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동안 계속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배구공에 이름을 붙여 친구로 만든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고독한 조난자처럼.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메모지를 뜯고 뻑뻑해져 가는 볼펜을 꾹꾹 눌러 쓰면서. 밀려오는 파도 위로 트렌드, 에지, 힙, 쿨, 같은 단어들이 페트병이나 빈 캔 쓰레기인 양 덩실덩실 떠밀려 왔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정직하게 해가 뜨고 무심하게 해가 지는 서울시 마포구 어딘가 모래톱엔 아르마딜로 같은 한 남자가 편지 쓰듯 ‘광고’를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현종 | HS애드 대표 CD(Creative Director)
1988년 LG애드 입사. HS애드 CCO(Chief Creative Officer)를 거쳐 현재는 HS애드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공 캠페인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으로 손꼽히며, 국내외 광고제에서 다수의 광고상을 받았고, 해외 광고제 심사위원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LG생활건강 ‘엘라스틴 했어요’는 샴푸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정의 과정을 통해 ‘머리는 피부다’라고 전 국민의 생각을 바꿔버린 캠페인이었으며, ‘엘라스틴 했어요’라는 카피는 샴푸가 아니라 화장품이라는 전략에 방점을 찍는 에센스였다.
2007년도에 선보였던 LG 기업 PR 명화 캠페인 광고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으며, 동서양의 명화에 LG 계열사 제품을 PPL 형식으로 배치하는 이색적인 기법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광고이다. 이현종 HS애드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광고의 기본적인 속성은 말도 안 되는 결합을 통해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며, 낯선 사물과 이미지들의 재배치를 통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가 더는 그 의미로서 존재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가진 질서를 흩뜨리고 부정하고 재구성하는 놀이라고 말한 바 있다.
LG 하면 떠오르는 이러한 역대 명(名) 광고 캠페인부터, LG OLED TV, LG SIGNATURE 등 LG의 하이엔드 브랜드 광고까지 이현종 HS애드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오랜 기간 LG 광고와 함께했으며, 이외에도 국내 최초의 닉네임 마케팅으로 기억되는 배스킨라빈스 '엄마는 외계인', ‘아이 앰 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광고 시리즈와 젊은 날의 연가와 같았던 올림푸스 ‘마이 디지털 스토리’ 시리즈 등 우리나라 광고역사에 남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광고인으로서 들어왔던 ‘도대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心 스틸러’라는 책을 통해 아낌없이 풀어낸 바 있다.
쉽게 씌여진 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_ 윤동주
HS애드 이현종 대표 CD가 마포구 공덕동 LG애드(현 HS애드)로 첫 출근을 한 것은 1988년입니다. 스물여섯 살. 지금 그의 아들과 같은 나이.
처음 미디어 부문으로 입사한 후 2년 정도 지나 카피라이팅 부문으로 지원했습니다. 미디어 부문에선 ‘이러다 사표 내겠다.’ 싶었는데 카피라이터를 하면서는 ‘그냥 쓰면 되잖아’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카피라이터는 넥타이 안 매고 다녀도 되고, 써 달라는 글줄 써 주면 되니까 어려울 거 없겠다 생각했다는 이현종 대표 CD.
학생 때 대학신문사에 있었는데 헤드라인 뽑는 재주는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매우 복합적인 캠페인을 하는 시대도 아니고, 누가 카피 써 달라면 써 주고, 디자이너가 그림 가져와 써 달라고 하면 써 주고. 그런데 할수록 이게 아니구나 싶어졌어요. 그때 기억은 야단맞고 천덕꾸러기 되고, 그랬던 기억만 납니다. 단순하게 봤는데 단순한 일이 아닌 거예요. 내 ‘사부’, 조봉구 선생(전 LG애드 부사장)에게 엄청 혼나고, 다시 써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이직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노력을 안 하니, 이 길은 네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편지를 써서 병 속에 담아 던지고 또 던지듯 쓰던 카피들. ‘그렇게 보내 봐야 소용없다, 그만 보내라.’ 사부의 만류를 들으며. 무슨 얘기를 써야 할지, 누가 이 편지를 받아 읽어 볼지 막막했던 청년 이현종 대표 CD는 1994년 해외 연수를 떠납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받아주세요…’ _ 고은
해외 연수 현장에서 카피라이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교감한 것이 계기가 됐는데요. 그때 눈이 떠졌습니다. ‘이게 광고구나’. 그 전까지는 그냥 쓰고, 지르고, 그랬어요.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그 ‘한 마디’의 미학. 감성적, 철학적 접근을 하는 광고인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됐죠. 한 마디를 뽑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면서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해외 연수를 통해 이현종 대표 CD는 깨닫게 됩니다. 병 속의 내 ‘광고’는 결국 언젠가 누구에게 가서 닿게 될 거야. 그는 이제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습니다. 더 잘하고 싶어졌고, 더 좋은 걸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인생에 있어 자발적 동기에 의해 그토록 푹 빠졌던 시기는 아마 또다시 없을 거예요. 눈을 뜨고 성장했던 시기랄까요.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훌륭한 광고가 많았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그냥 재미있고 알고 싶고 더 보고 싶어서 해외 연감을 번역하고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습니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죠. ‘이게 어디서 나왔을까?’, ‘이 광고인은 어떤 작업을 했나?’ 찾아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굉장한 공부가 됐습니다.
이현종 대표 CD의 작업은 곧 대중에게 LG를 각인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랑해요. LG’ 캠페인에 참여한 것은 그와 LG와의 긴 인연을 시작하게 된 첫 단추였습니다.
행운이죠. 상성이 잘 맞는 브랜드를 만나는 것. LG그룹 캠페인을 하면서 느꼈습니다. 광고인이란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지만 광고와 성정이 맞는다면, 남의 글이 아니라 내 생각, 내 목소리도 실을 수 있게 되는 거죠. 행복한 일치입니다. 나만의 목소리와 내 성정을 봐 주는 광고주가 있고, 그렇게 태어난 광고가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는 것은.
그의 ‘누구라도’라는 곧 대중이 되었습니다. 병 속의 편지처럼 그가 만든 광고들은 대중의 마음에 가서 닿았습니다. 최근 LG그룹 창립 70주년을 맞아 ‘LG 하면 떠오르는 역대 광고 카피’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현종 대표 CD가 참여한 광고가 대부분 상위권에 들었습니다. ‘사랑해요. LG’, ‘요만~큼,’, ‘라끄베르와 상의하세요’, ‘엘라스틴 했어요’, ‘가전, 작품이 되다.’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광고가 기억난다면 당신 또한 이현종 대표 CD가 써서 띄워 보낸 ‘편지’를 받아 본 셈입니다.
작가와 장인 사이
‘…작가는 이상을 좇는 사람, 장인은 완벽을 좇는 사람…’ _ 이현종
대단한 사명감보다는 그저 재미있어서 했어요. 웃고 떠들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그것이 먹혀들어갔을 때의 쾌감이 있으니까. 일이 재미있어 열심히 하다 보니 일이 늘고 좋은 광고주가 붙으면서 선순환이 이뤄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 일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끌고 가는 대로 달려가는데 그게 다행히 좋은 방향이었으니까.
그런데 제가 일에 미쳐 있던 30대에 가족의 헌신과 배려가 없었다면 그만큼 몰두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을 해요.
베일 같은 앞머리 사이로 비추는 눈빛은 여전히 호기심에 가득한데, 어느덧 일한 세월이 삼십 년입니다. 한 편의 광고가 어디로든 흘러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것을 집착 없이 소원하는 날들이었습니다. 모든 광고가 남다르겠으나 그래도 기억나는 광고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처음으로 ‘사부’에게 칭찬받은 광고가 생각나요. 낚시용품 브랜드 바낙스 광고였지요. ‘바낙스의 어머니는 자연입니다 / 바낙스의 아버지는 과학입니다’라는 카피를 썼습니다. 칭찬에 엄한 사부였고, 노력 안 하는 절 보고 이직 권유까지 하신 당신이 처음으로 ‘잘 썼다’고 해 준 문안이라 잊히지 않습니다.
대중이 그를 일러 ‘작가’라 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 그는 ‘장인’의 자리에 있습니다. 번듯함 직함이 주는 ‘왕관의 무게’를 거부한 채, 이현종 대표 CD는 여전히 현업에서 밤을 새워 일합니다. 그의 휴대폰 메모장에 차곡차곡 적혀 가는 짧은 문장들은 밀려오는 아이디어를 정돈한 하이쿠를 닮았습니다.
달콤하게 설탕 옷을 입은 권유와 반짝거리다 못해 눈이 멀 것 같은 유행들이 쉼 없이 밀려오는 광고의 바닷가에서 그는 그저 터벅터벅 모래밭만 보며 걷습니다. 작가도 장인도, 구루(guru)도 마스터(master)도 남이 보는 내 이야기일 뿐, 그의 시선은 항상 ‘본질’에 가 닿기를 바랍니다.
성향 자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본질을 탐구하는 것에 더욱 몰입하는 편이예요. 종종 동료들에게 ‘숙제를 풀지 말고 문제를 풀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광고주의 요구를 숙제로 받아들이면 정답에 집착하게 되죠. 정답을 보여 줘야만 하니까. 그런데 그걸 문제로 받아들이면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왜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일까, 왜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더욱 본질적인 부분을 보게 된다는 거죠.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를 항상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무가 새순을 틔우듯, 힘써 선하게
‘…버드나무의 새순은 백발이다. 나도 백발이다.’ _ 이현종
광고라는 건 일종의 ‘유사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예술과 광고는 비슷합니다. 말과 그림을 가지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모습이 닮았죠. 그래서 광고인은 항상 예술에 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가진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또 다른 작업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커뮤니케이션하더라도 조금 더 세련되게, 품위 있게 설득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이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교적이기보다 관점을 파는 일,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는 작업. 광고인은 광고로 사회에 참여해 좋은 영향을 미치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죠.
머리가 희끗희끗한 삼십 년 차 광고인 이현종 대표 CD는 나무가 새순을 틔우듯 힘써 세상에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가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나에게 사인(sign)을 주는 것들을 바라보고, 내가 겪은 일들에 자신의 본질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성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책을 읽고, 사회현상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광고를 만드는 모든 행위가 자기 성찰입니다. 이런 일들의 목적이 세상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닿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요.
세상이 바뀌었다고 모래톱 너머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아르마딜로를 닮은 광고인이 고개 들어 잠시 그들을 바라봅니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0.1초 만에 반하지 않으면 눈빛조차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들보다 빨리, 그리고 더 많이, 반짝이는 것들을 온몸에 붙이고 춤을 추라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모래밭 위의 광고인은 여전히 광고를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을 거고요. 동굴 벽에 그려진 소 그림이든, 아니면 구글 글라스로 비치는 VR 메시지든,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현종 대표 CD는 빙긋이 웃으며 ‘편지’를 곱게 돌돌 말아 빈 병에 넣고 코르크 뚜껑을 닫습니다. 그리고 힘껏 던집니다. 그의 편지는 밀려오는 파도에 실려 넌출 저 바다로 멀어집니다. 세상은 여전히 궁금한 것 투성이입니다. 생각할 것은 새록새록 하고 병을 던지는 팔의 힘은 던질수록 강해집니다. 오늘도 그는 광고인의 모래톱 위에 발을 딛고 두 눈 크게 뜬 채 아이디어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책 속의 이 한 마디
이현종 대표 CD 저서 ‘心 스틸러’에서 되새겨 보는 그의 목소리
‘광고는 어떤 관점에서 잊히지 않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이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기이며 어제까지 아무 관계도 없던 것들을 지금부터는 없어선 안 될 관계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 존재를 핵심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권력의지도 아니고 쾌락의지도 아니고 바로 의미의지이다’라고 말한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의 통찰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의미’를 산다는 것이다.’ _p.15‘사실 단순화한다는 것은 본질을 보자는 얘기고 본질을 보다 보면 오히려 큰 길이 보인다. 광고를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바로 이 단순화에 관한 문제다. 광고주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새끼인데 얼마나 예쁘겠는가? 그리고 광고란 것이 한두 푼 쓰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버릴 때 얻는 법이다.’ _p39
‘드디어 정답보다는 오답을 만들 때가 된 것이리라. ‘생활이 예술이 된다는 것’ 편에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러고는 우리 이웃들의 집에 TV가 있고 화장품이 있는 것이 뭐 그리 흥미롭겠냐며, 투덜댔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 부엌에 전자레인지 하나 놓지. 그게 훨씬 재미있잖아.” 광고의 기본적인 속성은 말도 안 되는 결합을 통해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매일 보는 현실을 보고 흥미를 가질 사람은 없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_p61
‘우리의 상상력이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여전히 인간의 깊은 욕망 속이어야 한다.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은 그대로이며 단지 시대마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스타일로 꿈틀댈 따름이다. 오늘 본 백화점 진열대의 모든 상품은 결국은 오늘 내 욕망의 분신들이다.’ _p96
‘그 길은 카메라는 카메라고, 본질은 기억의 저장고며,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였으니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었다. 차별화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사실 쉬운 말이다. 트렌드의 반대쪽을 보면 된다. “요즘엔 다들 하얀색 차를 몹니다”라고 누가 말하면 까만색 차를 몰면 된다. 그런데 이게 겁난다. 사람들은 무리에 속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법이니까. 니체의 말대로 균질화는 대중사회의 선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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