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게 뭐야?”
TV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괴상한 녀석이 마구 뛰어온다. 뒤뚱뒤뚱…… 마치 목도리를 두른 듯 목이 불룩하게 생긴 도마뱀이다. 뒤뚱뒤뚱…… 이윽고 날렵하게 생긴 자동차 한 대가 신나게 달리면서 하이웨이 끝으로 사라져 간다. ‘길은 별처럼 많다. 유유히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자. 미라주와 함께.’
광고가 나가자마자 이 호주산 도마뱀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 광고는 인구에 회자되었고, 온 일본 열도가 떠들썩했다. 이 도마뱀을 마스코트로 만들어 가슴에 달고 다니는 아이들마저 생겨났다. 예정된 시나리오처럼 이 광고는 ACC(전일본CM협의회)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도마뱀 소동만 일으켰을 뿐, 자동차는 팔리지 않았다.
“현대인은 산소와 질소와 광고 속에 살고 있다”는 궤랭(R. Guerin)의 말이 아니더라도 현대사회는 광고의 바다요, 우리는 광고의 공기 속에 살고 있다. 눈가는 데마다 광고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세상, 광고 때문에 더욱 시끄럽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이런 시끄러운 광고들 속에 명확한 컨셉트, 즉 ‘내용’이 없이 ‘튀는 표현’이나 테크닉에만 의존하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기본·본질에 충실한 광고 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인가?
주의집중은 광고효과의 첫 단추
광고효과의 계서적 모델(Hierarchy Effect Model)의 하나인 AIDMA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주의집중(Attention Getting)은 광고효과의 출발점이자 첫 번째 단추다. 이 첫 번째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는 자동으로 잘못 꿰어지듯, 광고효과 또한 주의집중이 되지 않고서는 흥미 유발, 욕구 창출, 기억, 행동 유발 등 그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주의집중만으로 광고효과가 완성될 수는 없지만 주의집중을 하지 않고서 다른 광고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광고가 발악(?)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광고의 폭발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차고 넘치는 광고 속에서 내 광고에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비싼 돈을 들이고도 사람들의 눈길 한 번을 끌지 못하고 사라지고 마는 광고들이 대부분인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광고가 차별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광고인들이 차별화를 노래 부른다.
리뷰 석상에서 “저 광고안은 왜 헤드라인이 없나, 그리고 저 안은 비주얼이 왜 없나?”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주먹만한 헤드라인이 붙어 있고 광고의 대부분이 비주얼로 처리되어 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아무리 주먹만 해도 소비자의 눈에 띄지 않고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면 헤드라인이나 비주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광고를 했다’는 말과 ‘광고가 효과가 있었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다. 차별화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 기획서를 본 적이 없다. 차별화라는 말이 안 나오는 제작회의 또한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정작 차별화에 성공한 광고나 브랜드는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
차별화에 대한 오해 1
사람들은 광고의 차별화만 이야기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표현의 차별화만 생각한다. 표현의 차별화가 광고의 차별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차별화의 임무는 제작팀에게만 강요된다. 그러나 차별화 작업은 광고회사 제작팀에서가 아니라 광고주의 제품개발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광고주는 제품을 차별화해야 하고, 광고회사 기획팀은 메시지를 차별화해야 하며, 제작팀은 광고 표현을 차별화해야 한다. 제품의 차별화와 메시지의 차별화는 광고(표현) 차별화의 선행조건이다. 그러니까 제품과 메시지의 차별화가 없는 광고 표현의 차별화는 잠시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다. 차별적 메시지(컨셉트)가 없으니까 차별화라는 이름 아래 모델로 도망가고, 테크닉으로 도망가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가끔은 차별화하라니까 경쟁제품과 다른 것 찾기에 급급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경쟁제품과 다르다고 무조건 차별화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차별적 요소가 소비자 니즈와 부합하는가? 부합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다르더라도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한다. 차별화를, 쓰기는 ‘different’라고 써도 그 의미는 ‘better’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낫게 다른 것’이 중요하다. 다르게 하는 것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더 좋게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면 제품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까? 차별화 작업은 광고회사가 아니라 광고주의 제품개발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제품은 그 나물의 그 밥인데 광고만 차별화한다고 그 브랜드가 차별화되지는 않는다. 또 제품이 (물리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차별화는 불가능한 것인가? 물론 아니다. (물리적) 제품은 같더라도 그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심리적) 편익은 다를 수 있다. 소비자의 편익이 제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소비자의 마음속에서도 나온다. 그것이 브랜드 이미지론의 출발이다.
브랜드 이미지의 차별화를 위해 광고기획자는 매우 치밀한 전략적 계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차별화된 메시지를 디자인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내 브랜드를 차별화해달라고 크리에이티브팀에게 무책임하게 던져서는 안 된다. 광고는 결국 메시지를 설득하는 행위이다. 차별화된 메시지가 없이 브랜드를 차별화하라는 것은 잉태하지도 않은 아이를 낳으라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딱한 노릇이다. 크리에이티브팀에게 차별화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광고의 차별화는 오히려 기획팀에서 먼저 시작해야 할 부분이다. 메시지의 차별화라는 선행조건은 어디로 증발해 버리고 차별화만 강조되다 보면 결국 무의미한 광고의 차별화에만 목을 매게 되는, 상상(가상) 임신소동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헛구역질은 요란해도 아이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브랜드의 차별화이지 광고의 차별화가 아니다.
차별화에 대한 오해 2
우리 대학 앞에도 많은 가게들이 있다. 식당·커피숍·미용실·술집…… 그런데 그 수많은 가게 중에 간판을 거꾸로 달아놓은 집이 딱 한 군데 있다. 어떤 피자집이다. 간판이 없는 가게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간판을 거꾸로 걸어놓은 집은 그 집밖에 없기 때문에 대단히 눈길을 끈다. 차별화된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의 피자를 즐겨 먹지는 않는다. 사실 그 집의 피자 자체는 차별화되지 않은데 간판이 차별화되었다고 그 집 피자를 즐겨 먹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초보운전자일수록 거리로 나서면 보닛 끝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 옆 차선에 뭐가 있는지 살필 여유가 없다. 그런데 차별화를 말하는 많은 광고인들이 초보운전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광고가 중요해지다 보니 광고의 차별화가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이야기되기 십상이나, 광고의 차별화는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가야 할 통과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정작 우리가 차별화해야 할 것은 광고의 차별화가 아니라 브랜드의 차별화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미라주 광고처럼 광고 차별화에는 성공했으나 브랜드의 차별화에 실패한 사례를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수많은 광고들 사이에서 내 광고를 눈에 띄게 만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브랜드의 차별화에 비한다면 광고의 차별화는 훨씬 쉬운 일이다. 망가진 제품을 보여준다든지, 제품을 거꾸로 세워놓는다든지…… 내 광고를 차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찾아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광고 차별화의 오류에 대한 빌 번벅(Bill Bernbach)의 코멘트를 들어보자.
“… 내가 이미지네이티브(Imaginative)해야 한다고 말하는 뜻은 단지 남다르고 미끈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면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보여주면 된다는 말을 나는 자주 합니다. 그러나 그 광고가 거꾸로 서 있는 그 사람의 주머니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제품을 파는것이 아니라면 그 광고는 결코 좋은 광고가 아닙니다.”
레오버넷(Leo Burnett) 또한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의 오류를 크리에이티브 맨답게 크리에이티브하게 지적해 내고 있다. “독창적이고도 효과 있는 광고들의 비결은 사술(詐術)을 부리는 말과 그림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그림을 새로운 관계로 결합시키는 데 있다.” 레오버넷은 이 점에 대해서 곧잘 옛날 자기 보스의 말을 인용하곤 했는데, “차별화 그 자체만을 위한 차별화를 주장한다면 매일 아침 양말을 입에 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보라. 그것도 당신을 차별화시키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양말을 입에 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나의 존재는 일주일도 안 가서 회사 내에서 확실하게 차별화야 되겠지만 어떻게 차별화되겠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론적으로 광고(표현)의 차별화가 크리에이티브팀의 몫이라면 메시지의 차별화는 전략(기획)팀의 몫이다. 물론 제품의 차별화는 광고주의 몫이다. 또 광고의 종착역은 광고의 차별화가 아니라 브랜드의 차별화이다.
튀기만 하는 광고는 반드시 나쁜 광고인가?
그러면 광고는 튀기만 하면 안 되는가? 그리고 광고는 반드시 세일즈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가? 광고에게 맡겨진 역할이 주의집중이 전부인 경우에는 밑도 끝도 없이 튀는 광고도 효과적인 광고다. 요즘 들어 그저 튀기만 하는 광고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통합적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MC)이 일반화되면서 광고에 맡겨진 미션 자체가 주의집중에 국한되는 경우도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광고로 눈길을 끌고 자세한 상품정보는 인터넷을 통해서 얻게 만든다든가, 눈길을 끌어서 그 브랜드를 기억에 남기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다른 매체의 광고가 맡게 되어 있다면 말이다. 따라서 세일즈 메시지나 컨셉트가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반드시 광고 하나로 주의에서부터 흥미·욕구·기억·행동에 이르기까지 원 스톱 서비스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과 같이 미디어 환경이 복잡하고, 광고나 상품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는 광고가 단독 경기가 아니라 다른 매체와의 팀플레이일 경우가 많으며, 그런 접근방법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튄다는 것은 광고에서는 일단 좋은 것이다. ‘가장 불행한 여자는 버림받은 여인이 아니라 잊혀진 여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장 나쁜 광고는 컨셉트가 살아있지 않은 광고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광고다. 우선은 튀는 광고여야 한다. 그리고 그 튀는 광고 속에 명확한 컨셉트가 녹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광고들이 튀기는 하는데 명확한 컨셉트가 아예 없거나, 아니면 그 컨셉트가 전혀 녹아들지 않은 채 덩어리로 둥둥 떠 있다.
전략에서 크리에이티브로의 전환에는 창조적 도약
(수직적 사고→수평적 사고)이 필요하다.
컨셉트(전략)가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녹아 스며들기 위해서는 하늘을 차고 오르는 새처럼 아름다운 비상을 필요로 하는데, 너무나 많은 광고들이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전략에서 크리에이티브로 넘어간다. 전략에서 크리에이티브로의 단순 이전이 아닌 ‘사고의 역전’이 요구되는 것이다. 수직적 사고에서 수평적 사고로, 과학적 사고에서 예술적 사고로의 극적인 발상의 전환, 즉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수직적 사고에서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수평적 사고오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전략과 크리에이티브의 관계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또 한번의 창조적 도약 내지 비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한번 ‘비트는’, 흔히 말하는 한바퀴 ‘돌리는’ 사고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 한번 ‘비트는’ 또는 한바퀴 ‘돌리는’것이 크리에이티브요, 아이디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TV채널 돌리듯, 자동차 기어 바꾸듯 그렇게 한순간에 쉽게 바뀌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전략이 크리에이티브의 도약대가 되지 못하고 크리에이티브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오길비 앤 매더 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노먼 볼리(Norman Bally)는 “논리로부터 마술로(From Logic To Magic)”이라는 짧은 말로 광고적 발상의 핵심을 갈파한 바 있다. 과학적 사고에서 예술적 사고로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광고에 빠지게 하는 매력의 시작이자, 우리를 늘 좌절케 하는 광고의 저주의 끝이 아닌가.
사치 앤 사치 사의 광고 접근법 ‘더 브리프(The Brief)’의 표지에는 이런 시가 쓰여 있다.
‘Come to the edge. We might fall. Come to the edge. It too high!
Come to the edge. And they come. And he pushed. And they flew.’
‘끝으로 나가. 떨어지면 어떡해. 끝으로 나가. 너무 높아. 끝으로 나와. 하는 수 없이 끝으로 나갔다. 그냥 밀어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날았다.’
크리에이티브는 추락이 아닌 비상, 부패가 아닌 발효
추락에도 발버둥치듯 추하게 떨어져 죽는 추락도 있고, 새처럼 우아하게 떨어져 탄성과 갈채를 받는 비상도 있다. 다이빙 선수는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다이빙은 익사와 추락의 위험을 넘어 새처럼 우아하고 멋지게 떨어지는 예술이다. 추락이 아니라 비상하는, 스포츠의 과학이자 스포츠의 예술이다.
추락의 위험을 이기고 우아하고 멋지게 날아 내리는, 광고 또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부패와 발효는 ‘썩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몸에 해롭게 (더럽게) 썩으면 부패고, 몸에 이롭게 (아름답게) 썩으면 발효다. 추락은 추하지만, 비상은 아름답다. 크리에이티브는 부패가 아니라 발효이며, 추락이 아니라 비상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소비자 입장으로 건너뛰어야 하는데, 그 건너뛰는 것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천길 만길 허공에 내 자신을 내던지는 창조적 모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대단한 성공의 가능성도 전혀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 남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 나만의 방법으로 뭔가 다르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빌 번벅도 이렇게 말했다. “(광고에서는) 안전빵 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새롭다’는 말은 곧 ‘낯설다’는 말과 동의어다. 낯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크리에이티브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광고회사 사장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투덜거렸다. “리뷰해달라고 들고 오는 제작물 시안이 밑도 끝도 없이 새를 날리고 있어 전략적이어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그 다음에는 AE가 써준 ‘소비자 약속’이 토씨 한 두 개 바뀐 채로 헤드라인으로 올라오고, 비주얼은 카피를 설명하고 있는 정도로 해서 크리에이티브라고 들고 온다. 이번에는 너무나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고 화를 냈더니 ‘전략적이지 않다고 해서 기획서대로 했는데 무슨 잔소리냐? 이러면 저렇다고 야단치고 저러면 이렇다고 야단치고, 제작팀이 무슨 동네북이냐?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추란 말이냐’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전략은 크리에이티브의 스프링 보드, 즉 도약대여야 하는데, 우리 회사 제작팀들에게 있어서 전략은 크리에이티브의 감옥이다.”
이렇듯 많은 광고 크리에이터들이 광고전략과 크리에이티브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툭하면 기발하기는 한데 전혀 비전략적인 크리에이티브가 나오고, 아니면 전략적이기는 한데 전혀 크리에이티브하지 않은 크리에이티브가 나온다. 전략기술서(기획서)의 소비자 약속이 그대로 헤드라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는 희한함이 크리에이티브일 수도 없다. 전략과 크리에이티브의 관계는 한 번 비틀어(뒤집어) 내던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라는 발상에서 한번 비틀면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갑니다. 좀 태워 주세요’에서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샌프란시스코에 갑니다. 좀 태워 주세요’ 처럼,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러’를 덧붙이는 마음, ‘장미를 사세요’가 아니라 ‘사랑을 사세요’로 외치는 마음, Nice(니스)를 Nice(나이스! 멋져요!)로 한 번 비트는 발상, 그것이 바로 크리에이티브다.
“광고의 거장들은 언제나 시인들(Poets)이었다. 사실(Facts)에서 출발해 아이디어와 상상(Idea & Imagination)의 세계로 훌쩍 건너 뛰어버리는 사람들이었다.”
-빌 번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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