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은 끊임없이 현대답게 변화해야만 하는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그동안 숨바꼭질에 성공해왔다. 그곳의 한 불법 창고를 개조해 만들어졌다는 어반 스페이스 오디세이(USO)가 자리한 골목에 처음 가보았을 때 아래로 서울역, 위로 충정로역이라는 막강한 현대 사이에서 여긴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과거로써 고스란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경사지고 좁은 골목길 모양 따라 길고 단정하게 지어진 어반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매거진과 도서뿐 아니라 각종 도시적이고 감각적인 콘텐츠를 종횡무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마치 종이 매거진이 공간화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더불어 그 공간 안에서는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다정히 부르는 모임들이 소소하고 꾸준하게 이루어지는 중이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그 모임의 호스트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이곳에서 7, 8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재밌게 해볼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어반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공동창설자 박지호 씨가 미팅 중 내게 물었다.
“일단은 뭘 같이 읽어보는 독서 모임이 떠오르기는 해요. 근데 그간 읽어보지 않았던 것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이를 테면요?”
“네? 아니 뭐, 희곡이라던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흔하지 않은 장르를 생각하다가 즉흥적으로 떠오른 것을 그냥... 그런데 지호 씨는 그런 나의 대책 없음을 턱 하고 물었다.
“오, 희곡이라, 그거 재밌겠네요. 그럼 잘 준비해주세요!”
이제 대책이 필요해졌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러모로 희곡 읽기는 흥미진진할 것 같았다. 각자에게 배역을 부여하고, 자신이 맡은 인물이 되어 소리 내 대사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감정이입이 되면서 목소리뿐 아니라 다른 몸의 영역도 반응할 것 같았다. 드라마나 영화,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들이 다 같이 모여 미리 리딩을 해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것도 같았다.
다만 문제는 그 자리에 참석할 사람들뿐 아니라 호스트인 나까지도 꼼짝없이 미숙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그 자리에 전문가가 한 명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한동안 소원하게 지낸 연극배우 Y에게 오랜만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희곡 자체를 많이 읽어보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나는 Y의 도움으로 극작가이자 배우인 윤성호 님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이라는 희곡집을 읽게 되었다.
책 속에는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시대비평」을 만드는 잡지사가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거듭 잊히고 있는 「시대비평」은 이제 망하는 일만 앞두고 있다. 그곳에 마지막 안간힘처럼 광고계 출신의 새 편집장이 부임한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안톱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우리 실정에 맞게 재탄생한 잡지사 사무실이라는 공간을 외롭고 힘들고 슬픈 7명의 사람이 분주히 들락날락하며 각자 분명치 않은 대상과 고독하게 분투한다. 이 희곡집을 읽으며 나 역시 망하는 일만 남은 어떤 공간에서 일했던 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십 대 초반, 서울 수유리의 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밤이면 휘청거리는 젊은이들이 흔하게 넘치는 유흥가에 위치해 있는데도 그 술집만은 하루에 두세 테이블이나 올까 말까 했다. 나는 거기서 대체로 멀뚱하게 서 있거나 뜻 없이 테이블 사이를 오가거나 하며 나에게 할당된 시간을 버티다가 가끔 실수로 들어온 손님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 가게 안을 채우는 망조의 공기에 질겁을 하고 다시 나갈 때 깍듯하게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하고 말하는 일을 했다. 정말 가끔 어떤 손님들은 나가지 않고 선의와 연민으로 무장한 채 자리를 잡고 앉기도 했다. 그것은 다행스러우면서도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손님이 앉으면 내가 각종 게임도구가 들어 있는 카트를 끌고 다가가 그들과 기괴한 내기 게임을 하면서 주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왜 주문을 그런 식으로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나의 일이었다. 내기 게임이므로 승자도 패자도 벌칙도 있었지만, 아무도 욕망하지 않는 가운데 썰렁하게 벌어지는 내기란 그저 모두를 천천히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매니저에게 제발 이 거지같은 주문방식을 그만두자고 사정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한숨만 쉴 뿐이었다. 혹시 사장이란 사람은 이 내기 게임이 망해가는 가게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결국 나는 도망치듯이 그 일을 그만두었다.
하필 떠오른 것이 술집 알바 시절이라서였는지 다 읽고 나자 자연스레 술이 당겼다. 서둘러 캔맥주를 따서 홀짝거리며 처음 보는 사람들과 무릎을 모으고 둥글게 앉아 쓸쓸하게 이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세션 당일 나와 Y는 한 시간 정도 일찍 만났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안부도 묻고 근황도 묻고 행사를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는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원작자인 윤성호 작가님도 자리에 함께 해주셨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지만 이 희곡을 쓴 당사자인 만큼 행사가 지루하거나 뻘쭘하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도 덩달아 극심해졌다. 그리고 내가 긴장할 때마다 그렇듯 필요 이상으로 쾌활해졌다.
나는 간단하게 Y와 윤성호 작가님을 소개하고 희곡을 어떤 방식으로 다 같이 낭독하게 될 것인지 설명했다. 세션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다 같이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극배우 Y만 낭독을 한다는 줄로 알고 그저 그것을 편안히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당황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정확히 알기 어렵기도 했고, 그때의 내가 너무 쾌활했기(긴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 그럼 프롤로그부터 읽어보기로 할까요! 먼저, 새로 온 편집장인 ‘서상원’이라는 인물, 읽어보고 싶으신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윤성호 작가님을 연신 의식하면서 의식하지 않는 척을 하느라 숨이 찼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때 Y가 말했다.
“뭐, 처음이니까 그냥 앉은 순서대로 인물을 담당해서 읽어보죠. 그러다 다음 장에서는 인물을 서로 바꿔도 보고요.”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인물의 대사를 주춤거리며 읊기 시작했다. 다행히 조금씩 조금씩 읽어갈수록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내 예상대로 몸을 쓰기 시작했다. 미간을 쓰고, 손을 쓰고, 기쁨이나 아쉬움이나 분노를 표현할 때 더 적극적으로 호흡을 활용했다.
중간중간 배역을 바꿀 때도 처음에 비해 한결 용기 있게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적당한 배역을 권유하기도 했다. 어떤 분이 나에게 ‘장샘이’라는 인물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등장인물 중에 가장 어린 캐릭터였다. 내 목소리는 20대가 되어보려고 톤이 더 높아졌다. 극은 점점 ‘위기-절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온 사람 중에는 신봉수라는, 나의 오랜 팬이자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가 낭독하는 느리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극 중 체념적 인물인 ‘박용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4막 2장을 읽을 차례였다.
“봉수 씨, 이번 장은 봉수 씨가 ‘박용우’를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봉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용우의 대사들을 읊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요?
신봉수가 이 대사를 읽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다. 연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배우의 것이 아닌 날 것의 억양이 더 놀라운 현실감을 준다는 걸, 그리고 그 어떤 코미디보다 더 큰 웃음도 선사해준다는 걸 신봉수가 보여주고 있었다.
알잖아요. 누군가와 같이 안고 있는 기분.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황폐해요. 아무도 없어요. 이젠 브래지어 푸는 방법도 잊어버린 것...
이어지는 박용우의 대사를 신봉수가 진심을 다해 읽어나갈 때, 우리 모두는 웃느라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짐짓 의젓하게 앉아만 계셨던 윤성호 작가님께서 막판에 눈치 없는 ‘조형래’ 역을 맡아 김광진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을 부르며 오늘의 세션은 대성공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신봉수와 홍대까지 걸어왔다. 어떻게 그런 연기가 나왔냐고 내가 놀라워하자 신봉수는 요즘 정말 외로웠다는 의외로 간단한 대답을 내놓았다. 극 중 인물의 마음에 자신을 담아낸 그의 얼결의 용기에 나는 감명을 받았다. 신봉수도 역시 다른 사람들을 보며 같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어쩜 그렇게 다들 연기해 본 적도 없으시면서 잘하시던지, 진짜 놀랐어요. 배우처럼 다듬어진 톤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뭔가 더 정말 같았어요. 아까의 우리들을 보자니 예술이란 것이...”
나는 그의 말을 이었다.
“참 흔한 거였어요.”
“맞아요.”
선선한 여름밤 공기 속을 천천히 걸어 홍대입구역 근처 마을버스 앞에서 신인 배우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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