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5-06 : 광고와 문화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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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권 세 진 I 파이낸셜뉴스 유통부 기자
   sjkwon@fnnews.com

 
 
가정과 여성의 역할을
하나의 소재로 다룬 드라마,
<그 여자네 집>
 
 
 
“여성의 외모는 경쟁력이다”
광고업계를 2년째 출입하면서 새 광고가 나오면 장면마다 일일이 흠을 잡고 있는 나를 돌아보면서 ‘참 피곤하게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나는 어설픈 페미니스트다. 진짜 페미니스트들이 듣는다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여성의 지위나 역할에 관련된 일이라면 핏대를 먼저 올리는 사람이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나 선배들이 남편 얘기를 할 때면 혼자 먼저 흥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별히 남자한테 원한 맺힌 일도 없는데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습게 여기는 언행을 할 경우 참지 못한다. 아마 성격이 유별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여성들은 나를 화나게 한다. 그들은 대개 현모양처이거나 연애 또는 가족에만 관심 있는 여자이며, 소위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 여자들은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현실성을 크게 떨어
뜨린다. 광고업계를 출입하면서 유심히 지켜보게 된 광고 속의 여자들도 드라마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여성을 왜곡하는 광고 속의 여자들
예를 들어 최근의 한 광고는 나를 무척이나 짜증스럽게 했다. 주로 유머러스한
광고에 등장해 스타 대열에 올라선 광고모델은 광고 속에서 남자의 와이셔츠로
그들의 아내를 판단한다. 깨끗한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사원들은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깨끗하지 못한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사원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아내가 00제품을 쓰지 않아서 그렇다”며 무언의 비난(?)과도 같은 시선을 보낸다.
광고에서의 그 모델은 미혼인지 유부녀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미혼이 분명해 보인다. 찰랑거리는 생머리에 똑 떨어지는 정장차림으로 출근하는 그녀가 유부녀라면 과연 그런 소리가 나올까? 자신의 출근준비에도 바쁜 사람이 남편의 와이셔츠를 얼룩 하나 없이 빨고 다려서 입혀 보냈을까? 아니면 그녀는, ‘나도 결혼하면
남편이 동료 여직원에게 흠 잡히지 않게 매일매일 와이셔츠를 깨끗하게 빨아 입혀야지’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 광고를 만든 사람도 분명 남자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중 30대 초반 기혼여성들이 열광했던 드라마가 있다. 차인표와 김남주가 맞벌이 부부로 등장해 티격태격하는 내용은 기존의 드라마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밥을 해주는 것을 두고 시댁과 부부, 주변 사람들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너무 리얼해 여성들의 공감을 샀다고 한다. 아내는 당연히 남편을 위해 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 아내를 사랑하지만 밥을 안 해주는 점에 투덜거리는 남편, 같은 여자이지만 당연히 남자를 위해 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누나와 여자친구까지…. 드라마에서는 또 아내가 고민 끝에 생각해낸 냉동밥을 두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결혼한 친구나 선배들은 백번 공감한다며 열심히 드라마를 보았다.
밥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선보인 즉석밥 광고 때문이다. 이 광고에서는 초저녁부터 새벽에 걸쳐 할아버지와 할머니, 남편, 수험생 딸, 심지어 막내삼촌까지 시간대별로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있다. 물론 이 밥은 즉석식품이지만 어머니가 해준 밥과 맛이 똑같다는 얘기다. 그리고 덤으로 어머니의 수고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밥들은 다 누가 차렸단 말인가? 광고에서는 정작 어머니가 밥 먹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여성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에서 한 여성은 “새벽에 들어오는 막내삼촌에게까지 어머니가 김이 펄펄 나는 따뜻한 밥을 차려주란 말인가” 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제품의 이전 광고에서는 아내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아, 엄마가 해준 밥이 먹고 싶다” 라고 푸념하는 광고 속의 남편의 모습이 보여진다. 내 남편이라면 한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한 의료기 광고는 결혼한 여자의 삶의 기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젊은 여성과 어머니뻘 되는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다. 고부간의 갈등을 의료기로 해결했다는 내용이야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거기에 따라붙는 말이 “친정엄마에게도 해드리고 싶어요” 라니. 결혼한 여성은 무조건 시댁이 최우선이고 친정은 그 다음이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남자편과 여자편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한 카드광고도 약간의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향해 한번 떠나보라는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자 열심히 일하는 장면이 보여진다. 남자는 여러 명 앞에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듯하다. 그럼 여자는 무엇을 할까?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다. 물론 문서작성이 프리젠테이션보다 하급의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는 어딘지 남녀의 직장내 역할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뻔한 스토리’보다는 현실적 여성상 보여줘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 여자 왜 이렇게 삐딱해?’ 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사실 한 친구는 같이 TV를 보다가 일일이 토를 다는 내게 투덜이 스머프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광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광고를 볼 때마다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 섹스어필 광고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광고는 옛날부터 쭉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굳이 그런 광고들에 대해 반대할 생각은 없다. 미인·동물·아기는 광고가 성공할 수 있는 3대 요소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정에서 쓰이는 소비재의 경우 대부분 소비자는 여성일텐데, 제작진은 그런 메시지를 담은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는 아마 화목한 가정생활에는 여성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의 결과가 아닐까.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더욱이 요즘은 광고계에서도 여성인력과 그들의 파워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광고가 자꾸 등장하는 것일까.
물론 광고주의 마음에 드는 광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제작진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 또 광고는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한정된 시간 내에 많은 메시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스토리보다는 이미지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한다. 그러나 요즘의 광고는 예전처럼 ‘선전’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즉, 광고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는 구태의연한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긴 이것이 현실이긴 하다. 아직까지도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들은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남자를 받들고 뒷바라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나보다 불과 몇 살 많은 선배들도 결혼하더니 아들타령을 하고, 맞벌이를 하면서도 남편 밥을 챙겨주지 못해 죄인같이 기죽어 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런 현실이 진정 여성들이 원해서 생긴 현실은 아닐 것이다.

광고 속에서 일이나 사랑에서 만큼은 강한 여자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과격하기까지 한 그녀들의 모습은 때로는 젊은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이 가정으로 가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 앞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여자는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식품광고에서 자주 사용되는, ‘집에서 제대로 저녁 먹을 시간조차 없이 바쁜 남편을 위해 아내는 맛있는 반찬을 만들고, 전화로 이 얘기를 들은 남편은 집에 일찍 들어온다’는 뻔한 스토리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현실은 물론 광고 속에서도 내가 닮고 싶은 여자를 찾고 싶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하면 저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모델을 찾고 싶다. 만약 그런 여성모델이 등장하는 광고를 보면 그 제품이나 브랜드도 덩달아 좋아질 것 같다.
물론 내가 성격이 이상한 것일 수도 있고, 나 혼자만의 거부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까지 노처녀 소리를 들으며 솔로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광고 속의 여성들이 좀더 현실적이고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왔으면 하는 것이 광고를 사랑하는 기자로서, 또 한 여성으로서의 바람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