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4 : 법고창신(法古創新) - 마케팅 시대를 앞서 나갔던 LG애드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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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시대를 앞서 나갔던 LG애드



HS애드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조사과가 처음 신설된 해는 1977년이었다. 럭키 홍보실에서 관장했던 그룹의 광고업무를 1976년 7월 이관 받은 럭키개발은 이듬해 조사과를 신설해 자료 조사업무를 일원화했다. 조사과는 이후 조사부, 마케팅국, 마케팅연구실, 브랜드전략연구소 등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AP팀·브랜드인사이트연구소·자료실에 이르게 됐다. 홍재욱 전 이사는 1977년 럭키개발 조사과에 입사한 이래 LG애드에 이르기까지 마케팅 부서의 광고전략 수립 과학화 및 대 광고주 마케팅 서비스 강화의 기틀을 쌓았다. 사보 편집실에서는 홍재욱 전 이사를 만나 HS애드 마케팅 파트의 오늘이 있기까지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이대용 당시 과장이 조사과를 책임졌고, 그 밑에 저하고 여직원 한 사람 등 셋이서 조사과 업무를 맡았어요. 저는 경력 1년 된 사원이었고요. 그때만 해도 광고업이 정착이 안 됐던 시절이라 조사과가 신설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우선 조사과이니만큼 자료를 제대로 모아야겠다 싶어서 대학 도서관, 다른 광고회사, 광고 관련 협회, 서점 등을 돌며 자료들을 모아서 자료실을 만들었죠. 자료관리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가 럭키와 금성의 제품 및 광고 등에 대한 소비자 조사를 직접 하기 시작했어요. 조사요원들과 함께 전국 여러 곳을 돌며 조사를 하면서 사무실에서 생각하는 것과 현장 소비자들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경험하게 됐죠. 이런 경험이 이후에 일을 하면서 현장감각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조사과에 있다가 홍보기획과에도 잠시 있었고, 광고 쪽으로 와서는 금성사 광고를 맡다가 과장이 되면서 럭키광고와 그룹의 해외광고 파트를 담당했죠. 금성사 광고를 담당할 때 금성사에서 컬러TV를 국내 시장에 첫 시판했는데, 구미까지 출장을 여러 번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구미 공장에 가면 기술자들이 제품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주사선 이야기만 해서 아주 혼났어요. 소비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줘야 하는데 기술자들이다 보니 그렇지 못했죠. 당시 금성사 TV광고를 하면서 판매에 대한 걱정은 안 했어요. 금성사 제품 구매의향이 월등했거든요. 우리가 선발업체로서 시장을 지배하던 때였고, 대리점주들이 줄서서 물건 받아 가면 다 팔렸으니까요. 유학 전 5~6년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고·홍보·조사 등 광고 홍보 분야 전반을 고루 섭렵해본 것은 이후 공부를 했던 때나 회사에 다시 돌아왔을 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홍재욱 이사는 기획1과 과장으로서 럭키와 그룹의 해외광고를 담당하던 중 1982년도에 첫 퇴사를 하고 미국 휴스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결심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케팅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내에서는 마케팅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관은 물론 관련 서적을 찾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에 국내에서 발간되던 마케팅 서적은 기존의 판매관리서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80년대가 되면서 마케팅의 시대에 들어섰음에도 마케팅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변혁의 시대가 오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개념도 없고 답답하니까 유학길을 떠나게 됐죠. 때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서 생활이나 수학여건이 모두 어려운 상태였지만 마케팅 공부를 석사부터 시작해서 박사까지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간신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귀국해서 보니 국내 광고업계가 괄목할 성장과 발전을 이룬 상황이었습니다. 각 그룹들이 자체 광고회사를 만들었고, 외국의 여러 유명 광고회사들도 독자적으로 혹은 국내 업체와 손잡고 진출해 있었죠. 광고가 어엿한 산업으로 성장하고 세상의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 실감했지요. 젊은이들에게는 광고인이 로망이었을 만큼, 바야흐로 광고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귀국 후 당시 광고대행 규모가 국내 2위에까지 올라있던 LG애드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1989년은 LG애드가 매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한 끝에 창립 6년 만에 취급액 1,000억을 달성한 해였죠.”


홍재욱 이사는 1989년 마케팅국 국장으로 LG애드로 돌아왔다. 마케팅국은 1988년 4월 1일자로 단행된 조직개편을 통해 신설됐다. 기존의 조사부, 그리고 신설된 마케팅부와 DM팀이 마케팅국에 배속됐다. 광고에서 마케팅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커졌다고 볼 수 있다. 1989년 복귀하면서 홍재욱 이사는 프레젠테이션에 필요한 조사를 담당하던 마케팅 부서의 역할을 확대, 개편했다.

“제가 복귀했을 때 마케팅국 조직은 만들어져 있었지만, 업무는 이전 조사부 업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추가적으로 신문기사 스크랩하고 DM 정도 하고 그랬죠. 제가 돌아온 이듬해인 1990년 4월, 마케팅국을 마케팅연구실로 전환했습니다. 그러면서 광고기획 기능을 강화하고 전략모델 개발과 종합정보시스템 구축 등을 중심으로 마케팅연구실의 편제를 새로 짰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분은 광고기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광고기획을 마케팅의 틀을 근간으로 해서 접근하려고 했었어요. 전에는 광고 프레젠테이션이 있으면 마케팅 부서에서는 조사를 해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했지만, 그때부터는 마케팅 인력을 각 기획팀에 전담으로 배정해 마케팅 전략을 짜고 AE들과 협의를 거쳐 광고전략을 직접 수립하도록 한 것이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AP 역할을 마케팅에서 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전략모델개발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광고물에 대한 사전·사후 조사시스템(LATS: LG Advertising Test System), ’광고전략플래닝 지원시스템(LGSTAMS:LG Strategic Advertising & Marketing Support System‘) 외에 몇몇 전략모델들을 자체 개발했고, 우리의 제휴선인 BBDO의 여러 모델들을 도입해 우리 사정에 맞게 현지화하는 작업도 많이 진행했습니다(브랜드의 이미지를 특정 유형의 인물과 연결시켜 파악하는 방법 등 많은 예가 있음).

정보관리팀은 정보의 수집과 분류·가공·저장 등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업계에서 선도적으로 구축했고, 특히 우리 광고주와 그 경쟁사들 제품에 대한 소비자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CPR(Consumer Profile Research)도 업계 최초로 전국의 소비자 6,000명을 대상으로 매년 실시했습니다. CPR 조사는 몇 년 뒤에 비용 문제로 몇몇 다른 광고회사도 참여해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지요. 이런 업무들을 새로이 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지금은 각 대학 교수로 가있는 이철영·문영숙·이강원·박현종박사 등이 합류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마케팅 인재들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마케팅만의 노력으로 달성된 결과는 아니겠지만, 당시 LG애드는 신규 P/T에서 27전인가를 연승을 해서 직원들의 사기가 무척 높았습니다.”





홍재욱 이사는 임원이 되면서 마케팅 부문 외에 국제광고 부문을 담당했다. 당시 해외 제휴선인 미국의 BBDO 및 일본의 덴츠와 협력이 강화되면서 공동광고주 개발과 클라이언트 서비스가 많았다. LG애드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국제 부문은 크게 두 파트로 요약될 수 있었는데, 하나는 해외 제휴선과 공동으로 Joint division을 설치해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덴츠에서는 이나모리 다케시 부장을 제 산하에 있던 LG-DENTSU에 파견해 우리 직원들과 함께 네슬레·오츠카제약·마일드세븐·20세기폭스 영화사 등의 광고주를 공동관리하게 했었죠. BBDO와도 역시 Joint-division을 만들어 한국시장에 진출한 BBDO 광고주들을 공동개발 및 관리하고, 전 세계 네트워크 회의, 지역별 회의, 부문별 회의 등에 참석하면서 선진 광고회사의 노하우를 익혔습니다.

또 다른 축은 우리가 외국으로 직접 진출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 광고주를 고객사로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1991년 개설된 동경사무소에는 당시 공진성 사원(현 HS애드 북경법인장/상무)이 파견돼 일본 광고계 시장조사와 동향파악, 그리고 당시 일본에 진출해 있던 우리 광고주 서비스를 담당했습니다. 내가 완결을 하지는 못했지만 북경지사도 이때 추진됐습니다. 90년대 초반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지 10여 년 조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아직 공산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많은 외국계 광고회사들과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사업에 막 뛰어들 때였죠. 금성사도 중국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지사를 내던 시기인데, 우리도 중국에 진출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분간 수익은 없이 만만찮은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죠. 당시 BBDO 북경지사를 방문해 보았는데, 아직은 전만 펴놓고 앉아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몇 번 망설이다가 중국 경제의 성장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고, 너무 늦어지면 실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북경에 가보니 더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한홍광 금성사 북경지사장을 찾아가 우리 직원을 우리 비용으로 내보낼 테니 금성사 지사에 자리만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죠. 금성사에서 좋다고 해서 인원 파견 형태를 유지하다가 1995년도가 돼서야 LG애드 북경사무소가 정식으로 오픈했습니다.”


홍재욱 이사는 재임중에 영입한 클라이언트 중 진로쿠어스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진로쿠어스에서 미국의 쿠어스(Coors) 맥주를 기술도입으로 들여오면서 ‘카스맥주’를 런칭하게 됐는데, 당시 예상 광고비가 300억에서 500억 원 정도로 흔치 않은 규모여서 광고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0여 명 정도의 특별팀이 구성됐으며, 3번의 프레젠테이션 끝에 영입에 성공했다. 전체적으로 준비와 프레젠테이션에 4~5개월 정도가 소요됐었다. ‘카스’ 광고를 성공적으로 영입하고 그 해(1994년), 기록상으로 두 번째 퇴직을 하게 된 홍재욱 이사는 자문위원 형태로 몇 개월 후 다시 LG애드로 돌아왔다. 이미 교수로 재임하던중이었다.

자문위원으로서 홍재욱 이사는 마케팅 파트를 계속 책임지며, 오전에는 LG애드에서 업무를, 오후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생활을 몇 년 더 이어갔다. LG애드가 태동 이전부터 이후까지 쾌속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회사를 떠난 홍재욱 이사는 “당시 최고 경영진에서 평사원에 이르기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일하던 모습이 선하다”고 회고하면서 “맹자의 말을 빌리면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