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6일, 스위스 중부의 아름다운 호반 도시 루체른(Lucern)의 한 공연장에 조금 이색적인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하나둘씩 무대 위로 입장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LFO) 단원들. 이윽고 프란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제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gro moderato)가 연주됩니다. 하지만 어딘지 허전한 느낌입니다. 응당 포디움 위에 올라 있어야 할 지휘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휘자 없는 관현악 연주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잠시 이날 현장의 모습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 Copyright@Peter Fischli (출처: 도이치 그라모폰)
사실 이 콘서트는 같은 해 1월 타계한 루체른 페스티벌의 음악감독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2014)를 추모하기 위한 콘서트였습니다. 단원들은 지휘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둔 채, 마치 아바도의 영혼이 자신들을 지켜본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합니다.
뒤이어 생전 아바도의 절친이었던 독일의 대 배우 브루노 간츠(Bruno Ganz)가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의 시 빵과 포도주(Brot und Wein)를 낭송합니다. 간츠는 영화 『몰락(Der Untergang, 2004)』에서 신들린 히틀러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로도 유명하지요. 낭송이 마무리되자 아바도와 수차례 협연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벨 파우스트(Isabelle Faust)가 무대에 올라 알반 베르크(Alban Berg)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합니다. 이 곡엔 “어느 천사를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마지막 순서엔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Andris Nelsons)가 무대에 오릅니다. 그는 단원들을 이끌고 아바도가 즐겨 연주했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3번의 마지막 6악장을 연주합니다. 말러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이 악장이 한창 연주되고 있을 때, 단원들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아바도의 부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인지 짐작되는 순간입니다. 그 진심을 알아챈 객석의 관객도, 그 영상을 보고 있는 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릅니다. 연주가 끝난 뒤에도 공연장엔 박수와 환호 대신 긴 정적의 시간이 흐릅니다. 이날 콘서트 프로그램은 아바도가 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아직 그가 ‘음악’으로, ‘언어’로 그리고 ‘침묵’으로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한 추모 공연이었습니다.
‘추모’라는 성격만 제외한다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공연은 사실 여러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보다 이 아바도라는 지휘자를 추모하기 위해 유럽 각지의 최고의 연주자가 특별히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브루노 간츠나 이자벨 파우스트 같은 거장은 물론 이 오케스트라 멤버가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사실 굉장한 일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생전 아바도가 이끌었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루체른 페스티벌을 위해 조직된 비(非) 상설 오케스트라입니다. 다시 말해, 축제 기간에만 모여 함께 연주하는 임시 오케스트라이지요. 그런데 이 ‘임시’라는 말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연주자들이 모였다고 생각하셨다면 크나큰 오해입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일종의 올스타팀 같은 성격을 갖는 악단으로, 베를린, 라이프치히, 빈, 런던 등 유럽 각 도시 최고 명문 오케스트라의 수석급 연주자 그리고 솔로로 활동하고 있는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주 스케줄은 이미 수년 치가 빡빡하게 잡혀 있을 정도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오로지 한 지휘자를 추모하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루체른으로 집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바도라는 사람은 생전에 도대체 어떤 지휘자였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그의 부재를 슬퍼하고, 그와의 기억을 반추하려는 것일까요?
밀라노 음악계의 금수저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33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대표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은 음악 학교와 오페라 극장 요직을 두루 맡으며 밀라노 음악계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영향력을 지녔다고 전해집니다. 엄청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탓에 아바도는 어려서부터 여러 거장의 연주를 직접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덕분에 성인이 되어 지휘자 길을 걷게 된 이후에도 곡의 해석에 대해 논쟁이 붙을 때마다 그가 “제가 직접 누구누구(주로 20세기 초의 전설적 거장)의 연주를 들어 봤는데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논쟁이 금세 끝나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본인의 재능도 워낙 천재적이었습니다. 주요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젊은 지휘자로 주목받기 시작한 아바도는 이후 이탈리아와 미국을 오가며 세계적 지휘자로 성장해 나갑니다.
▲젊은 시절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거장으로 손꼽히게 된다. (출처: Le Devoir)
이런 아바도 인생에 일대 터닝 포인트가 마련된 계기는 베를린 필하모닉(이하 베를린필)의 종신 음악 감독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타계였습니다. 1989년도, 그러니까 아바도의 나이 56세 때의 일입니다. 베를린필은 악단의 전통에 따라 단원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적 투표로 차기 지휘자를 선출했는데, 쟁쟁한 후보들과의 경쟁 끝에 아바도가 선출된 것입니다. 악단 역사상 첫 이탈리아인 음악 감독이었습니다. 아바도는 주저 없이 베를린 행 티켓을 끊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아바도의 인생에 수많은 파고를 가져오게 됩니다.
권위주의형 지휘자 전성시대
아바도 이전, 그러니까 20세기 중, 후반까지 베를린필의 명성은 가히 절대적이었습니다. 당대 가장 많은 음반과 영상물을 취입한 악단이기도 했지요. 한마디로 예술과 상업 두 측면 모두에서 세계 제일의 고지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카라얀이라는 불세출의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이 악단은 근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카라얀 1인 독재 체제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단원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사실상 악단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라는 별칭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카라얀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 당시 많은 지휘자의 스타일이 독재자에 가까웠습니다.
카라얀보다 한 세대 전 최고의 지휘자로 손꼽히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도 대표적인 독재형 지휘자였습니다. 워낙 다혈질로 유명해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단원이 눈에 보이면, 독설 아니 욕설도 서슴지 않던 지휘자였습니다. 심지어 연습 도중 물건을 집어 던지는 일도 흔했는데,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 팬이 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해 주었는데 상자엔 시계가 2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값비싼 금장 시계였고, 다른 하나는 비슷해 보이지만 좀 싸구려 티가 났습니다. 후자엔 “연습용”이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런 지휘자를 용인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만, 그 시절엔 ‘실력만 있다면’ 이런 지휘자들의 악습관도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휘자의 권위와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인정받는 시절이었습니다. 덕분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졌죠. 사실 그러지 못하는 단원들은 무대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당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일반적인 관계였습니다. (군대를 제외한 민간인들의 직장 중) 가장 경직된 ‘수직적 조직문화’ 구조를 가진 곳이 바로 오케스트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카라얀의 유산과 싸우다
1989년 아바도가 베를린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에도 베를린필은 카라얀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보수적이고, 경직된 베를린필에 아바도는 처음으로 ‘민주적 방식’의 지휘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카라얀의 그늘 아래서 그의 지시와 명령에 일사불란 하게 따르던 단원들에게, 아바도의 지휘 스타일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바도가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은 호칭 변화였습니다. 헤어(Herr, 영어 Mr.에 해당하는 독일어 남성 존칭) 마에스트로라는 경(존)칭 대신 “나를 클라우디오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한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아바도는 단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들의 의사를 반영해 곡을 연주했습니다. 악보의 자그마한 지시사항 하나만 어겨도 불호령이 떨어졌던 토스카니니나, 자신의 지시를 금과옥조로 삼았던 카랴얀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지요. 단원들은 자신을 ‘연주 기계’가 아닌 한 ‘인간’으로 존중해주는 그의 인품에 매료되었고, 이런 아바도와 베를린필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좋게 말하면 지휘자의 명확한 지시를 선호해왔던, 나쁘게 말하면 시키는 대로 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던 단원들에게 아바도의 지휘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리허설 도중 단원들과 토론하고, 논쟁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리허설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고, 단원들은 이런 지휘자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에 이릅니다. 게다가 아바도가 부임하면서 시도했던 현대음악 등의 새로운 레퍼토리가 관객과 음반사의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단원들의 수입도 덩달아 줄어들게 되지요. 참고로 카라얀 재직 시절, 단원들은 음반 저작권료와 전 세계 순회 연주 등으로 본봉의 수배에 이르는 수입을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마에스트로는 혁신을 원했지만 단원들과 관객 그리고 음반사는 전통을 고수하길 원했습니다. 이런 첨예한 갈등 속에서 단원들, 그리고 언론 및 비평가들과도 불편한 관계 속에 있었던 아바도는 계약기간을 무려 4년이나 남겨둔 1998년, 돌연 재계약 불가 선언을 하고 사임 예고를 했습니다.
덕분에 베를린필 단원들은 전임 지휘자가 사망한 다음에야 후임 지휘자를 뽑던 관례를 깨고, 전임 지휘자가 멀쩡히 살아있는 가운데 후임 지휘자를 다시 뽑게 됩니다. 급진적인 민주화, 혹은 혁신이 조직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생긴 비극이었습니다. 권위주의에 이미 익숙해진 단원들에게 아바도의 민주적 리더십, 수평적 조직문화 실험은 사실상 실패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바도는 2000년 위암 판정을 받고, 노령의 나이에 수술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민주적 리더십에 대한 그의 철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항변합니다.
“어떤 지휘자들은 독재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전부다.”
독재가 쉽고 효율적인 조직 지배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어렵고, 먼 길을 돌아갔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휘, 지배가 아니라 ‘잘 듣는’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은 잘 배우지만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음악은 듣는 방법에 대해 가장 잘 알려줍니다.”
예술가가 창조해낸 작품이 그의 철학에 기반한 것이라면, 이토록 아름다운 삶과 예술에 대한 철학을 지닌 사람이 빚어낸 작품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이런 그의 진심이 동료 연주자들과 대중들에게 전달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리더십
2002년 마침내 베를린필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내려놓고 자유인이 된 아바도. 마음의 짐을 벗어버린 탓일까요? 그의 표정은 한결 밝아지고 언제 암 투병을 했냐는 듯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무대로 돌아온 아바도 곁엔 그의 인품을 흠모한 수많은 연주자가 모여듭니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말씀드린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였죠.
아바도가 새롭게 재조직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노구(老軀)의 지휘자가 마음껏 자신의 음악적 이상향을 구현할 수 있었던 동반자였습니다. 세계 유수 악단의 악장과 수석급 연주자 그리고 솔로이스트들이 이 페스티벌에서 아바도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스위스 루체른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비록 베를린에서의 실험은 썩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음악가가 그의 예술성과 인간성을 흠모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루체른에서 그와 함께 연주했던 한 단원은 이런 얘기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음악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묘한 모순이지만 정말로 그래요. 제가 경험했으니까요. 오케스트라에 있으면 그가 음악이 알아서 연주되도록 만드는 것 같아요.”
(*황장원, 명지휘자 열전 <클라우디오 아바도>에서 인용)
많은 저항에 부딪혔지만, 만년에 이르러 그의 따뜻한 민주적 리더십은 끝끝내 빛을 발해 말러(Mahler) 교향곡 전곡 레코딩(*8번 교향곡은 건강 악화로 끝끝내 녹음하지 못했음)과 같은 아름다운 예술적 성과를 남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 오해와 편견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만의 철학을 견지했던 아바도의 민주적 리더십은 오늘날 음악계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지휘자도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성을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엔 상상할 수 없던 지휘자와 단원 간의 자유로운 소통이 이제는 보통의 일이 된 것이지요.
아무리 권위와 힘으로 상대를 지배하려 할지라도,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그는 오랜 세월에 거쳐 온몸으로 증명해 낸 셈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를 한 사람의 예술가이자 지도자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연주자가 그를 가리켜 ‘나의 아바도, 나의 마에스트로’라고 이야기하는 까닭입니다.
끝으로,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아바도의 민주적 리더십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수평적 조직문화가 화두인 요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瞻也.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如七十子之服孔子也.
– 孟子 公孫丑章 中
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속으로부터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힘이 모자라서 올려다볼 뿐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 기뻐하며 참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70명의 제자가 공자를 따름과 같다.
-맹자 공손추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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