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기자냐? PD냐?
헤럴드의 뉴미디어 인스파이어(INSPIRE)를 런칭하고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분명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만드는 콘텐츠는 모바일 영상입니다. 여기에 기업 또는 기관과 브랜드 콘텐츠 협업을 통해 수익 모델도 만들고 있죠. 하지만 부모님은 왜 지면에 기사가 안 나오냐, 월급 받고 놀고 있냐고 묻습니다.
사실 저도 제가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저뿐 아니라 레거시 미디어(전통 언론)의 뉴미디어팀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동료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명확한 답을 전하기보다는, 제가, 그리고 우리 팀이 걸어왔던 이력을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미약했던, 그러나 의미 있던 시작
시작은 2015년이었습니다. SBS의 ‘스브스뉴스’가 한창 가능성을 보여준 그 시기. 모든 언론사가 페이스북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때였습니다. 제가 속한 헤럴드경제 역시 소셜미디어팀을 만들었는데요. 그 전까지 사회부와 산업부를 출입하던 저는 헤럴드 경제 페이스북 계정을 관리하고, 동시에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에 적합한 콘텐츠(카드뉴스와 같은)들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지면이나 포털과 같은 전통적인 플랫폼이 아닌, SNS 특성에 맞춰 독자와의 관계를 확장하는 일이죠. 현재 대부분의 레거시 미디어가 수행하고 있는 SNS 전략(저는 이를 관계확장형이라고 정의합니다. 독자에게 드립을 날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일보가 이 분야에서는 선두입니다.)입니다.
그러나 헤럴드경제는 충성도 높은 독자가 있는 레거시 미디어(보수언론과 진보언론)에 비해 SNS에서 확산될만한 매력, 정체성이 확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고유 콘텐츠 없이 자극적인 기사를 베껴 쓰는 이른바 페이스북 매체들을 따라 할 수도 없었죠. 어떻게든 새로운 시각을 가진 콘텐츠로 틈새시장을 공략해봤지만, 당장의 성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15년 말, 아예 헤럴드경제라는 이름이 아닌 새로운 브랜드로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비자가 가진 전통 매체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은 물론, 콘텐츠의 소재와 문법도 기존 매체의 그 것에서 자유롭게 가져보자는 의도였습니다.
▲ 이미지 출처 : HOOC 페이스북
당시 유행하던 일종의 스핀오프(spin-off) 형 매체쯤 될 텐데요. SBS의 ‘스브스뉴스’와 ‘비디오머그’가 대표적이고, 현재는 한국일보의 ‘프란’, CBS의 ‘씨리얼’ 등 다양한 레거시 미디어들이 스핀오프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했던 이름이 ‘HOOC’이었습니다. ‘헤럴드 오리지널 온라인 콘텐츠’의 약자이자, 사람들의 마음을 ‘훅’ 끌어당기겠다는 야심 찬 네이밍이었습니다.
새로운 이름만큼이나, 인적 구성과 콘텐츠 역시 헤럴드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6년 차였던 저와 후배 기자 2명, 그리고 영상을 만들 PD, 디자이너로 인력을 꾸렸습니다. 회사는 “헤럴드라는 이름에 안주하지 말고, 젊은 너희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사무실도 본사에서 떨어진 별도의 장소에 마련했죠.
콘텐츠는 영상 콘텐츠를 메인으로 잡았습니다. 2~3분의 짧지만, 인상적인 영상을 통해 모바일 소비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카드뉴스 역시 본격적으로 생산했습니다. 단순한 텍스트 기사가 아닌, 체험과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코너도 마련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한 HOOC의 본질은 “독자에게 친절한,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가치 있는 모바일 콘텐츠를 만들자”였는데요. 어려운 시사 이슈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일상에서 만나는 소재를 공감 있게 풀어내는, 그러면서도 지면이나 기존 인터넷 환경에서 하지 못했던 깊이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실제 HOOC이 지난해 1년 동안 실험했던 콘텐츠들은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한창 ‘포켓몬 고’ 열풍이 불었을 때 기존 언론사 중 가장 먼저 속초로 가서 페이스북 라이브를 진행했고,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가 화제가 됐을 때는 직접 해당 미용실을 가서 올림머리를 체험했고, 그 과정을 전달했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의 독자 역시 1년 만에 1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성장이 빨랐습니다.
전환, 그리고 인스파이어
그러나 스브스뉴스를 비롯한 대형 매체들의 벽은 공고했습니다. 여기에 관계확장형 전략을 구사하던 레거시 미디어들도 기존 색채를 벗은 스핀오프 형 매체들을 속속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1년 전에는 새로웠던 것이 순식간에 평범한 것이 됐습니다. 특히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수적인 수익 모델에 대한 고민도 커졌습니다. 편집국 내부 소속이 아닌 사내벤처 모델이다 보니, 자생적인 수익을 내고 싶었는데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닌, 콘텐츠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것. 국내에 터를 잡은 모든 미디어의 공통적인 고민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고민의 결과는 ‘생각의 전환’이었습니다. 모든 뉴미디어, 특히 레거시 미디어일수록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고, 정치와 사회를 주제로 잡고 있는 레드오션 시장에서 우리가 꼭 고군분투 해야 할까? 새로운 뉴스 포맷에 대한 고민, 부조리에 대해 맞서는 기자의 전통적인 역할도 좋지만, 모든 기자가 꼭 뛰어들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하고, 하고 싶은, 그러면서도 기존 레거시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영역에 뛰어들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지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주는 미디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름도 ‘인스파이어(INSPIRE)’라고 직관적으로 특정했습니다. 영감을 전달하는 방식은 지난 1년간 실험을 통해 성과가 증명된 영상과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텍스트 콘텐츠로 정했습니다.
특히 콘텐츠의 퀄리티에 우리는 주력했습니다. 짧게 소비되는 스낵 콘텐츠, 재미를 유발하는 바이럴 콘텐츠는 우리가 아닌, MCN 제작자들이 훨씬 강점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죠. 미디어니까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퀄리티있는 그러면서도 의미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상정한 ‘본질’이었으니까요. 결국 고퀄리티의 숏다큐(SHORT DOCUMENTARY) 영상을 통해 그 본질을 구현하기로 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약 3개월간의 준비 기간 동안 야근은 물론,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해왔던 영상의 수준을 넘어, 방송사에도 밀리지 않는 영상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인스파이어 페이스북
그렇게 2월 27일, 인스파이어의 첫 콘텐츠가 나왔습니다. ‘종이비행기 국가대표’라는 제목의 영상입니다.
국내 유일의 종이비행기 국가대표이자, 종이비행기를 통해 교육 사업을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인데요. 사실 이 청년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소개된 유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조명하는 방식은 종이비행기를 잘 날리는 사람들이라는, 신기한 시선이 전부였죠. 우리는 신기함을 넘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있는 도전정신에 방점을 두고 스토리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인스파이어가 일반적인 영상 제작집단과 다른, 수년간 취재와 기사 작성을 해온 기자들이 참여한 팀이기에 더욱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렇게 내놓은 우리의 첫 콘텐츠는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4,500여 개가 넘는 공감과, 25만 회가 넘는 조회 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1,700회가 넘는 공유가 페이스북 내에서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소비하고 끝나는 영상이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발적인 공유가 발생하는 콘텐츠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이후 우리가 내놓은 콘텐츠마다 수천 건의 공감, 특히 수천 건의 자발적 공유가 일어났습니다. 시각 장애인 화가를 다룬 콘텐츠는 6월 초 기준으로 2만 건이 넘는 공감과 5,000건 이상의 공유를 기록했습니다.
0에서 시작했던 페이스북 페이지는 3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1만4,000명의 팬을 기록했습니다. 비즈니스적인 면에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의미 있는 협업 제안들도 진행 중입니다. 특히 인스파이어를 통해 소비자에게 영감을 주고 싶은 브랜드들의 문의가 제법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넌 기자냐? PD냐?”라고 묻는 이들에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기자다”라고. 다만 전통적인 의미의 기자는 분명 아닙니다. 기자(記者)라는 뜻이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제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곳은 종이뿐 아니라, 영상이라는 그림입니다. 또한. 지속 가능한 미디어 모델에 대해 실험을 하는 차원에서 건전하고 떳떳한 수익모델에 대해 고민도 하고 있으니까요.
아직은 걸음마를 막 뗀 신생 미디어지만, 저, 아니 우리 인스파이어는 그렇게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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