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8 : Case Study - 몽블랑(Mont Blanc) 만년필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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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 몽블랑(Mont Blanc) 만년필
 
  4,810m의 자존심을 잃지 마라  
김 원 규 CD | CR4팀
wkkim@lgad.lg.co.kr
 

조국, 독일 통일에 사인하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자 소련군이 진주한 동독과 연합군이 진주한 서독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냉전체제가 가속되면서 1949년부터는 동·서양 진영에 독립된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이어 60년대에는 서독의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에 따라 양 진영의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대결 국면은 1969년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 해빙무드가 조성되며 일대 전환기를 맞았고, 이후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 간 34차례의 지루한 협상 끝에 문화·과학기술·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함으로써 활발한 민간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82년 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총리가 동독을 방문하고, 1987년 동독의 호네커(Erich Honecker) 공산당서기장이 서독을 교환 방문함으로써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진전과 소련의 개방·개혁 정책에 힘입어 분단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며 하나로 합쳐지는 데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순간, 그러니까 서독의 콜(Helmut Kohl) 총리와 동독의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 총리가 통일 독일 합의서에 사인한 그 순간, 양 총리의 손에는 바로 몽블랑(Mont Blanc)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그 역사적 현장에 ‘마이스터튁(Meisters-tuck) 149’가 함께한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세계사의 고비마다 중대한 의사 결정권자들의 앞에는 늘 만년필이 놓여져 있었다. 워터맨(Waterman)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베르사유조약을 비준하는 테이블에 당당히 올랐는가 하면, 1926년에는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비행일지를 작성해 유명세를 탔다. 또한 파커(Parker)는 1945년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세계대전 종전협정에 서명할 때 사용해 전세계인의 마음속에 강렬한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한편, 몽블랑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국가의 주요 문서에 사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83년에 상영된 007시리즈 <옥토퍼시>에서는 제임스 본드의 비밀병기로 둔갑해 영화 팬들에게 색다른 매력을 안겨주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몽블랑은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1997년 12월 3일, 당시 임창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이행각서에 몽블랑으로 서명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한 나라의 부총리가 나라가 망하느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치품으로 사인했다는 것이 그 지적이었다.


몽블랑에 얽힌 추억 하나


1984년, 처음 회사에 입사해서 회장에게 결재를 받는 날이었다. 홍보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각자 업무에 대해서 회장의 사인을 받게 되어 있었다.
대리·과장·차장·실장의 사인이 있은 연후에 이사와 상무, 그리고 부사장의 ‘모나미153’ 사인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회장 결재만 남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리허설을 한 후에 비서실로 들어가 순서를 기다리면 비서가 안내를 해주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가니, 깐깐한 노인이 일본 원서를 뒤적이다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간단한 설명과 예산을 보고하니까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 ‘J부사장이 검토했지?’라고 물으면서 양복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사인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만년필 뚜껑에 장식되어 있는 하얀 마크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만년필 몸체에 있는 골드 장식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비록 순간적이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 하얀 6각형 심벌마크였던 것이다. 자리에 돌아왔지만, 결재를 받은 내용보다는 ‘그 만년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다못해 자료실에 올라가 일본 명품 책자를 뒤지고 나서야 ‘그 만년필’의 정체가 바로 몽블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백화점으로 달려갔지만, 매장은 없었다. 다시 남대문 수입상가에 가서 수소문했더니 수다스런 아줌마가 작은 가게를 하나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것은 한달치 월급을 넘어서는 정도였다. 그냥 만지작거리다가 마음만 상하고 집으로 올 수밖에….
그리고 4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일본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동료와 쇼핑하기 위해 백화점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몽블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회사도 옮겼고, 전 직장에 대한 기억은 잊혀져 가고 있었지만 몽블랑을 보는 순간 내 신입사원 때의 어설픔과 회장님에 대한 존경심이 밀려왔다. 분명 내 월급으로는 무리였지만 그 날 결국 몽블랑을 일본에서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출장을 가면 팀원들을 위한 선물을 하나씩 장만하는 게 예의였는데, 무리한(?) 탓에 단지 비행기 안에서 구입한 쓴 담배로 때웠고, 가족에게는 입을 싹 씻었다. 그 원망은 한달 정도 갔지만 나는 몽블랑을 소유했다는 설렘으로 다 극복할 수 있었다.
유럽의 최고봉이 명품을 만들었다

몽블랑은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겠다’는 창업자들의 신념과 장인정신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블랑의 역사는 독일 함부르크의 문구상 클라우스 요하네스 포스(Claus Johannes Voss), 자본주인 은행가 크리스티안 라우젠(Christian Lausen), 그리고 베를린의 엔지니어 빌헬름 잠보(Wilhelm Dziambor) 등 세 사람이 함부르크에 작은 공장을 세운 1906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의 회사 이름은 몽블랑이 아니라 ‘SIMPLO FILLER PENCO’였다.
그들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필기구를 만드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끝에 창업 4년이 지난 1910년, 그들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만년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만년필의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이때 유럽 사람들이 눈 덮인 몽블랑 봉우리를 보며 느끼는 자부심을 만년필을 쓰면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뜻에서 브랜드 네임을 ‘몽블랑’이라고 하여 출시하게 되었다. 명품 몽블랑의 최초 런칭이 시작된 것이다.
이어서 1913년에는 6각형 모양의 심벌인 ‘화이트 스타(White Star)’를 뚜껑에 새겨 넣게 되었는데, 이는 유럽의 최고봉인 눈 덮인 몽블랑 봉우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 1930년부터는 펜촉에 몽블랑의 높이인 4,810m를 상징하여 4,810이라는 숫자를 새겨 넣었다. 사실 몽블랑은 그 당시 측정 기술로는 4,810m로 알려졌지만 후에 정밀 측정 결과 4,807m로 밝혀졌는데, 그럼에도 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몽블랑이 명품으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924년 마이스터스튁(Meisters-tuck) 라인이 생산되면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걸작’을 뜻하는 마이스터스튁을 통해 몽블랑은 그들의 뜻대로 마침내 명품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3명의 동업자가 많은 상징물 중에서 유럽 최고봉인 몽블랑을 브랜드로 채택하고, 심벌인 화이트 스타를 뚜껑에 부착하며 그 높이를 펜촉에 새긴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제품을 만들자’는 창업 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몽블랑이 ‘필기구의 예술품’으로 칭송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장인정신과 펜촉의 정교함에 서 비롯된다. 많은 명품 브랜드가 현지화 내지는 다국적 생산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몽블랑은 여전히 함부르크 본사에서만 생산할 뿐 일체 하청생산이나 OEM방식을 채택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몽블랑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몽블랑의 모든 펜촉은 100% 수공으로, 가내 수공업 같은 엄격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펜촉의 가장 이상적인 재료인 금을 재료로 하여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펜촉은 바로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이스터의 필기 테스트를 통과해야 비로소 몽블랑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대량생산 시스템과는 정반대 개념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몽블랑은 한 자루를 완성하는 데 무려 6주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투여된다고 하니, 몽블랑이 왜 세계 최고의 제품인지는 그 생산과정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사용가치’에서 ‘소유가치’로

몽블랑의 성공 요인은 먼저 제품에서 찾을 수 있지만,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요인으로1987년에 CEO로 부임한 ‘마케팅의 귀재’, 노버트 플라트 사장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20달러 이하 저가 상품군의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고가정책을 구사했다. 명품으로 성공하려면 아무나 소유할 수 있다는 대중성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의 몇몇 명품 브랜드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라이선스 사업에 몰두하거나 현지화 작업에 나서 상류층으로부터 멀어진 케이스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품질 면에서는 그 어떤 브랜드와 겨뤄도 이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희소성 원칙을 고수하기 시작했다. 몽블랑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만년필 본연의 사용가치보다는 소유가치에 더 만족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필기도구로서의 몽블랑보다는 소유한 사람의 품격과 신분을 상징할 수 있는 코드로 활용하자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시장 점유율은 날로 상승하고 있는데, 특히 ‘솔리테르 로얄라인’은 10만 유로를 호가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특별 생산하고 있는 ‘Limited Edition’은 고가와 희소성으로 더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는 몽블랑의 4,810m를 상징하는 의미로 4,810개만을 한정 생산 판매함으로써 매니아들 사이에 뜨거운 수집 열기를 부르기도 했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제품 철학과 철저한 브랜드 관리로 명품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낸 몽블랑은 이후 성공적인 마케팅에 힘입어 향수·시계·핸드백·지갑·벨트·선글라스 등으로 제품라인 확장을 기해 토털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다지게 되었다. 이들 제품들은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만년필의 후광효과에 힘입어 명품 브랜드로 약진하며 그 전망을 밝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몽블랑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 지원 활동이다. 그들의 메세나(Mecenat) 활동은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P.E.N Mont Blanc Gala’를 지원하면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에도 적극적인데, 이러한 활동은 1990년 ‘몽블랑 문학상’을 제정해 재능 있는 단편작가들을 발굴,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1992년부터는 ‘몽블랑 문화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이 상은 문화발전과 예술활동에 헌신적인 인물과 단체를 지원할 목적으로 제정되어, 몽블랑 문화재단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음악가·디자이너·영화배우 등을 심사위원으로 위촉, 엄격한 심사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그리고 수상자들은 후원금과 더불어 순금, 만년필, 그리고 그 해의 한정 상품을 부상으로 받는다.
또한 40여 개국의 역량 있는 음악가로 구성된 ‘몽블랑 필하모니 내이션즈’라는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등 몽블랑은 다양한 문화활동을 지원하면서 남성적 색채가 강한 브랜드 이미지를 여성에게도 어필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몽블랑의 자신감, ‘IS THAT YOU?’캠페인

명품 브랜드에 있어서 광고는 ‘제품을 팔기’보다는 ‘인식을 파는’ 수단이다. 즉 브랜드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고 특화시키며, 수많은 경쟁 브랜드 속에서 경쟁력을 갖게 하는, 힘의 원천을 생성해내는 수단인 것이다.
사실 몽블랑은 그간 광고로서는 그렇게 성공적인 캠페인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품을 일방적으로 보여주거나, 때로는 여자와 매치시켜 보여주거나 하는 등의 지루한 광고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몽블랑이라는 브랜드가 지니는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에 만년필만을 마케팅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비즈니스맨들에게 선물 리스트를 대라고 하면 몽블랑은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인 확장을 하면서 경쟁사들과 다양한 전선을 펼치다보니 뭔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고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최근 벌이고 있는 ‘IS THAT YOU?’캠페인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받고 있다. 몽블랑 만년필을 연상시키는 블랙 바탕은 소비자들에게 그간 쌓아온 권위와 명성을 이어가려는 의지이며, 브랜드 에쿼티(Brand Equity) 차원의 관리라고 보인다.

<광고 1~3>은 만년필 광고로서, ‘IS THAT YOU?’라는 슬로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평범한 광고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이 슬로건 하나를 통해 명품으로서의 위상을 표출함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몽블랑만의 특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
다음 광고들은 라인 확장에 따라 집행되고 있는 광고 캠페인인데, 만년필에서 만들어진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자 뇌리에 이식시키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다. 만년필에서 명품 이미지가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다른 제품 라인에 전이시키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많은 명품 브랜드가 라인을 확장해서 성공한 케이스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몽블랑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지만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단계라고 평가하고 있다.
<광고 4, 5>는 브리프케이스 광고인데, 아마도 만년필과 가장 가까운 제품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비즈니스맨들에게 거의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고 있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고 6~9)는 시계를 위한 광고인데, 몽블랑의 라인 확장 전략도 만년필의 고객과 겹치는 층들을 위한 제품에서부터 하고 있어 괴리감이 없는 듯하다.
<광고 10, 11>은 향수 광고로, 이 캠페인 중 유일하게 모델 이미지를 이용해 광고하고 있다. 이는 향수라는 특성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명품 브랜드들의 일반적인 전략이지만, 몽블랑 역시 한 품목에서 강력한 성공을 이룬 다음 그 후광효과를 이용한 브랜드 확장을 통해 마케팅 볼륨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브랜드 확장 전략은 성공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광고에서는 만년필에서 거둔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이미지를 단순화시키고 있는데, 다른 제품군의 광고를 보더라도 만년필의 잔상이 보이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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