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봄날 밤, 교토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번 봄, 혼자 훌쩍 떠나 본 교토 여행. 교토 변두리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게스트들이 하나둘씩 숙소로 돌아오는 저녁에는 공용 욕실이 많이 붐빕니다. 저는 공용 욕실의 차례를 기다리느니 근처 센토(銭湯, 동네 대중목욕탕)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빌려주신 목욕 가방을 들고 룰루랄라 다녀오니, 공용 공간에는 모든 게스트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저에게도 매실주와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주시며, 먼저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그 대화에는 옆에 앉아 있던 중국인 소녀도 자연스럽게 끼어들었고, 저와 중국 소녀는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 갔습니다.

아주머니: 어머, ‘김 상’(‘나’를 지칭함)은 방송 관련된 일을 하신다고요? 그럼 한국 연예인들도 많이 만나보셨나요?
나: 예, 연예인들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 저를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요. 혹시 좋아하시는 한국 연예인 있으세요?(웃음)
아주머니: 저는 박서준 님을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한국도 여러 번 갔었답니다.
나 : 아, <이태원 클래쓰> 촬영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머리가 짧았는데도, 정말 잘생겨서 깜짝 놀랐었네요.
아주머니: 박서준 상을 직접 보셨다구요? 와, 정말 부러워요. 한국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다들 잘생기고 예쁠까요? 특히, 한국 남자들은 너무 다정해요. 일본 남자들이랑은 완전 달라요.
나: 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에요. 예를 들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거랑 실제 일본은 많이 다르잖아요?
아주머니: (웃으며) 그건 그렇네요.
(옆에 앉아 있던 중국 소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중국 소녀: 정말 그래요. 저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일본 학생들을 엄청 부러워했었어요.
나: 그러니까요. 저희 아들도 학생 교류 프로그램으로 일본 고마츠 고등학교에서 1주일 정도 지낸 적 있거든요. 아들도 저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봐서, 일본 가기 전부터 엄청 기대에 가득 차 있었어요. 너무 기대하면 막상 가서 실망할까 봐, 저는 ‘실제 학교는 애니메이션이랑 다를 거야, 그건 다 환상이야’라고 얘기해 줬었죠. 그런데 고마츠 고등학교에 도착한 아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중국 소녀 · 아주머니: 그래서 아드님이 뭐라고 하던 가요?
나: "아빠, 환상이 아니었어”
아주머니: ㅋㅋㅋㅋ 어떤 점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 가요?
나 : 여기 애니메이션으로 보던 거랑 똑같아. 방과 후에 궁도부 활 소리가 들리고, 운동장에는 야구부가 열심히 연습하고 있고…
중국 소녀: 하하하, 그게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일본 고등학교의 방과 후 모습이죠. 저도 사실은 그 환상 때문에 작년에 일본에 교환학생을 왔거든요.
아주머니: 아, 그래서 이렇게 일본어를 잘하시는 거였군요.
중국 소녀: 아니에요. 일본어 잘 못해요(웃음), 근데 정말 일본 대학생활도 환상이 아니었어요! 다들 동아리 활동에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중국 고등학교는 그런 거 없이 맨날 공부만 하는 일상이었는데 말이죠.
나: 그런 분위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이긴 해요. 입시 외의 활동이 쉽지 않은 환경이죠.

일본 고등학생은 공부는 안 하고 부카츠(부활동)만 하나?
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절반은 부활동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중국 소녀 : 맞아요. 부활동 아니면 이세계이지요.(웃음)
나: 부활동이 가장 낭만적인 건, 미래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취주학부 이야기를 다룬 <울려라! 유포니엄>의 쿠미코처럼, 악기 연주로 대학을 가거나, 프로 연주자가 될 생각이 아예 없는 학생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연습에 몰두해요. 다리 위에서 ‘잘하고 싶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나요. 그래서 실제로 애니의 주무대인 ‘간사이 고등학교 취주학부 콩쿨’을 실제로 보러 갔었어요.
중국 소녀 : 와! 진짜 찾아가 보셨다구요? 애니메이션에서는 연주는 아무래도 수준이 높게 들리던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요?
나 : 아니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애니메이션보다 현실이 더 감동적이었어요. 연주의 수준도 매우 높았고, 각 학교가 준비해 온 필살기들을 보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무엇보다 학생들의 진지함과 현장에 흐르는 긴장감에 압도당해버렸어요. 실제로 연주 중 우는 학생들도 있더라구요.
중국 소녀 : 와! 그것도 환상이 아니었군요. 전 오히려 남들이 관심 없는 마이너 한 부활동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더 낭만적인 것 같아요. 전 <치하야후루>를 좋아하는데요, 주인공 치하야가 어린이 놀이라고 여겨지는 카루타 부를 만들고,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 보여요.
나 : 아! 저도 <치하야후루> 좋아했어요. 그런데 일본인들만 아는 시구를 알아야 하는 게임이라 직접 해볼 수 없어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아들과 함께 우리만 쓸 수 있는 카드를 실제로 만들어서 비슷한 게임을 집에서 해보기도 했어요.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구요. 이것도 진실!
아주머니: 카루타까지 알고 있나요? 여러분들이 저보다 부활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맞아요. 일본 학생들이 부활동을 매우 열심히 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요새는 아무도 학교 선생님을 안 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부활동 고문 선생님이 퇴근도 일찍 못 하고, 주말에도 시합 따라다니고, 수당도 거의 없으니까…
중국 소녀: 아, 그런가요, <케이온!>에서 밴드부 고문 사와코 선생님은 너무 즐거워 보이셨는데...
모든 일은 여기서 시작된다. 합숙의 밤
나: 맞다. 애니메이션을 보면 부원들끼리 여름방학 때 합숙을 하잖아요? 그걸 보면 방학 때 며칠을 당직으로 일해야 하는 선생님의 입장이 이해가 가네요. 그렇다고 애들끼리만 자게 놔둘 수도 없구요. 합숙은 청춘의 학생들이 합법적으로? 함께 밤을 보낼 수 있어서 그런지 정말 설레는 경험처럼 보여요. 그래서 중요한 사건의 발단이 되거나, 급격하게 증폭하는 지점이 되기도 하죠.
중국 소녀: 아! 합숙!! 정말 그래요. 합숙에서 남녀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지죠. 최근에 본 <푸른 상자>에서도 운동부 합숙 마지막날 캠프파이어가 얼마나 낭만적이던지요. 히나가 내내 짝사랑하던 타이키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울어버렸어요.
나: 저도 진 히로인 치나츠 선배보다는 히나를 더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 반박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합숙에서 남녀 관계가 발전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사실 동성의 연애관계일 때 합숙은 더 극적이죠!
중국 소녀 : 동성… 이요? (경계하는 눈빛)
나 : 보통 합숙에서는 남녀의 생활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동성일 경우에는 같은 공간에서 씻고, 잠이 들게 되죠. 백합물의 최고명작이라 불리는 <이윽고 네가 된다>에서도 학생회가 합숙을 하는데요, 좋아하는 후배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토우코 선배의 모습이 정말 귀여웠어요!
중국소녀 : 그런데 정말 부활동에서 합숙을 많이 할까요? 일단 합숙을 한다고 해도 장소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요. <케이온!>의 츠무기처럼 자기 별장을 선뜻 빌려줄 수 있는 부자 친구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구요.
나 : 일본에서는 부활동 합숙이 매우 흔한 것 같아요. 저희 아들이 일본 교류 프로그램에서 묵었던 숙소도 학생 합숙소로 많이 활용되는 곳이라고 하더라구요. <이윽고 네가 된다>를 보면, 학교 자체에 합숙 시설을 가지고 있는 곳도 꽤 있는 것 같구요.
아주머니 : 맞아요, 일본에서 부활동 합숙은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필수 코스 같은 거예요.
중국 소녀 : 아, 정말 부러워요. 중국에서는 그런 건 정말 상상하기 어려워요.
나 : 한국은… 안전 책임 문제 때문에 소풍이나 수학여행도 없어지는 추세인데, 합숙은 정말 꿈도 못 꿀 것 같아요. 그래도 축제나 문화제는 좀 더 활성화되는 느낌인 것 같지만, 일본 학교 문화제의 규모와는 비교하기 어렵죠.
중국 소녀 : 문화제! 바로 그거죠! 합숙은 1회성 이벤트라면, 문화제는 학원물 한 시즌의 스토리를 끌고 가는 주제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과정은 이 순간을 위해서. 문화제의 무대
나 : 일본 학교의 문화제는 정말 성대한 것 같아요. 제 인생 애니 중 하나인 <빙과>는 학교 문화제의 명칭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돼요. 문화제 자체도 3일이나 진행되구요.
아주머니 : 아, 일본에서도 고교 문화제를 3일이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보통은 금~토 2일 정도로 진행한답니다. 금요일은 학생끼리, 토요일은 일반인도 구경할 수 있게 개방하는 경우가 많구요.
중국 소녀 : 맞아요, 일본의 학원제는 마치 동네 축제 같은 느낌이에요! 외부인이 학교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서는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죠! 관계가 소원했던 가족이나 친구들이 축제를 방문하면서, 감동적인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하구요.
나 : 학생들이 부활동에 열심이기 때문에, 문화제 전시나 공연의 퀄리티도 한국보다 높은 것 같아요. 제가 작년에 저희 아들 고등학교 문화제 공연을 관람했었는데… 저는 정말 배가 찢어져라 웃고, 저희 와이프는 너무 민망해서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어요. 이럴 거면 그냥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웃음)
중국 소녀 : 맞아요! <봇치더록!>의 문화제 공연은 정말 대단했지요! 특히 <별자리가 되고 싶어> 연주 중에 봇치의 기타 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죠. 키쿠리가 마신 술병을 활용해서 위기를 넘기는 장면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나 : 아… 아무리 그래도 문화제 공연이 실제 그 정도 레벨은 아닐 거예요. 일본에 여행 갔을 때, 일본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도 봤거든요. 거기서도 수준 이하의 밴드도 많이 보이더라구요.

중국 소녀 : 게다가 일본 학생들은 부활동 발표만 하는 게 아니고, 각 반에서도 이벤트를 준비하잖아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주제를 정해서, 귀신의 집이나 메이드 카페를 준비하는 모습이 정말 재미있어 보여요!
나 : 그리고, 학생회에서 준비하는 각종 콘테스트도 있죠! <그 비스크돌은 사랑은 한다>에서 마린 짱이 호스트로 분장해서 남장/여장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장면이 기억나요!
아주머니 : 어머, 문화제에서 남장/여장 콘테스트를 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호스트 분장이라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리고 꼭 모든 학생들이 문화제를 열심히 준비하는 건 아니에요. 열심히 하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구요.
나 : 사실 그건 여러 명이 모인 단체에서는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그 정도는 제 환상 속에서 생략해 버릴 수 있어요.
학교 옥상에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 그 청명함
아주머니 : 여러분, 정말 아쉽지만 이제 소등시간입니다.
중국 소녀 : 벌써요?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학교 친구들과 함께 가는 여름 축제에 대해서도 얘기해봐야 하는데!
나: 그래요, 거기에 신년 참배도 있구요.
중국 소녀 : 친구가 감기로 결석하면 노트를 빌려주려 병문안을 가는지도 궁금하거든요. 병문안 와서 죽을 만들어 주는 남자친구가 너무 부러웠단 말이에요!
나 : 한국에서는 그 정도 감기로 학교를 쉬지는 않죠, 중국도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쓴웃음) 하지만, 제가 가장 부러웠던 건 일본의 학교 옥상이에요.
아주머니 : 학교 옥상이요?
나 : 애니메이션을 보면 학교 옥상에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나요. 특히,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는 인물들이 학교 옥상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한숨을 돌리죠. 그리고 거기에서 모두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돼요.
중국 소녀 : 맞아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주인공 신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마리를 만나는 게 바로 학교 옥상이죠!
나 : <무리무리!>의 레나코도 인싸들로부터 대피한 학교 옥상에서 마이와 마주하게 되죠. 그리고 마이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슴 떨리는 고백을 하죠.
중국 소녀 : <일주일간 친구>의 카오리도 학교 옥상에서 하세 유우키 군을 만나게 되죠. 아~ 나도 그런 사람 만날 수 없으려나.
나 :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건, 운명적인 만남이 아니에요. 그전에 옥상에서 홀로 바라본 하늘이죠.
중국 소녀 : 하늘이요?
나: 주인공이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중국 소녀 : 배경 작가님들이 워낙에 그림을 잘 그리시니까~
나 : 아니에요, 실제로 일본에 오니 하늘이 더 파랗고 맑은 것 같아요.
중국 소녀 : 에이, 그건 기분 탓 아닐까요? 아무래도 여행을 하다 보니 하늘을 볼 기회가 더 많아서일 수도 있구요. 일본의 건물들이 좀 무채색 계열이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구요.
나 : 아니에요. 실제로 일본의 하늘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미세먼지 농도도 그렇고, 해양성 기후이기 때문에 하늘이 더 청명하다고 하더라구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공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잠시 혼자 쉴 수 있는 공간, 그게 화장실이나 회의실 한 구석이 아니고,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는 옥상이라면…!
아주머니 : 아 그건, 일본 학교의 옥상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안전 위험 때문에 항상 잠겨…
중국 소녀 : STOP!!
나 : 더 이상 저희의 환상을 깨지 말아 주세요! ㅎㅎ 오늘 저녁 감사했습니다. 저희는 이만 들어가서 잘게요!
중국 소녀 :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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