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04 : 광고세상 보기 - 꿈과 위안으로서의 광고 만나기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꿈과 위안으로서의 광고 만나기
 
 
 광고세상 보기
 
박천호/한국일보 산업부 기자
toto@hk.co.kr
 

한참 마감을 하고 있던 와중에 원고 요청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원고를 맡았지만, 막상 쓰려니 막막해졌다. 며칠을 고민하다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기 위해 원고 청탁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의 계획은 ‘미수’에 그쳤다. 사람 좋은 그의 당황하는 목소리에 그만 내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광고 관련 기사를 쓰고 있지만, 솔직히 나는 광고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저녁마다 ‘공사다망’한 직업 특성상 TV를 자주 보지도 못하는 처지다. 쏟아져 나오는 CF를 기억도 못해 그나마 기사를 쓸 때마다 인터넷을 뒤질 정도다. 더구나 그 동안 사실적·분석적인 글만 써 온 터이고, 이처럼 자유로운 소재에 자유로운 형식의 글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니, 이 글은 일천한 경험에 의존한 감상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현대인은 ‘호모 애드버타이징’

현대인의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광고만큼 현대인의 의식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드물다. 어느 순간 안방을 점령한 후 단순한 가전제품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TV를 시청하면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광고다. 쌍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적 전달을 강요하는 TV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TV보지 않기를 선언한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현대인의 대부분은 집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TV와 함께 보내고 있고,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광고에 노출되어 있다.
요즘 아이들이 광고를 통해 말을 배우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인간에게 언어가 무엇인가. 굳이 언어학의 심오한 이론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형성하는 근원이자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광고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다시 광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키워 나간다. 그러니 아마도 사회학자 중에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애드버타이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광고는 꿈이자 환상이다

나 역시 ‘호모 애드버타이징’이었다. 어린 시절 내게 광고는 꿈과 같은 존재였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까. 근데 왜 내 주변에는 저런 여자가 없을까’ ‘아~저런 것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일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꿈이 무엇인가. 현실에서 벗어나 있거나, 아니면 현실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꿈이다. 현실성을 지닌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거꾸로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꿈을 꾸는 것은 더욱 달콤해지게 마련이다.
워낙 기억력이 없어 장면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 CM송만은 지금도 입가에 맴돈다. ‘엄마, 아빠와 함께 투게더’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오란씨’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이런 광고들을 보면서 나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또 그런 광고 속에 등장한 여자모델이나 연출된 가족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 혹은 행복한 가족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루는 원형질이 된 듯하다.
광고를 통해 꿈을 꾸는 것은 어른이 돼 세상물정을 알만큼 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TV를 보다 우리집 거실을 벗어나 그 어딘가로 향해 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음모다

대학에 들어온 후 광고는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서 소비를 이끌어내는 기제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캠퍼스를 메우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 선배가 광고회사에 취직하자 누군가가 그랬다. “자본주의 물신화(物紳化)의 선봉장이 되셨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재단하기 좋아했던 80년대 대학생의 치기 어린 한마디였지만, 선천적으로 소심했던 내게는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서 한동안 광고를 보지 않았다. 자본주의 물신화의 포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이영애의 하루’라는 유행어가 뜬 적이 있었다. 워낙 많은 CF에 출연, 그녀가 등장하는 광고만으로 하루의 일상을 묘사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였다. 예를 들어, 러닝머신으로 하루를 시작한 이영애가 낮에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커리어우먼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감미로운 피아노를 연주하는 낭만주의자로 변신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영애의 하루’라는 유행어 속에서도 나는 무언가 음모가 노골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잘 나가는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해 박탈감에 시달리는 나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안쓰러워졌다.

광고는 위안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다시 광고를 편안한 마음으로 보게 된 것은 광고 담당 기자가 되고 나서였다. 사실 나는 자신의 영화에 광고적 기법을 도입한 왕가위 감독의 영상을 남달리 좋아했던 터라 광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만 아무리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이라도 ‘업’이 되는 순간, 흥미를 잃게 마련이다. 광고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를 쓰기 위해 보는 광고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언론사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닳을 대로 닳은 내게 어설픈 유혹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광고를 들여다보면서도 기사에 쓸만한 키워드가 무엇이 될지에만 골몰하곤 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평범한 우리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어느 보험회사의 광고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흘러가는 그 광고를 무심코 보다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꾸미지 않은 것이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후 위안을 주는 광고가 눈에 많이 들어왔다. 우유배달 아줌마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를 위해 몰래 우유를 넣어주는 공익광고나, 실의에 빠진 친구를 위해 ‘젊은 태양’을 불러주는 최민식의 모습을 그린 광고 등이 그런 광고들이다.

광고는 사회의 거울이다

돌이켜보면 광고는 한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듯하다. 마치 한 인간 속에 단순한 개체의 특성만이 아니라 인류가 경험하고 축적한 역사가 담겨 있듯, 광고 속에도 사람과 사회, 그리고 시대가 녹아있는 것 같다.
광고는 여러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떤 광고는 꿈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광고는 보는 이를 달콤하게 유혹하기도 하고, 또 어떤 광고는 스산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류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하듯이 광고도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며 끝없는 복제와 재생 과정을 거쳐 진화하며 심지어 다른 영역으로의 침투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세대 여배우 전지현은 광고가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광고를 통해 발랄한 신세대의 이미지로 등장했던 그녀는 그 이미지를 그대로 영화로 가져간 <엽기적인 그녀>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시대의 광고는 마치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아가 때로는 그 용광로 속에 자신을 만든 사람들까지 녹여버리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광고업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광고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가.’
하지만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또 하나의 새로운 광고를..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