 매체 간 균형발전도 중요하지만 무한경쟁시대에 국제경쟁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IP-TV 사업을 규제기관에 맡기지 말고 더욱 책임 있는 당국자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더욱 호소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