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이야기] 취향 과시의 시대에서 외치기 “아직 안 본 눈 삽니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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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훌쩍 떠나본 일본 여행에서 가장 처음 눈에 띈 것이 있습니다, 지하철에 탄 학생들 가방에 달린 키링의 숫자가 부쩍 늘었습니다. 가끔씩 키링에 둘러 쌓여 가방 자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캐릭터 키링일까?’, ‘이 사람이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구나보다는, ‘저렇게까지 해서 자기 취향을 보여주고 싶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온라인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흑백요리사의 영향인지) 최근 미식 취향을 뽐내는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취향에 대해 투자한 돈, 노력, 시간을 키링으로 표현해 본다면, 저도 어떤 분야에서는 남에게 과시할만한 수의 키링을 갖고 있을까요

 

현실에서 이런 키링 가방을 여러개 봤다. 우리는 가방을 가볍게 하기 위해 수십만원을 더 주고 일반 노트북이 아닌 ‘그램’을 산다. 일부러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건 가방 무게를 줄이기 위한 투자를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노력이다. / 출처: 솔라시도 solarsido 공식 유튜브

 

역으로음주에 대한 관심은 계속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지금의 시간을 불살라버리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가꾸거나 자신의 취향을 고도화하기 위한 활동에 시간을 투자합니다. 술을 마시더라도 이전과는 의미가 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취하는 도구로서의 술이 아닌, ‘즐기는 취향으로서의 술을 마십니다. 소맥이냐 막걸리냐, 과일소주냐 주종만 선택하면 되었던 대학시절 술자리가 요새는 희귀한 브랜드나 빈티지를 논하는 자리가 됩니다.

 

2026 2분기, 공교롭게이라는 취향을 다루는 2개의 애니메이션이 동시에 방영하고 있습니다. <카미이나 보탄, 술에 취한 얼굴은 백합의 꽃> <신의 물방울>. 똑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정반대 지점에서 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두 시선의 차이를 통해, 섬세해지는 취향에 대한 저의 두려움을 고백해 보고자 합니다.

 

포스터부터 두 작품의 차이가 명확하다. 선물할 술을 들고 가는 보탄의 설레는 얼굴(좌)와 술에 대한 지식으로 정면대결을 하는 <신의 물방울> 두 주인공의 얼굴(우) / 출처: 애니메이션 공식 홈페이지) 

 

첫 모금의 마법 <카미이나 보탄, 술에 취한 얼굴은 백합의 꽃>

 

<카미이나 보탄, 술에 취한 얼굴은 백합의 꽃>의 주인공 카미이나 보탄은 이제 막 술의 세계에 발을 들인 대학생입니다. 그녀는 술에 대해 철저히 무지합니다. 편의점 가판대에 놓인 술의 화려한 라벨과 이름만 보고는 혼자만의 엉뚱한 맛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계산대로 향합니다. 그녀에게 술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미지의 영토를 탐험하는 모험과 같습니다. "이 술은 이름이 예쁘니까 달콤한 꽃향기가 날 거야"라고 믿으며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 예상치 못한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내 ", 이게 어른의 맛인가?"라며 금세 웃어버리는 그 해맑음이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オープニングムービー完全版|TVアニメ『上伊那ぼたん、酔へる姿は百合の花』 / 출처: アニプレックス チャンネル 공식 유튜브

<카미이나 보탄>의 오프닝 애니메이션. 26년 최고의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라 할만하다. VHS의 질감과 SD화면비, 그리고 홈비디오 느낌의 핸드 헬드 효과는 나를 진짜 대학교 시절로 데려가는 듯하다. 특히 00:40~ 이부키를 아련하게 잡아주는 카메라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서정적이다.

 

보탄이 운명적인 상대 이부키를 처음 만나는 장면은 이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부키는 보탄과는 대조적으로 술을 꽤 잘 아는 인물이지만, 결코 술을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한가한 노점 옆 벤치에서 얼음이 짤랑거리는 하이볼 한 잔을 정말 기분 좋게 들이키는 이부키의 모습. 보탄은 그 투명하고 즐거운 풍경에 반해 술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서 술은 희귀한 원산지와 빈티지를 따지는 고상한 취미가 아닙니다. 보탄은 이부키와 함께 온천을 하면서 즐길 한잔을 술을, 대학원생인 카나데는 이부키와 함께 있을 구실이 되어줄 술을 찾을 뿐입니다. 경치 좋은 곳에 도착해서 마실 한 병의 맥주는, 술 한 잔이 간절한 특별한 상황에서 함께 하는 '행복의 도구'입니다. 보탄의 눈에 비친 술의 세계는 매번 새롭고, 매번 반짝입니다. 지식이 없기에 선입견도 없고, 선입견이 없기에 술을 만나는 모든 순간이 경이롭습니다.

 

와인 평론가들의 취향 대결  <신의 물방울>

 

반면, 같은 시기에 방영 중인 <신의 물방울>은 정반대의 지점에서 술을 다룹니다. 이곳은 와인 평론가들의 치열한 전장입니다. 칸자키 시즈쿠는 저명한 와인평론가 칸자기 유타카의 친아들로, 아버지의 유언에 남긴 와인(12사도)와 그 정점에 있는 1병의 와인(신의 물방울)의 정체를 맞춰야 하는 미션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양자인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이가 끼어들어 칸자키 시즈쿠와 고도의 취향을 무기로 한 와인 대결(12사도와 신의 물방울 찾기)을 펼치게 됩니다.

 

주인공 칸자키 시즈쿠와 그의 라이벌 토미네 이세이는 보통 사람들은 감지조차 할 수 없는 미세한 토양의 기운과 층층이 쌓인 향의 구조를 분석합니다. 특히 토미네 이세이는 고도의 취향이 곧 권력이 되는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는 와인을 마시며이것은 마치 안개 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처녀의 눈물 같다는 식의 화려한 비유를 쏟아냅니다. 술에 대해 더 날카롭고 고도화된 식견을 가진 이가 힘을 쥐고, 그 지식이 곧 그 사람의 수준을 증명합니다

 

TVアニメ『神の雫』ノンテロップOP|HOKUTO「hate you? love you?」 / 출처: アニメ『神の雫』official YouTube channel 유튜브

여기서 하나 고백하자면, 바로 앞 문단의 줄거리는 AI가 요약해 준 것이다. 난 사실 <신의 물방울>을 중도 하차해 버렸다. 일단 캐릭터부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국내에 잘 들어오지 않는 희귀한 술이나 디저트 맛집을 꿰고 있다며 '꺼드럭거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피곤한데, 굳이 여기에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다...

 

누가 더 고도의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수십 년간 단련한 검술처럼 대결하는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습니다. 수십 년 간 축적한 와인 제조 기술은 맛있는 와인을 만들고, 수십 년간 단련한 검술은 사람을 잘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와인에 대한 취향이 아무리 섬세하더라도, 그것 자체로는 어떤 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섬세한 취향은 그저 본인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저는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TV애니메이션】신의 물방울 예고편 | 2026년 4월 10일 방영 ! / 출처: アニメ『神の雫』official YouTube channel 유튜브

 

애니메이션 <신의 물방울>의 예고편. <신의 물방울> 만화책은 우리나라의 와인 붐에도 일조하였으며, 중년 회사원들이 만화책을 선물하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즐기면 즐길수록 고도화되는 취향, 익숙해져 버린다는 슬픔

 

그렇다고 제가취향의 고도화를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특이한 취향을 기분 좋게 뽐내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저는 반대로 그 순간을 조금 슬프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열심히 경험을 쌓다 보면 평범한 수준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익숙해져 버린 것들보다 더 깊거나, 더 색다른 것들을 추구하게 되면서 나의 취향은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게 됩니다. 취향이 고도화된다는 건, 다수의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쉽고 평범한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영미권의 록, 일렉트로닉 밴드들을 거쳐 해외 인디 음악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영화에 깊이 빠져들어 평론가들이 흔히 쓰는 잣대로 영화를 난도질하곤 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꽤 자부심 있는 행동이긴 했습니다만, 꼭 그 방향으로 행복했어야 했는지,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람들과 노래방을 가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없고, 간혹 있다고 해도 다 함께 부를 수도 없습니다. 영화를 볼 때에도 이미 섬세해져 버린 눈은 조금이라도 클리셰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바로바로 찾아내버립니다. 작품 감상이 끝난 뒤에는 식상한 연출에 대해서 이런저런 불평을 쏟아내 버립니다.

 

한창 섬세한 시기의 아들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백합물 전용 코너. 서일본 오타쿠의 성지 덴덴타운에서도 백합 장르 애호가를 위한 장소는 서가 2열에 불과했다. 힘들게 찾았는데 굿즈도 없고 만화책 정도만 진열되어 있어서 결국 아무 것도 사지 못했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선물 하나 사기도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전 평론가들의 평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좀 가혹하게 얘기하자면, 동인지(원작의 캐릭터/스토리 등을 활용하여 만든 팬메이드 작품)보다도 가치 없는 수준의 파생 콘텐츠 정도?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들어버린 나머지, 평론가는 대중이 사랑하는 보편적인 클리셰를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클리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게 그렇게 나쁘다면 왜 자꾸 반복될까요. 그 분야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매료될 수 있는 문법이기에 수많은 창작자가 활용하는 것 아닐까요? 평론가만큼 영화에 시간이나 돈을 투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대다수를 위한 클리셰는 평론가보다 세상에 더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떤 취향이든 깊이 파고들어 많이 경험하게 되면, 사소한 디테일에 민감해집니다. 그럴수록 순수한 즐거움은 금세 휘발되어 버리고, 더 정교한, 더 세밀한 즐거움을 찾게 됩니다. 그 과정은 대부분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합니다. 음원 사이트나 OTT 덕에 이제 비싼 수입 CD DVD를 사야 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더 깊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연봉에 달하는 음향 장비를 사들이기도 하고,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즐기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일반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와인을 맛보기 위해서 한 병에 수십~수백만 원을 지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섬세해진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레어템을 찾아내는 순간의 즐거움은 매우 짜릿할 것입니다. 하지만, 브랜드마저 알 수 없는 저렴한 치킨집 생맥주에 그저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다면, 어떤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들이 이번 어버이날 선물로 찾아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창백한 불꽃>. 내 취향을 반영하여 통상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형식의 소설을 찾기 위해 고생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까지 특이한 취향을 선호하는 걸로 보였을까… 평론가까지 갈 필요 없이,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나의 문제이다.

 

매일 아침 새로운 눈을 갖게 해주는 꽃 : <충사> 6화 '이슬을 마시는 무리'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애니메이션 <충사>의 제6, '이슬을 마시는 무리에피소드에는 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단 하루만 사는 벌레와 수명을 공유하며, 매일 아침 새롭게 태어나고, 해가 지면 죽음을 맞이합니다. 육체는 매번 그대로 이어지지만, 벌레의 영향으로 기억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녀에게 매일 아침은 생애 첫 번째 맞는 아침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특별한 상태를 이용해 그녀를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하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 음모를 파헤치고 소녀의 몸에 기생하던 벌레도 제거했지만, 정작 소녀는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인생에서 처음 마주하는 햇살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처음 듣는 것 같은 새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매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생경하고 충만했던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다고.

 

저 꽃가루를 들이마시면,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 출처: https://www.imdb.com

 

다시 벌레에 중독되면, 이제는 정말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그녀는 다시 꽃가루를 마셔 버립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동안 속아온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인간에서 도망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벌레에서 해방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무한히 긴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 계절, 세대라는 긴 시간 속에서 우리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점점 익숙해지고 찬란함을 잃어갈 것입니다. 다시 벌레의 수명을 함께하게 된 그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항상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꽃이 지금 제 눈앞에 있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출처: https://www.imdb.com

 

김영신의 2D 캐릭터 뽀개기 2026.05

 

Posted by HSAD공식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