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w Data로 부리는 마술
하 희 정
미디어플래닝1팀 사원 / heejung@hsad.co.kr
미디어플래닝의 길에 접어들다
‘미디어플래닝이라는 길을 가겠다’는 마음은 마치 가을비 내리듯 천천히 찾아왔다. 방송 프로그램 사업자(Program Provider) 회사에서 인턴으로 지낸 지 6개월. 각종 케이블사업자와 방송국의 생리를 알아가며 미디어라는 세계에 차근차근 빠져들게 되었다. 다양한 분들을 만나며 커리어를 고민하던 도중‘ 미디어플래닝/바잉’이라는 분야를 발견했을 때,‘ 이것이야말로 내가 갈 길’이라는 느낌을 받게 됐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고 할까. 그렇게 공부와 준비를 하고 HS애드에 입사한 지, 이 글을 쓰는 오늘로 510일째.
처음 미디어플래닝에 대해 <광고론>의 내용을 읽고, 친구들과 스터디를 하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던 정보와 실제 현업에서 몸으로 느끼는 미디어 플래닝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중에서도 꼭 특기하고 싶었던 미디어 플래닝의 특징을 소회해 보고, 앞으로의 플래닝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도 조금 풀어보고자 한다.
미디어플래닝은‘ 크로니클(Chronicle; 연대기)’ 데이터다
미디어플래닝의 대부분을 뒷받침하는 것이‘ 데이터’라는 점에 대해선 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시청률’,‘ 비용 또는 예산’,‘ 시간’ 같은 숫자 데이터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플래닝팀에 들어와 선결 과제로 부여받은 것도 데이터를 정리하고 그로부터 인사이트를 추출해내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 특히 시청률 데이터를 많이 다루다보니 단순히 엑셀 계산만 잘 해서는 좋은 플래너가 될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 하나가 시간대별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그 데이터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느낀 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였다. 인화원 교육을 마치고 열의 가득한 마음으로 출근한 지 한 달 남짓. 시청률 계산 및 조사 프로그램인‘ 아리아나’의 사용 매뉴얼을 받아 한 부 복사본을 만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제 플래닝을 마스터할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 내게 사수가 던졌던 질문,“ 피벗 테이블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한두 번 만들어 본 내용이라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이내 단순히 합계 계산으로는 인사이트를 얻기 힘들다는 걸 깨닫게 됐다. 예를 들어 닐슨코리아(구 KADD, 광고비자료원) 사이트에서 경쟁사의 월별 광고비를 단순히 출력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캠페인 기간 중 언제 휴지기가 있었고, 소재는 어떻게 운용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캠페인 전체를 일정한 기간에 따라 바라보는 눈이 필요했다.
한편으로, 데이터가 허락하는 범위라면 원하는 지표를‘ 어떤 시점에서든 ’추출해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갈 수 있다’고나 할까. AGB닐슨의 아리아나와 TNmS의 인포시스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데이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과거 언제의 프로그램이든 시청률 등의 지표를 알아낼 수 있다.
이렇게 매일 쌓여가는 날것의 데이터들, 즉 로데이터(Raw Data)는 그 자체로는 소용이 없다. 미디어플래너들은 인사이트를 가지고 해당 데이터들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꿰어 작품을 완성한다. 개중에서 가장 놀랍게 느껴진 자료는 10년 이상 누적해 만들기도 하는‘ 광고비 SOV(Share of Voice)’ 리포트였다. 이 리포트를 보면 시간에 따라 해당 업계의 규모와 브랜드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숫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시야만 갖춰진다면 업계에서 명멸해간 여러 브랜드들의 모습이 마치 복잡한 천체 별자리처럼 그려진다.‘ 연대기(Chronicle)’라는 단어처럼, 미디어 플래닝은 그래서 내게‘ 크로니클 데이터’를 다루는 일로 다가왔다.
미디어플래닝은 귀납적이다
데이터를 정리해 보고서로 만드는 일은 사실 이미 일어난, 오늘을 기준으로‘ 지나간’ 일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듯 산출된 데이터만을 다루었다면 미디어플래너의 직함은‘ 계획자’인 플래너(Planner)가 아닌, 쌓는 사람‘ 아카이버(Archiver)’가 됐을 것이다. 새로운 광고주의 새로운 캠페인, 아직 일어나지 않은 광고 계획을 위한 PT에도 미디어가 꼭 참여하듯이 플래닝은 엄연히 현재, 그리고 미래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 방법론은 아주 귀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연역과 귀납의 차이를 잠시 짚어 보자면, 연역법은 일반적이고 대체적인 원리를 가지고 현실의 결과를 유추한다. 예를들어‘ 매체별 단가는 매년 상승한다’는 전제는‘ 참’이다. 그러므로 다음년도 단가도 상승하리라고 예측하는 방식이다. 그에 반해 귀납법은 이미 알고 있는 결과들을 통해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추출한다. 어제도 해가 떴고 오늘도 해가 떴으며 지난 몇 천 년 간 매일 해가 떴으니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비슷하게, 미디어플랜은 축적된 연대기적 데이터를 가지고 앞으로의 방향을 그려 나간다. 이 작업을 위해 5개년, 또는 미시적으로 5개월, 더 적게는 5주, 5일 정도의 광고비와 GRPs(누적시청률) 데이터를 추려낸다. 이를 엑셀에 입력하고, 엑셀의 차트 기능을 사용해 인사이트를 뽑아낼 수 있는 그래프를 그린다. 이렇게 플래너들은 차트와 머릿속의 시간대 축에서 추세선을 그려 나간다.
‘시간’ 말고도, 다른 축도 가능하다. 경쟁사의 광고비 집행 동향, M.POPS와 빅데이터 툴을 사용한 업계 트렌드, 광고 캠페인 영상 개수…. 플래너는 해당하는 기준의‘ 케이스’를 찾아 이러한 축들 위에 정리해 나간다. 수많은 케이스들로부터 미래를 예측하는 것, 바로 귀납적인 추리라고 할 수 있다.
‘귀납적’이라는 말은‘ 경험적’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의사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보다도‘ 경험’이 중요시되는 분야가 아닌가 싶다. 물론 격변하는 매체환경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만을 무조건 신뢰하고 반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현업에서는 경험의 유연하고 창의적인 적용을 통해 여러 난관을 헤쳐나간 케이스를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단순한 정보의 나열만으로 플래닝이 가능했다면 이미 미디어플래닝은 컴퓨터로 자동화된 과정으로 대체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광고주의 변화하는 니즈와 업계 변화에 따른 새로운 타깃 적용, 시시각각 달라지는 미디어 콘텐츠와 현실적인 비용 효율성…, 이 모든 요소를 조율하고 그 앞도 내다보는 것이야말로 미디어플래너의 핵심 역량이자 역할인 듯하다.
미디어플래닝과 데이터 시각화
이렇듯 인사이트 작업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한 과정을 보조하기 위해 막내 플래너는 꾸준히 모니터링 작업을 수행한다. 모니터링 작업은 적게는 일주일, 길게는 연간 단위로 수행하고 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모니터링은 광고주를 위해 지난주에 나간 매체 현황을 데이터로 산출해 보기 좋게 정리하는 작업이다.
플래닝 분야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가지게 된 요즘은 모니터링 보고작업이야말로 플래너의 기본기를 길러주는 핵심 단계라는 확신과 자부심을 갖게 됐다. 모니터링에 사용되는 로데이터는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많을 때는 엑셀로 거의 십만 행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양을‘ 업계 포트폴리오’나 한 장의 표로 정리하는 작업은 데이터로부터 인사이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커리큘럼인 것 같다.
요즘은 한발 더 나아가 모니터링 작업과정을 플래닝 전체로 확대해 생각해보려고 노력중이다.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작업, 이것을 감히‘ 비주얼라이제이션(Visualiza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우연인 듯 아닌 듯, 최근 빅데이터 업계의 화두도 바로 이 비주얼라이제이션이다. 시각화 작업은 실질적인 데이터 커뮤니케이션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정제하고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인력과 자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다행히 빅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에서는 프로그램을 통한 데이터 작업의 자동화와 클릭을 기반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각화 과정을 구축하는 것이 큰 화두이다. 그런 만큼, 해당 도구들을 미디어 플래닝 데이터 작업에 응용할 수 있다면 더욱 알기 쉽고 접근이 용이한 플래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10월 29일 참석한 데이터사이언스 컨퍼런스에서 그러한 시각화 도구들에 대해 간략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R함수는, 대용량의 데이터를 일정한 함수와 규칙 코딩(Coding)을 통해 시각화하기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컴퓨터 언어이다. R함수 처리를 거친 데이터들은 ‘정제(Purify)’ 과정을 거친 데이터 결정들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결정들을 잘 엮어 멋진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솔루션들이 태블로, D3.js, 스팟파이어(Spotfire), 인포그램(infogr.am) 등이다. 태블로와 스팟파이어 등의 솔루션은 유료이며, 상당한 월 이용료를 자랑한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해외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 등에서는 이들 툴을 활용한 인포그래픽을 발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케팅 및 매체 의사결정을 돕고 있다.
위와 같은 도구들을 이용하면 매체 데이터 역시도 유사한 그래프로 시각화가 가능하다. 특히 이러한 시각화 도구들은 웹 또는 모바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눈을 사로잡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막대그래프를 탈피한 새로운 형식의 그래프는 분명 신선한 시각이나 인사이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매체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축적된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조금 시간과 경험이 뒷받침된다면 플래닝에도 데이터 시각화 도구가 도움이 될 날이 분명 올 것이라 예상한다.
여기에 머지않아 실시간(Live) 시청률이 도입되고, 광고단가 공시 시스템과 시청률 데이터가 웹 기반으로 바뀌어 클라우드 서버에서 실시간으로 액세스 가능한 날이 온다면 실시간 매체 모니터링과 플래닝도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주 보기 쉽게, 손 안에서 말이다.
그런 날이 오게 되기를 고대하며, 플래너로서의 기본 자질을 갈고 닦는 동시에 비주얼 데이터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더욱 배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언젠가는 정말 손 안에서 드래그 앤 드롭으로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을 수행해 플래닝의 인사이트 발굴을 더욱 잘 해낼 수 있는 미디어플래너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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