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우리에게 시소 하나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에게 시소 하나를 주노라.
그리고 네가 그 시소의 평형을 맞추면 '행복'을 느끼게 해 주겠다.
저는, 신이 그의 피조물 모두에게 시소 하나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소는 절대 평행을 유지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평행이 유지되지 않는 시소. 이게 무슨 말일까요? 쉽게 설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자, 우리가 행복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 볼까요.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순간'을 떠올려 보자고 했습니다. 즉, '행복'은 '순간'입니다. 그리고 시소의 균형이 맞추어지는 때가 바로 '순간'입니다.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는 시소의 평행은 바로 '순간'인 것입니다.
사람은 '행복'함과 동시에 '불안'을 떠올립니다.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떡하지?', '너무 행복하면 뭔가 불안한데...'란 생각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그러니 온갖 자기 계발서에서는 이 '순간'을 만끽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지금' 그리고 '현재'는 'Present' 즉, 선물이라고까지 표기하면서 그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소는 절대 평행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어쩌다 잠시 잠깐 평행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순간'이며,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입니다. 오히려, 억지로 평행을 맞추려 할 때 우리는 더 불행해진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행복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고 그것을 '붙잡으려'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후회스러운 결과를 맞이하고 있는지.
그저 살다가 어느 평행의 '순간'이 오면 그것을 감사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또는, 평행이 맞지 않더라도 그 상태에서 의미를 찾고 마음의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고요. 정리하면, 삶은 결국 균형 맞추기의 끊임없는 반복이고, 그 균형은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균형'은 '중심' 맞추기의 다른 말
'균형'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고른 상태'를 말합니다. 기울지 않거나 치우치지 않으려면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중심'을 알게 모르게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저마다 다르겠죠.
저마다의 '중심'을 찾았을 때 사람들은 행복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음이 편안한 때를 이르기도 합니다. 물로 채워진 잔. 흔들리지 않는 그 상태를 중심이라고 보면, 그 상태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세상은, 사람들은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그 마음의 물 잔을 이리저리 흔들어댑니다. 때론 물이 넘치고, 때론 컵이 요동하며, 또 때론 그 컵이 떨어져 깨지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내 잔의 크기를 알고, 깨진 잔을 다시 빚으며 삶의 의지를 다시 불태웁니다. 다시 '중심'을 향하려는 본능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깨지고 깨닫고, 다시 일어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편한 마음을 지양합니다. 그리고 편한 마음을 지향합니다. 즉, 저마다의 '중심'을 애써 지키려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죠.
'중심'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과 사상들
다행히,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이론과 사상들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나는 그것들에서, '신이 준 그러니까 평행이 맞지 않는 시소'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과연, 시소는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그 이론과 사상을 함께 살펴볼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면 꽤 흥미로울 겁니다.
1. 중용(中庸)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저술한 책이며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사서에 속합니다. '중용'의 의미는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균형'을 찾는 행위이며, '중심'을 향해 매진하려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용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지혜로운 사람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 수 없는데, 이 두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가 바로 '중용'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성(性)', '도(道)', '교(敎)'를 근간으로 합니다. '성'은 '하늘이 준 사람 속에 있는 하늘의 속성'을 말하고, '도'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성품을 따르는 것' 그리고 '교'는 '도'를 마름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중용'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평생을 갈고닦아야 하고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사이에서 방황해야 합니다. 그 균형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나마 그 '중심'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중용'이란 것이죠.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 사이에서, '중용'은 어떻게라도 아주 잠시라도 평행을 만들어내려는 우리네의 발버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동양에 '중용'이 있다면, 서양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사람의 심리를 3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바로 '이드(원초아)'와 '에고(자아)' 그리고 '슈퍼에고(초자아)'가 그것입니다. '원초아'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 욕구이고, '초자아'는 도덕적 양심을 말하는데 '자아'는 그 중간에서 외부세계에 맞추어 그 둘을 중재해야 합니다.
'원초아'와 '초자아'의 충돌은 언제나 일어나므로 '자아'는 녹초가 되고, 이것이 곧 우리 삶을 힘겹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즉, '자아'는 '원초아'와 '초자아'의 균형을 맞추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중심'을 잡기 위한 고군분투입니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중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경증'에 시달리거나 여러 가지 '정신적, 마음적'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 앞서 말한 '중용'과 비교를 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요? 단어만 바뀌었을 뿐, 그 내용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는 것입니다.
'중용'에서 말한 '인간적 욕심'은 정신분석학의 '원초아'와 같고. '중용'에서 말한 '도덕적 본성'은 정신분석학의 '초자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재를 맡은 고된 개념들이 각각 '중용'과 '자아'인 것이죠.
동양과 서양에서 복사, 붙이기를 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이 준 시소는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는다는 걸 현자들은 이미 파악을 한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이죠.
3. 호메오스타시스
한 가지 개념을 더 알아볼까요. 우리는 배가 고파도, 배가 불러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즉, 균형이 맞지 않은 상태인 것이죠. 그러나 배가 고프지도, 배가 부르지도 않은 그 상태를 떠올려 볼까요. 삶의 세월에서, 그러한 기분을 느낀 적이 얼마나 될까요? 아니, 얼마나 오래 느껴 봤을까요. 이제, 제가 말하는 '균형'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먹기 시작하면 배가 불러서야 그만두는 인간의 본성. 즉, 거듭 말하지만 삶은 '균형'맞추기의 반복이고, 그 '균형'은 '순간'적으로만 맞춰질 뿐입니다.
'호메오스타시스'는, Homeo(Same)와 stasis(to stay)의 합성어로 외부환경과 생물체내의 변화에 대응하여 순간순간 생물체내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 쉽게 말해 가장 알맞은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을 의미합니다. '생리학'에서 시작된 이 용어는 '심리학'에 연결되어, 우리가 마음의 중심 그러니까 '편안한 마음'이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쉽게 말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쉬고 싶고 또 너무 쉬면 일을 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죠. 삶의 균형 맞추기, 중심 찾기는 그래서 중요하고, 어렵고, 매일매일 추구해야 하는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도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시소에 앉아 있습니다. 누가 그 시소를 주었는지. 왜 우리는 시소를 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묻거나 따지고 싶지만 절대자는 우리에게 그럴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서 고개를 떨구고 먹고살아야 하는 생존에 힘을 써야 하고, 그러는 와중에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에서 평행을 유지하려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언젠가 드디어 맞이한 '중심'에서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잠시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행복'일 수 있고 '기분 좋음'일 수도 있으며, '편한 마음'이나 '짜릿한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내가 살아 있구나'란 존재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그 일련의 감정들에 우리는 (기분 좋게) 중독되어 또 그 '중심'을 향해 달려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동이나 생각들. 그 모두가, 각자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중심'으로 달려가기 위한 고군분투임을 잊지 말고 한 번 유심히 되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은 균형 맞추기라는 것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 균형은 내가 맞추어가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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