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06 : 법고창신(法古創新) 비(非:`different)ㆍ강(强:`impact)ㆍ단(單:`simple)한 크리에이티브로 마감하라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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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非:`different)ㆍ강(强:`impact)ㆍ단(單:`simple)한
크리에이티브로 마감하라

 

 

 

 

박현주 전 LG애드 상무는 1974년 9월 ㈜럭키 선전사업부로 입사한 이래 럭키개발 선전실ㆍ금성사 선전사업부ㆍ희성산업ㆍLG애드에 이르기까지 제작ㆍ기획ㆍSPㆍ마케팅ㆍCM 등 다방면의 직무를 수행하거나 총괄했다. 당시 제작에서 기획으로 보직을 옮기는 경우도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지원파트와 미디어를 제외하고는 당시 회사의 거의 모든 조직을 두루 거쳤거나 총괄한 것도 이채롭다. 기획과 제작 업무를 하면서 금성사 및 외부 광고주를 맡은 적도 있지만, 럭키의 제품들과 가장 오랜 인연을 맺었다. LG가 럭키의 영문 첫 글자 ‘L’과 금성의 ‘G’가 합쳐져 탄생했을 정도로 럭키는 LG그룹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한다.
사보 편집실에서는 박현주 전 상무를 만나 ‘럭키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박현주 전 상무는 1998년 LG애드를 퇴임한 이래 현재 편집디자인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 산과 들의 야생화를 찾아다니며 사진에 담는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발간된 <LG광고반세기>를 보면 ‘1974년경 락희화학 선전실 소속 직원들’이라는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상의를 벗고 있는 분, 한복 저고리를 입고 있는 분등 복장과 표정들이 재미있는데요. 이 사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가지고 있다가 LG애드 창립 10주년 사사를 만들 때 제보한 사진입니다. 50년사에도 실렸네요. 정확히 말하면 락희화학이 아니라 ㈜럭키 선전실 제작부 사람들입니다. 1974년도에 락희화학이 럭키로 사명을 변경했으니까요. 당시 제작부가 15명 정도였는데, 몇 명인가 빠지고 사진에 다 등장하죠. 아마 겨울이었을 텐데 광고촬영이 끝나고 스튜디오에서 회식 후 찍은 사진입니다. 당시 15명이 똘똘
뭉쳐서 일하던 분위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하단 가장 좌측이 저입니다. 제 입사년도에 찍은 사진이니까 거의 신입시절이네요. 스튜디오에 있던 소품들로 장난기 있는 분장을 하고 찍은 거죠. 하단 가장 우측에 있는 분은 열정이 대단했던 분이었어요. 새벽 4시에도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바로 작업해야 한다며 사무실에 나타나고는 해서 사옥 경비 서시던 분들이 많이 놀라고는 했죠. 당시 선전사업부는 회
사에서 ‘약간 독특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통했어요. 그때 사무실 한쪽 벽에 전라의 여성 포스터가 붙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사업부장이 내려왔다가 사진을 보고는 조금 놀라는 눈치기는 했는데, 부서의 특성을 이해하셨는지 별 말 없이 지나간 일도 있었죠.

 

여기 사진 속 한 분한테는 제가 좀 실례를 하기도 했었는데요. 사수 개념의 분이었어요.

제가 작업한 시안을 보여드렸는데 흡족한 수준이 아니었나 봐요. 그래서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제게는 좀 심하게 들렸어요. 지금은 정확히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 못 해요. 하여간 제가 순간적으로 그 분 앞에서 가져갔던 시안을 쭈욱 찢어버렸죠. 그 분도 황당했겠죠. 나중에는 잘 해결됐어요. 아, 그리고 그 당시 제작부만 책상이 ‘특별 설계한’ 티크색 나무책상이었어요. 제가 디자이너 용 책상을 만들어 달라고 제안서를 작성해 당시 부장에게 제출했죠. 이 제안이 승인돼 이후부터 제작부 디자이너만‘ 업다운이 가능한’ 고가의(?) 넓은 티크나무책상으로 바뀌었지요.”


 

오기목 전 LG애드 상무께서는 얼마 전 본 코너의 인터뷰에서 “전자제품군의 경우 광고촬영을 위해 냉장고나 세탁기를 직접 들고 충무로 스튜디오까지 가서 짊어지고 올라가야 했던” 고충을 털어놓으신 적이 있습니다. 럭키 제품군의 경우는 어땠나요?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럭키 제품군의 경우 비누ㆍ치약ㆍ샴푸ㆍ세제ㆍ산업재ㆍ바닥재 등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만큼 촬영 건도 많았죠. 카탈로그도 만들어야 했고요. 바닥재와 벽지의 경우 실제로 집에 새로 다 깔아야 했는데, 집 섭외하는 게 힘들었어요. 모델 섭외도 사진 테스트에 선정, 계약까지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죠. 엄유신ㆍ이효춘ㆍ이경진ㆍ박정수ㆍ이정화ㆍ신은경ㆍ박현숙ㆍ조민수 등등 당시 인기 있던 배우들과 작업을 했죠. 럭키 하모니[세제]의 경우 자니윤, 슈퍼 타이의 경우 천하장사 이만기를 모델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하모니는 김종립 현HS애드 대표이사께서 기획한 작품이었는데, 모델인 자니윤이 특유의 독특한 발
음으로 ‘하모니 알아요?’라고 했던 카피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자니윤쇼>가 주부들한테 인기가 좋아서 섭외했는데, 굉장히 프로의식이 강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럭키 광고를 오랜 기간 맡기는 했지만, 금성사 광고도 93년,94년 임원 시절 2년에 걸쳐 맡았고, 반도상사도 꽤 오래 출입했습니다. 대한항공도 총괄은 아니었지만 타 대행사와 같이 했었고요. 이외에도 가수 김건모가 등장했던 서울이동통신 삐삐015광고도 기억나네요.”

 

제작과에서 기획과로 옮기셨는데요. 옮기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기획 쪽에 결원이 한 명 생겼는데 제작[디자이너] 쪽에서 기획파트[AE]로 보직을 옮기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묻더라고요. 당시 2명이 지원했는데, 다른 한 명은 저보다는 옮길 의지가 덜했습니다. 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자 했었는데, 광고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배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원한 거예요. 1978년
에 기획1과로 직무 이동했다가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제작1과로 잠깐 돌아갔다가 다시 기획1과로 복귀했죠. 제가 부장 시절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당장 급한 건이었는데 제작에서 작업을 안 해주는 거예요. 곧 퇴근들을 해야 해서 사람이 없다는 거죠. 카운트파트도 부장이었는데 저와 친했거든요. 그 친구를 설득해서 일을 진행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저도 제작 출신이니까 제가 직접 수정해서 광고주
에게 보냈죠. 나도 할 줄 아는데 굳이 신경전 하기 싫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나중에 그걸 알고 조금 어필을 하더군요. 지금은 기획이지 제작이 아니지 않느냐는 거였죠.(웃음) 기획으로 옮긴 이후에는 미디어와 지원파트를 제외하고는 기획ㆍ제작ㆍ마케팅ㆍ조사ㆍSPㆍCMㆍ홍보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조사과장 시절에는 치약
이나 휘발유의 ‘소비자 서베이’에 자료실 관리도 했고요. 또한 당시에는 SP 하면 조금 생경한 분야였는데, 제가 임원이었고 이진남 국장이 제 밑으로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SP국의 강화 필요성을 느껴서 대대적으로 보강한 시절입니다. 그때 들어온 인재들 중 몇몇은 지금 HS애드에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죠. 임원으로 SP까지 총괄했던 때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대전엑스포 테크노피아관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영상업체하고 테크노피아관 영상 제작비 협상 회의를 했는데, 결론이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윤웅진 상무가 저와

 

 

 

상의도 없이 불쑥 일어나더니 “덮고 갑시다“ 하더군요. 저도 눈치를 채고 ”그래요, 갑시다“ 하고 맞장구를 쳤죠. 그런 작전(?) 덕에 결국 미국 업체에서 금액을 내렸어요. 테크노피아관 슬로건이었던 ‘마음을 담아 꿈을 찾아’도 윤웅진 상무가 제안했던 초안에서 조금 수정된 버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이 볼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는데, 엑스포 정문 문이 열리면 전날부터 거기서 자리 깔고 밤새 기다리던 사람들이 막 뛰어 달려오곤 했죠. 테크노피아관이 제일 인기 있었어요. 연암기념관이나 사이언스홀에도 조금 관여했습니다.”

 

 

 

  신인섭 교수께서는 지난해 본 코너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땅에서 조일광고대상 그랑프리를 수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회사는 LG애드의 전신이었던 희성산업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박현주 전 상무께서도 1981년에 대일파스 광고로 대상을 수상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캠페인이나 수상작이 있으시다면요?

  “1997년 한국방송광고대상에서 럭키 드봉 에스코트 화장품 광고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드봉 에스코트는 주니어용 화장품이었어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미지의 신인 박현숙을 모델로 기용하고, 주니어층에 인기 있는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활용해 매출실적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기획국장이었을 거예요.또 금성사 광고로도 상을 받았고, 이외에도 많이 받았어요.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룹 내에서 받았던 상들이에요. 유니나 샴푸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제가 브랜드명을 지었습니다. 사내 공모에서 당선된 거였죠. 이후에 유니나 샴푸 광고 제작에도 참여했어요. 김홍도의 그림을 조금 ‘변형’해서 썼어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광고였죠. 클로버 모양의 럭키그룹 마크도 같은 식으로 제가 만든 거였고요. 반도스포츠에서 나온 테니스라켓 브랜드 ‘테크만’도 사내공모에서 제가 이름 붙였습니다. 그룹 마크 당선됐을 때는 이헌조 사장께서 “자네는 왜 이렇게 상을 많이 받아”라고 했을 정도죠(웃음). 회사에서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단편(가작)으로 상금을 받았던 기억도 나는군요.”


마지막으로 당시 같이 일했던 동료 LG애드인과 후배 LG애드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퇴임 시 함께 일했던 100여 명의 직원들이 그들의 사인과 함께 ‘송별패’에 담아줬던 말이 있습니다.‘ 휘지 않는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언제나 원칙을 지키고 자신의 길을 지키시던 우리 상무님, 꿋꿋한 당신의 의지를 우린 기억하겠습니다’로 이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쎄요, 광고인의 삶 중 대략 반 정도는 그렇게 일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부하직원들에게 칭찬에 인색했습니다. 다른 부서에 있다가 제 부서로 오면 ‘죽었다’ 복창하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질책과 지적을 두 배 이상의 칭찬으로 받아주었을 그들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LG애드 근속기간 동안 좋은 광고주, 좋은 상사, 좋은 동료, 좋은 직원을 만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지면을 빌어 후배들에게 몇 마디 남긴다면 좋은 광고, 팔리는 광고를 만들려면, 1) 고객과 브랜드를 고려한 컨셉트를 도출하고, 2)비(非: Different)ㆍ강(强:Impact)ㆍ단(單: Simple)한 크리에이티브로 마감하라는 점입니다. 단, 절대 디테일에 소홀하면 안 되는데, 디테일을 놓치면 앞의 두 가지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