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망원동에 ‘강동원’이라는 중국집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정이었다.
진즉부터 유명한 가게였던 것 같은데 나는 이제야 그런 가게가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강동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선한 가을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친애하는 몇 사람과 함께 맛있는 중국요리에 고량주를 한잔 걸칠 계획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실제로 간판을 보니까 더 웃겼다. 강동원이라고 적힌 가게 간판을 핸드폰으로 연신 찍고 있는데 정과 이가 함께 도착했다. 안녕- 활짝 웃으며 다가와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앉는 정의 손에는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거기 왜 그래요, 다쳤어?”
내가 묻자 정이 웃으며 말했다.
“물렸어. 고양이한테.”
고양이가? 보통 고양이는 발톱이 먼저 나가는 동물 아니던가.
의아해하는 나에게 정이 말했다.
“내 말이. 아주 지가 개인 줄 아나 봐. 내 손을 그냥 콱 물고 안 놔주는 거야.”
그러고선 돌연 정은 표정을 바꾸었다.
“나 정말 아팠어. 손가락, 겨우 이거 물리는 게 얼마나 아프던지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나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니까. 옛날 옛적에는 산길 같은 데에서 짐승들한테 크게 물리고 그래서 죽는 사람들도 많았을 거 아냐. 아니 그 사람들은 진짜... 대체 얼마나 아팠겠냐고!”
정의 아픔을 조금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고양이에게 손가락을 물리며 갑자기 아득한 태곳적 인간 조상님들의 아픔까지 공감해버리는 저 심각한 얼굴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웃기고 귀엽다.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때 김이 도착했다.
김은 얼마 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을 썼다. 그 책은 놀랍도록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 관심과 사랑 속에는 나와 정의 몫도 포함되어 있다. 실은 강동원도, 선선한 가을 밤바람과 고량주도 모두 김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홀로 죽은 사람의 집이나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도록 쓰레기가 가득한 집을 치우는, 특수청소라고 불리우는 일을 하는 김을 직접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 처음이었다. 아무리 그 일의 단편을 책으로 확인했다고 해도 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동시에 그 일을 듣는 일이 조심스러웠다. 미리 사진 속에서 확인한 예민한 김의 눈매를 직접 앞에 두고 보자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는 김의 무거운 책을 아직 읽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지 쭈뼛거리는 정과 나보다 한결 산뜻하고 대담한 태도로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막 쓰레기가 쌓여있는 집 청소하러 가시면 속으로 부글부글할 때 없으세요? 솔직히 저는 좀 거기 사는 사람이 한심해 보일 때도 있을 거 같아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이의 말에 백번 동의했다. 게으른 사람은 정말 최악이야. 나는 내적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김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을 때도 조금 찡그려져 있는 김의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 분들이 막상 알고 보면 아주 꼼꼼하시거나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옥 같은 집을 치우다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세세하게 라벨링이 되어있는 수납장을 마주하기도 해요. 그런 것을 보면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예감이 조심스럽게 떠오릅니다. 대체 어떤 아픔이 있어 그런 단정한 일상을 다 놓아버리게 된 건지 저는 잘 상상이 안 되고… 또 마음대로 상상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곳을 청소하러 가면서 거기 살던 분들에 대한 일체의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결코 다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거기 깃든 아픔들이라는 것은... 제가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나는 김과 비슷한 사람을 얼마 전 본 적이 있다.
몇 개월 전 여름, 제주에서 한 전시를 관람했다. <거룩함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이름의 전시였다.
나는 거기서 방문객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노지귤을 조물락거리며 어떤 퍼포먼스 영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적이 있다. 고승욱이라는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영상 속에는 한 남성이 등장한다. 고승욱 작가일 것이다. 그는 어떤 공간에 찾아간다. 사찰 같다. 거기서 그는 커다란 기도용 초가 경건하게 타고 있는 함 속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다 타고 바닥에 눌러붙은 파라핀 조각들을 줍는다. 비닐봉투에 모은다. 그런 행동을 반복한다. 장소가 달라진다. 촛불집회가 한창인 시절의 광화문이다. 수많은 인파가 오고가는 인도 한켠 가로수에 빵빵한 채로 기대 세워져 있는 쓰레기봉투들을 그는 쓰러뜨린다.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집회 때 사용한 종이컵과 타다 남은 초가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그 초 조각을 줍는다. 비닐봉투에 모은다. 쪼그려 앉아 그 일을 반복하는 그의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다리들이 오고간다. 다시 장소가 바뀐다. 남성의 작업실 같다.
그는 주운 초의 조각들을 커다란 양동이에 붓고 그것을 한데 녹인다. 그리고 다시 초를 만든다. 그가 투박하게 만든 초는 아무렇게나 생긴 돌을 닮았다. 다시 장소가 바뀐다. 처음의 그 사찰이다. 기도용 초가 여전히 묵묵히 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초를 옆에 같이 두고 불을 붙인다. 버려진 익명의 각종 아픔들은 그렇게 모아져 하나의 불꽃이 된다. 그 아픔들이 정확히 어떤 아픔들인지 남성은 알지 못하고, 알 자격이 있지도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저 그는 아픔 자체에 붙어있는 숨에 다가갈 뿐이다.
나는 복잡한 아픔들에 주로 모른다는 말로 안전하게 대처해왔다. 빼어나고 노련하게, 그리고 예의 바르게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손사래도 치고. 뒷걸음질도 친다.
그 와중에 김이나 고승욱 같은 사람은 모르는 채로 가까이 다가간다. 복잡한 아픔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기어이 알아내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손을 내민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심보선 시인은 시는 두 번째 사람이 쓰는 거라고 했다.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거라고. 나는 부드러운 가을의 밤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김의 시를 들었다. 내 바로 앞에 김이 앉아있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내가 있는 곳과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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