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결합 그리고 재창조
김 경 회 | CD | copynoa@hsad.co.kr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
추석 연휴의 끝자락, 기름진 음식섭취와 장시간의 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힐링하고자,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다녀왔습니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진격의 거인처럼 솟아 있는 거대한 괴물을 만나기 위함이 아닌, ‘문화 샤넬전: 장소의 정신’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샤넬에게 창조적 영감을 준 다양한장소를 독특한 컨셉트로 담아낸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DDP에서 정작 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습니다.
자존심의 높이로 치면 성북동의 담장높이를 능가하는 ‘간송 미술관’. 1년에 딱 두 번 사람들에게 공개되던 이 도도한 간송의 작품들이 DDP 한 편에 전시되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높디높던 담장을 허문 사실이 반가움이 아닌 아쉬움으로 찾아오는 건 왜일까요?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 1년에 딱 두 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 어떤 미술관이 더 끌리십니까? 전자는 쉽게 상상이 됩니다. 이미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후자는 상상하게 만듭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좋은 브랜딩은 사람들의 순수한 관심을 통해 마케팅을 필요 없게 만듭니다. 미술관의 낡은 개념을 깨고, 낯설고도 새로운 개념을 결합해 전혀 다른 미술관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번 호에는 낡고 버려진 것들이 해체와 결합을 통해, 전혀 다른 브랜드로 재탄생하는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현실은 늘 비현실적인 상상을 통해서만 변화합니다
혹시, 이미 단종된 현대자동차의 SUV, 갤로퍼를 아십니까? 미츠비시의 파제로 1세대 모델을 베이스로 1991년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이 자동차는, 한때 대한민국 상남자들의 자동차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 기억 속의 갤로퍼는 고등학교 시절 학생주임 선생님의 차로 기억됩니다. 학년 소풍 때마다 갤로퍼의 엔진을 배터리 삼아 장기자랑에 필요한 앰프를 연결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추억 속에 방울방울 머물던, 2003년 단종된, 중고가 100~300만 원 정도의 차가 10년이 지나평균 4천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자동차로 부활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 믿음은 국내 첫 리빌드 자동차회사인 ‘모헤닉 게라지스’를 만나기 전에는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헤닉 게라지스가 만들어 낸 모헤닉G 모델을 마주하는 순간, 좀처럼 생기지 않던 믿음은 절대신앙이 될 것입니다.
모헤닉 게라지스의 모든 자동차는 갤로퍼를 리빌드해 만들어 낸 수제 자동차입니다. 버려지고 잊혀졌던 갤로퍼의 낡은 가치를 낱낱이 해체하고, 시대가 원하는가치를 촘촘히 결합해 한 달에 한 번 탄생하는 2014년형 갤로퍼, 이름마저도 세련되게 개명한 ‘모헤닉G’는 이제 더 이상 상남자의 거친 SUV가 아닙니다. 섬세하고 품격 있는 귀족의 옷을 입게 됐습니다. 2015년 생산될 자동차까지 이미 예약주문이 완료된 상태이니 그 인기가 가히 폭발적입니다. 케이블 TV 스토리온의 <렛미인>에 맡겨도 투박하고 볼품없이 윽박지르는 못생긴 갤로퍼를 이보다 더충격적이고 매력적인 모헤닉G로 만들어내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늘 비현실적인 상상을 통해서만 변화합니다. 무모하고 미친 짓이라며 반대하던 현실을 인정했다면, 오늘의 모헤닉 게라지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부한 브랜드는 곧 잊히지만, 진화하는 브랜드는 관심을 받게 마련이니까요.
버려졌던 그 무엇이 특별한 울림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최근 이런 관심을 넘어 팬덤까지 일으키고 있는 가방 브랜드 하나를 소개할까합니다. 여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가방, 하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를 매혹시킨 이 브랜드는 ‘프라이탁(FREITAG)’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담는 용도를 넘어 수많은 가치를 든든하게 담고 있는 이 가방은 트럭에 사용되는 방수 천과 자동차의 안전벨트를 결합해 1993년 스위스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마르쿠스와 다니엘 프라이탁 형제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미 사회적 가치를 다한 소재에 새 생명을 불어 넣어 탄생한 가방. 재활용을 통해 친환경성까지 갖춘 이 가방은 1993년 제작된 메신저백이 뉴욕 모마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똑같은 디자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전 세계 매장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고 있는 프라이탁은 가방보다는 브랜드, 브랜드 보다는 하나의 문화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비슷한 컨셉트로 탄생한 브랜드로, 낙하산과 폐고무 등의 재활용 소재로 만든 스니커즈, ‘테라플라나(Terra Plana)’가 있습니다. 재활용품으로 만든 브랜드가 재활용스럽다고 느껴질 때, 브랜드의 매력도 가치도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두 개의 브랜드들은 그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어 소비자의 마음에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New’를 찾기 위해 ‘Old’를 배척했던 사고를 버리렵니다
광고를 만드는 일은 흥미롭지만, 어렵습니다. 늘 한여름 가뭄처럼 말라있지만, 오아시스는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이 없으니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라는 하루키의 말을 되새기게 됩니다. 뻣뻣하게 솟아 있는 고정관념의 벽을 부수고, 다른 팀원의 생각이나 시도를 결합해 말라있던 아이디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 이것으로 우리의 아이디어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New’를 찾기 위해 무조건 ‘Old’를 배척했던 사고를 버리고, 흩어지고 버려졌던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결합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에 새로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니까요. 이제 매일 인생의 안전하고 얕은 가장자리에서만 헤엄치던 비겁함을 해체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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