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처럼 산 것 같은 느낌을 준 어느 하루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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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 끝을 짓누르며 가슴 위쪽으로 이물감이 치밀어 오른다. 속쓰림은 면도칼로 찾아온다. 보지 않아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내 얼굴을 떠올리며 주섬주섬 자리끼를 찾는다. 새벽까지도 몇 시간 남았다. 혹시나 하고 약통을 뒤졌지만 비슷한 약도 없다. 며칠째 약을 사 둔다는 걸 잊은 벌이다. 과음과식. 그것도 의사가 먹지 말라는 것들만 간추리고 모아서 먹어댔으니 할 말이 없다. 

먹으면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고 하면 의사는 뭐라고 할까. 역류성식도염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다. 류마티스성 관절염이라든가 테니스 엘보우 같은 이름보다는 얼마나 감정이입이 잘 되는 병명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갖고 있는 이 병에 괜히 자부심이 느껴진다. 병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걸까라는 상상을 하다 새벽에야 다시 잠이 들었다.

의사에게 전화가 온 것은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정도 지나서였다. 익숙한, 늘 다정하다고(어떤 사람에게는 좀 나른하다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생각되는 목소리였다. 젊은 사람이, 머리까지 좋은 젊은 사람이 목소리까지 저렇게 좋다니…갑자기 그의 아내가 누굴까 궁금해졌다. 전체적으로는 별 다른 이상은 없고… 콜레스트롤 지수도 조금 낮아졌고, 하지만 혈당이나 지방간 소견이 있는지라 식생활 주의하시고 운동 열심히 하셔야 한다는 권유였다. 

그리고 내시경 결과 위염증상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난 역류성식도염도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그 얘기를 하며 난 내가 의사와 잘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도 그 목소리 좋은 남자는 뭐라 뭐라 많은 말을 했는데… 난 운동을 좀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진지하게 하며 전화를 끊었다.

지난 해까지는 건강검진을 받은 후 그 다정한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올해는 전화로 결과를 듣자는데 아내와 난 이의가 없었다. 20년이 넘는 전통을 파괴하는 일이었지만 결정은 순식간이었고 만장일치(?)였다. 안 봐도 될 일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상의할 특별한 말이 없을 게 뻔했다. 특별한 게 있어도 그냥 모바일로 전달받아도 될 일이었다. 현대를 사는 사람답게.

회사를 나가려는데, 메시지가 하나 왔다. ‘카센터쪽에 수리비 40만원 입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답신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나는 메시지를 보낸 이 분을 모른다. 만난 적도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 분은 지난 일요일에 주차장에서 후진하다 내 차 범퍼에 흠집을 냈는데, 미안하다며 문자를 보낸 분이다. 나는 문자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수리비를 최소화 해보자고 했다. 그 분은 고맙다고 말하며 일요일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내 차 딜러와 상의해 카센터 쪽으로 수리를 맡기는 것이 최소화 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카센터 쪽의 계좌번호와 수리비를 그 분께 알려줬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됐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한번도 만나지 않고 사건은 종결됐다. 그 분이 궁금은 하다. 하지만 문자로 끝내도 될 일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답게.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 갑자기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가 떠오르다가, 전화 목소리의 의사가 혹시 레플리컨트 아닐까라는 불길한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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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