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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때문일 것이다. 세계화보다 무서운 건 동기화가 아닐까 하는 명제가 난데없이 떠올랐던 것은. 몇 번째 스마트폰을 교체하다 보니 스마트폰 의존도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수첩도 없어지고 메모도 폰 속으로 들어가고 모든 기억들이 블랙홀처럼 스마트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맥루한의 말처럼 감각의 연장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의식의 이동이 진행 중인 것 같다. 오늘도 안드로이드 앱들은 집요하게 나의 뒤를 캔다. 좋아하는 노래가 뭔지, 좋아하는 야구팀이 어딘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오늘 운동량은 충분한지, 식사량은 오버하지 않았는지… 걱정하고 조언하고 수시로 참견을 일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의 스토킹을 비난할 수가 없다. 애초에 내가 구글에게 모든 걸 내던졌기 때문이다. 구글은 나에게 한 번도 구걸한 적이 없다. 늘 그렇듯이 의연하고 점잖게 나의 의사를 존중하고 기다린다. 내가 유혹에 못 이겨 그에게 나를 던지기로 계약한 것뿐이다. 나는 이미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에 이끌려 스마트한 디지털 인간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그들은 냉정하다. 늘 받은 만큼 준다. 그리고 나를 더 갖다 바치면 바칠수록 젖과 꿀이 흐르는 온갖 정보를 날라다 주고 그들의 낙원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세밀하게 유혹한다. 그리하여 나의 하루는 이제 그들의 알고리즘 속에 갇혀 버린다.

주고받음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갖고 있다. 일종의 운동 법칙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늘 주는 것이 먼저다. 받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받은 것이 먼저지만 대부분의 문화는 주는 것을 먼저로 친다. 주고 받음이고 기브 앤 테이크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하지 않은가) 하여간 이 원리를 심연 속에서 건져 올린 이는 구조주의 문화인류학자라는 거창한 수식을 달고 다니는 레비스트로스다. 레비스트로스식으로 말하자면 증여와 답례는 인간사회를 계속 존속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이르게 만든 본질적인 장치다. 이 위대한 인류학자가 발견한 진리 중 하나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족의 형성에서도 바로 이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친족의 형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 없이는 어쨌든 지금 누구도 여기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한 남자가 여자를 손에 넣으려면 다른 남자로부터 그 딸 또는 자매를 양도받는 형식 외에는 없다는 것인데- 전쟁은 친족 형성이라기보다는 폭력적 수탈에 가깝고 그것은 복수의 무한반복을 낳는다- 이것은 문명사회에서나 야만사회에서나 마찬가지의 원리로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적 시각은 별도로 레비스트로스의 논지로만 보자면) 그렇게 증여에 의해 친족이 형성되면 받은 사람은 답례를 통해 불균형 혹은 부채를 해소하고 그 답례는 또다시 부채가 되고… 결국 주고받음의 무한 반복-대체로 얽히고설켜 진행되지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 사회를 존속시킨 비밀(?)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발명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상부상조라는 얘기인데, 더 나아가보면 이타적 행동이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전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오호, 이거 참 만물의 영장다운 발상 아닌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다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본다. 그런데 어쩌려고 이젠 기계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세상이 되었는지… 헛웃음이 나오다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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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