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와 함께 국악과 대중 사이의 거리는 점차 멀어졌습니다. ‘우리 것’을 강조하거나 서양 음악과 융합을 펼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러한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죠. 그런데 최근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경험한 젊은 세대가 국악 뮤지션으로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리 음악을 대중에 선보였습니다. 국악을 대하는 대중의 온도는 점점 높아졌고, 이제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힙’하다는 평까지 듣고 있는데요. 광고 속 그 음악, 서른 두번째 주인공은 변화하는 국악의 정점에 서 있는 밴드 ‘이날치’입니다.
기존 국악에 의문을 제시한 모던 국악 뮤지션
이전까지 국악은 창이나 판소리 등 우리 고유의 것을 강조하거나 만인에게 익숙한 멜로디를 국악기로 연주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성은 특정 시기를 상징하는 ‘명절 음악’으로 인식되거나, 국악기의 정체성만 흐리는 애매한 결과를 가져왔는데요. 이날치, 잠비나이 등 최근 등장한 모던 국악 뮤지션들은 이러한 방법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국악의 이미지를 서서히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2019년 11월 30일 의정부 아트캠프에서 열린 단독 공연 (출처 : 이날치 공식 인스타그램)
이날치는 프로젝트 밴드 ‘씽씽’의 음악감독이자 베이시스트인 장영규와 권송이, 신유진, 안이호, 이나래 등 4인의 소리꾼이 만든 밴드입니다. 밴드의 이름인 ‘이날치’는 조선 후기 명창 중 한 명인 이날치(李捺治)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들은 2018년 ‘별주부전’을 판소리로 만든 ‘수궁가’를 모티브로 한 음악극 ‘드라곤킹’을 작업하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서로 좋은 느낌을 받았던 이들은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시스트였던 정중엽과, 장영규와 함께 ‘어어부밴드’와 프로젝트 ‘씽씽’에서 꾸준히 활동했던 드러머 이철희가 합류해 아예 공식적으로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게 됩니다.
창과 사이키델릭으로 낯선 판소리의 탄생
이날치에서 소리꾼으로 활약하고 있는 네 명의 멤버는 모두 국악 음악가로서 큰 성취를 이루기도 했지만, 이전부터 국악과 양악을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뮤지션입니다. 장영규 역시 ‘황해’와 ‘부산행’ 등 다양한 영화 음악과 불교 음악, 가면극 등에 도전해왔으며 프로젝트 ‘씽씽’을 통해 국악과 팝/록을 접목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충분히 경험한 베테랑 뮤지션이었죠. 이 때문인지 이날치의 음악에는 단순한 국악과 서양 음악의 만남을 넘어 판소리와 사이키델릭, 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2019년 5월 18일, 한남동 언더스테이지에서 데뷔 공연을 한 그들은 다양한 페스티벌 무대에서 ‘낯설게 하기’ 이론을 소리로 빚어낸 듯한 음악을 대중에게 선보입니다.
이 노래는 2020년 2월에 발매된 싱글 ‘호랑이’와 지난 5월 발매된 정규 1집 ‘수궁가’에 수록된 <신의 고향>입니다.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중중모리 같은 리듬의 수궁가 한 자락이 흐릅니다. 자기를 속이고 도망친 토끼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자라의 절절함이 랩 같기도 노래 같기도 한 판소리를 통해 전해지는데요. 기존의 판소리 한마당이 리듬을 담당하는 고수와 소리꾼으로 이루어진 것을 재현하기 위해 드럼과 베이스만으로 악기를 구성해 기존 밴드와는 사뭇 다른 묘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범 내려와 춤을 만나니, 대중 속으로 푹 스며들었네
이들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그들의 음악에 춤이 더해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치는 네이버 ‘온스테이지 2.0’에서 춤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 <범 내려온다> 라이브 클립을 선보였는데요. 이것이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국악 힙스터’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사모관대와 전통 의상, 모호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퍼포먼스는 자라가 ‘토선생’을 ‘호선생’으로 잘못 불러 호랑이가 내려오는, 이른바 ‘무섭게 웃긴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리듬을 탄탄히 다지는 정중엽의 베이스와 이철희의 드럼, 빈 곳을 채워주는 장영규의 또 다른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에 판소리 수궁가가 얹혀진 재미있는 한 막은 무려 5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는 가사의 의미가 궁금하다는 외국 팬들까지 생겨났을 정도이죠.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는 얼마전 공개된 한국관광공사의 광고를 통해 ‘국악’이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얼마나 힙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광고를 본 사람들은 ‘이 광고에 이날치 섭외한 사람 상 줘야 한다’며 폭풍 칭찬 세례를 퍼부었죠. 서울과 부산, 전주의 명소를 담은 영상은 도합 3억뷰 달성을 눈 앞에 두고 있으며, ‘어서 다른 도시의 홍보 영상을 내놓으라’는 귀여운 협박의 결과로 강릉, 안동, 목포의 명소를 담은 후속편은 10월 14일 업로드된 후 유튜브에서 인기 급상승 중입니다.
‘국(國)’자의 경계를 허문 국악 뮤지션
모던 국악 뮤지션들은 굳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악’과 ‘국악기’에서 ‘국(國)’자를 과감히 떼어 버렸는데요. 이들에게 국악기와 창은 ‘국악’을 노래하는 대신, 전 세계 공통 언어인 ‘음악’을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갈고 닦은 판소리와 국악기 실력으로 음악을 만들고 즐길 뿐, ‘국악’이라는 장르를 규정하지 않다 보니 대중 역시 그것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게 되었죠.
특히 이날치는 소리꾼과 고수의 조합이라는 클리셰와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서양 음악 전통의 밴드 구성을 깨고 베이스 2대와 드럼, 소리꾼으로 밴드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인상을 남겼는데요.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는 물론, 전 세계의 힙스터들을 그들 앞으로 끌어모았습니다.
‘순수’와 ‘전통’도 좋지만, 때로는 과감한 파격이 더욱 우리 것들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모던 국악 뮤지션들은 BTS와 함께 거론되며 우리 나라의 문화를 알리는 문화 첨병으로 당당히 한국을 알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이날치가 오르기로 한 페스티벌과 공연 무대가 모두 취소되면서 온라인에서만 만날 수 있었는데요. 하루빨리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라지고 넓은 잔디밭 무대와 라이브 클럽에서 그들의 퍼포먼스를 즐길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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