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는 오타쿠들이 진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판타지가 담겨 있습니다. 애니메이션들에 자주 사용되는 정형화된 판타지를 아래와 같이 단계별로 분석해봅니다.
1) 나는 사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놈이다.
2) 하지만 소심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기 때문에 나서지 않을 뿐이다.
3) 그래서 아무도 내 능력을 알아주지 않고, 난 항상 혼자서 지낸다. 그래도 괜찮다.
4) 하지만 누군가(보통은 반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예쁜 여학생)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에게 오히려 관심을 가진다.
5) 그 누군가가 내 잠재력을 끌어내 준다면, 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현실세계가 아니면 이 세계에서라도!!)
이번에는 이 판타지의 핵심이자, 모든 오타쿠들이 아저씨가 되어서도 계속 기다리고 있는, 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아래 소개하는 캐릭터와 같은 존재를 이미 곁에 두고 계신가요?
<천원돌파 그렌라간> 카미나 (2007년 GAINAX 제작)
“(네가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널 믿지 마, 날 믿어. 너를 믿고 있는 나를 믿어! 시몬!”
제 아들에게 단 하나의 로봇 애니메이션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저는 단연코 이 애니메이션을 고를 것입니다. (사실 제 아들은 이미 볼 거 다 보고, 현재 건담 커스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요새는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로봇 애니메이션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건담이든, 발키리든, 에반게리온이든 로봇에 타는 아이들이 싸울 생각은 안 하고 고민만 하고 있거든요. ‘나는 왜 싸워야 하나’ ‘없어져야 하는 건 적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하지만, <그렌라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로봇물의 정형성을 부숴 버립니다.
<그렌라간>은 로봇과 전장의 스케일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극한까지 끌어올려, 기존에 느낄 수 없었던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합니다. 작은 지하 마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전 우주의 운명을 건 전투까지 확대되며, 사람보다 조금 큰 크기였던 로봇은 은하계를 집어서 던질 정도의 거대한 로봇으로 변신합니다.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핵심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a.k.a나선력)에 따라 로봇의 형태가 변화한다’
왼쪽 아래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 우주 하나를 밟아버릴 수 있는 로봇의 스케일
<그렌라간>은 주인공 시몬이 가진 의지의 성장 스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용 두더지를 잡기 위해 1m 앞의 땅굴만 파고 있었던 시몬의 드릴은, 결국 누군가의 말처럼 ‘하늘과 땅 그리고 내일을 뚫어버릴 드릴’이 됩니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시몬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누군가가 바로 오늘 소개할 캐릭터 카미나입니다.
카미나는 얼핏 보기에는 ‘동네 건달 형’ 정도로 보입니다. 시몬을 포함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은 지하에 살아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살고 있지만, 카미나는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무모한 시도를 계속합니다. 강력한 추진력과 패기로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기 때문에, 지상으로 나온 뒤에도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장점에는 양면이 있듯이,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그의 성격은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가 이끄는 ‘그렌단’의 핵심 멤버이자, 카미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요코마저 앞뒤 생각 없이 닥돌(닥치고 돌진)하는 카미나에게 ‘무모함도 무엇도 아닌 그냥 억지’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오히려 따로 있습니다. 소심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을 따르는 시몬을 향한 무한에 가까운 신뢰입니다.
지상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잡아먹는 간멘(얼굴형 로봇)들에 의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간멘에 대항할 수 있는 라간(인간의 의지로 작동하는 로봇)의 조종권을 시몬에게 넘겨줄 때에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 모두가 ‘소심한 시몬을 믿지 말라’고 할 때에도 꿋꿋이 시몬에 대한 신뢰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는 자신의 죽음입니다. 시몬이 카미나에 대한 질투 때문에 라간을 조종하지 못하게 되지만, 카미나는 시몬이 회복할 것을 믿고 작전을 강행합니다. 뒤늦게 시몬이 각성하여 결국 작전은 성공하지만, 카미나는 이미 죽음을 바로 앞둔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은 채 죽습니다.
카미나는 전체 시리즈의 초반에만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카미나를 잃은 뒤에도, 시몬은 카미나가 심어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슴에 품고 이후 ‘그렌단’을 이끌게 됩니다. 시몬은 인간이 지상에서 살지 못하게 했던 수인들 및 그들의 수장 ‘나선 왕’을 무찌르고 지상에 인간들의 도시 ‘카미나 시티’를 짓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의지를 가진 존재’의 번성을 억제하고자 하는 ‘안티 스파이럴’과 전 인류, 전 우주의 명문을 건 싸움을 시작합니다. 시몬은 카미나가 쓰던 것과 같은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최후의 전투를 치릅니다. 결국, 작은 지하 마을에서 시작된 카미나의 믿음은 전 우주를 구원합니다.
“널 믿어! 내가 믿는 네가 아냐. 네가 믿는 나도 아냐. 네가 믿는 너를 믿어!”
<빙과> 치탄다 에루 (2012년 교토 애니메이션 제작)
오타쿠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일본어 “私, 気になります!(저, 신경 쓰여요!)”
2019년 7월 18일, 전 세계 오타쿠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역사상 최악의 오타쿠 아오바 신지가 교토 애니메이션(이하 ‘쿄애니’로 표기) 제1스튜디오에 방화하여, 주요 스태프 36명이 사망하고 총 6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오타쿠라고 할 수 있는 애플의 팀 쿡 CEO도 “쿄애니는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제작자와 꿈을 좇는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쿄애니의 아티스트들이 걸작을 통해 전 세계와 세대를 아우르는 기쁨을 선사했다” 면서 추모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쿄애니는 저도 가장 좋아하는 제작사였기에 그 사건에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그렌라간>을 제작한 가이낙스가 화려한 액션, 광대한 스케일, 과잉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강점이 있는 제작사였다면, 쿄애니는 평온한 일상, 소소한 재미, 섬세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제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쿄애니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케이온>등으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바꿀만한 대히트를 기록한 후, 2012년 일본의 추리 소설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빙과>를 발표합니다.
<빙과>의 이야기 전개는 <그렌라간>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법한 일상의 작은 미스터리를 해결해나가는 고등학교 고전부 부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빙과>의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는 앞서 소개해 드린 카미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할 일은 간략하게'라는 ‘에너지 절약 주의’를 본인의 좌우명으로 삼고, 매사를 귀찮아하며 타인에게 참견하려 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평온할 수 있었던 호타로의 삶은 한 소녀에 의해 무자비하게 침범당하게 됩니다. 2012년 애니메이션 씬의 최고의 유행어가 된 대사, “저, 신경 쓰여요”를 난사하는 치탄다 에루가 바로 그 침입자입니다.
치탄다는 매우 작은 부자연스러움에도 반응하는, 특유의 호기심으로 가득한 인물입니다. 자기가 먼저 들어와 있었던 고전부 동아리실에 호타로가 들어올 때 문이 잠겨있었던 이유(결국 들어왔으면 됐잖아!),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아무도 읽지 않을 두꺼운 책을 빌려 가는 이유(결국 반납했으면 됐잖아!), 수학 선생님이 A반과 D반의 진도를 헷갈린 이유(결국 다 배웠으면 됐잖아!), 영어 선생님이 수업 중 창밖의 헬기를 보고 좋아한 이유 등 본인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굳이 궁금해합니다. “저, 신경 쓰여요”라고 말하는 치탄다의 눈에서는 호기심이 넘쳐흐릅니다. 그리고 호타로는 이를 내버려 두지 못합니다.
<빙과>는 호타로의 성장 스토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호타로는 자신을 ‘완전히 보통’ ‘회색’ 같은 수식어로 표현하며, 타인은 물론 본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 채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치탄타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자신이 비범한 사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과 다양하게 부딪히게 되면서,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 주의’의 성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호타로의 성장을 촉발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치탄타가 갖고 있는 ‘호타로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극 중에서 “저, 신경 쓰여요”를 수십 번 얘기하는 동안 한 번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치탄다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치탄다가 호타로를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오히려 불편해할 수 있다는 점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꺼이 선을 넘어 침범하는 이 호기심은 호타로의 삶, 나가아 고전 부원 모두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게 이성적인 호기심으로 바뀌는 예쁜 결말을 너무나 보고 싶은데… 2기는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혹시 압니까, 당신이 끄집어낸 잠재력이 전 우주를 구해낼지도…
자신에 대해 무한한 믿음을 주는 사람이나, 자신까지 움직일 정도로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있기를 바라봅니다. 이미 그런 사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다면, 그 이전의 당신과 이후의 당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 아쉽다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카미나나 치탄다 같은 존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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