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느냐가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절실한 사람들에게 숨겨진 사과 한 알은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나치가 유대인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가둔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체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기에 굳이 들어가 보지 않아도 잔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많은 독일인들은 알아챌 수 있었죠. 하지만 그들은 바로 옆에 살면서도 ‘모른 척’했습니다. 나치의 불문율이었으니까요.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묻지 않고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는 것. 하지만 폴란드 소녀는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 밤마다 수용소 곳곳에 사과를 숨겨 놓았죠. 당장 큰 변화를 만들 순 없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을 한 겁니다. 영화감독이자 광고 감독이기도 한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행동을 ‘작은 저항’이라고 불렀습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그는 ‘작은 저항’을 실천한 실제 인물, 알렉산드라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비록 사과를 숨겨두는 행동은 전쟁을 멈출 수도 유대인을 구할 수도 없었지만, 그런 작은 저항이 결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인간성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죠.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큰 힘이 필요한 것 같지만, 모두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할 때 시작된다는 겁니다.
여성들도 함께 걷고 있습니다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는 ‘포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감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죠.
위스키는 오랜 시간 동안 남성적인 이미지로 그려져 왔습니다. 남녀차별이 강하던 19세기 초에 설립된 브랜드가 대부분인 스카치 위스키는, 광고 또한 남성의 전유물로 묘사됐습니다. 1820년에 시작된 대표적인 스코틀랜드 위스키, 조니 워커도 다르지 않았죠. ‘Keep Walking'이라는 캐치 프레이즈 아래, 2009년 "The Man Who Walked Around The World"라는 광고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6분이라는 긴 길이이지만 원테이크로 조니워커의 역사를 전달해, 칸에서 골드 라이언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찬사를 받았죠. 광고 테마인 ‘세상을 걷는 남자’를 이야기하기 위해, 로버트 칼라일(Robert Carlyle)은 스코틀랜드의 언덕을 걸으며 조니워커의 역사를 재치 있게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브랜드 로고 또한 걷고 있는 19세기 신사였고요. 남성 창립자의 이야기여서 그렇긴 하지만, ‘The Man'의 여정이었죠. 그 광고가 2024년 다시 재현됐습니다. 다만, 남성 배우가 아닌 브라질의 여성 배우, 앨리스 브라가(Alice Braga)를 통해서.
2009년의 광고처럼 영상은 원테이크로 이어집니다. 앨리스는 위스키를 주문하면서 말하죠. ‘위스키가 여성에게 너무 강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앨리스는 조니워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강함에 대해 얘기합니다. ‘강함’이란 매 순간 과소평가받으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고정관념에 맞서고, ‘너를 위한 게 아니야’라는 말을 들어도 자신만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며, 내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 그곳에 내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비난받을 걸 알면서도 선택을 하고, 여성이 정상에 오를 수 없다고 말하는 리더들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그것이 지금 여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위스키가 여자에겐 너무 강하다고 말할 때, 강한 것은 여성이라고 답하세요.”
이 콘텐츠는 ‘Forte Sao Elas(강한 여성들)’캠페인입니다. 조니워커는 남성들의 세계로 묘사해 왔던 그들의 ‘길’을 이제 여성과도 함께하려고 합니다. 위스키 하면 남성으로 연결되는 편견을 깨고자 하는 조니워커의 작은 저항이죠. 이 캠페인은 브라질의 여성 리더이자 철학자, TV진행자, 금융기업의 CEO, 패션 브랜드의 창립자의 힘을 더해 ‘함께 가는 길’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답해야 할 때
지구는 지금 많은 부침을 겪고 있습니다. 전 세계 평균 온도가 상승하면서 해수면도 따라 상승하고 있고, 폭염, 한파, 홍수, 가뭄 등은 식량 감소와 경제적 손실을 만들고 있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통신사 2degrees는 그런 이들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합니다.
12월의 여름이 찾아온 오클랜드 타쿠타이 광장. 이곳에 49개의 얼음 블록들이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높이 3미터, 너비 2미터에 이르는 이 구조물은 2,500리터의 빗물을 얼려 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얼음들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블록 안에 핸드폰이 들어 있다는 거죠. 게다가 얼음 속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거죠. 가까이 다가가니, 전화를 걸어온 쪽은 ‘Earth'입니다. 얼음 속에 갇혀 있어서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전화입니다.
캠페인은 204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넷 제로’로 만들기 위해, 뉴질랜드 통신사 최초로 ‘과학기반 감축 목표 이니셔티브(Science Based Targets initiative, SBTi)로부터 인증받은 것을 알리기 위해 고안됐습니다. SBTi는 기업들이 ‘환경 보호’를 선언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감축 목표를 수립하도록 돕는 글로벌 단체입니다. ‘지구로부터의 전화’를 받을 수 없게 만든 건, 기후 변화의 경고를 무시한 채 답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거죠.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전화기가 드러나는 구조는, 시간이 자날수록 기후 변화가 더욱 명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2degree는 세상의 무관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크리에이터의 작은 저항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의 마음엔 두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팔리지 않아 잊힌 아이디어와 팔리진 않았지만 아깝고 아쉬워 간직하고 있는 아이디어.
글로벌 대행사 Mullen Lowe는 그중 두 번째, 아까운 아이디어를 다시 꺼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던 아이디어. 이 아이디어를 인쇄해서 포장지를 만들었죠. 포장지에는 카피뿐 아니라 SNS 아이디어, 디지털 아이디어를 비롯해 메타버스를 활용한 아이디어까지 다양합니다. 선물 포장을 위해 포장지가 많이 필요한 연말연시를 맞아 고안한 겁니다. Mullen Lowe는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예전 클라이언트의 현재 대행사, 즉 경쟁사에 선물로 보냈습니다.
비록 묻히고 말았지만, 경쟁사를 통해서라도 좋은 콘텐츠로 세상에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 클라이언트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아이디어를 포기할 수 없는 크리에이터의 작고 신선한 저항이죠. 클라이언트가 ‘재탕’한 아이디어를 좋아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야심 차게 준비한 아이디어의 가치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크리에이터의 위트이자 마지막 희망이겠죠.
실천하는 모든 것은 작지 않습니다
편지 한 통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인권을 침해받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Write for Rights' 캠페인. 24년 이미 24번째를 맞은 이 캠페인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권운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당하게 감금된 인권운동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언론인, 박해를 받고 있는 소수 공동체 등. 앰네스티가 그들의 사연과 현재 상황을 공유하면, 사람들은 편지를 쓰는 겁니다. 지지와 위로 그리고 문제 해결까지 촉구할 수 있는 내용으로. 앰네스티는 이 편지들을 당사자에게 전달해 ‘연대의 힘’을 알리고, 정부나 관련 기관에겐 국제적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편지들은 종이에 써진 글이 전부이나, 실제로 갇힌 이가 석방되기도 했고, 처우가 개선되거나 국제적 여론을 형성하여 변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앰네스티가 이 캠페인을 시작한 이유는 편지 한 통이라는 개인의 작은 행동이 인권 문제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작은 힘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저항’이라고 하면 다소 공격적이고 거칠게 느껴지지만, 브랜드의 공감 또한 작은 저항이고, 편지 한 통을 쓰는 행동 또한 작은 저항이며, 환경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작은 저항입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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