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훔치다
김 경 회 | CD | copynoa@hsad.co.kr
묻습니다!
가벼운 침묵만 깔아준다면, 이미 가슴에 새겨있어 술술 낭독할 수 있는 시 한 편 있으신지요? 한 땐 저도 문학청년을 꿈꾸며 제법 여러 편의 시를 공부하듯 외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을 넘기며 찾아오는 메모리의 한계와 낭만의 빈곤으로 광고회사 입사 이후 점점 시집을 멀리했지요. 그 무렵이었습니다. 수년 간 꽁꽁 얼어있던 마음의 바다를 단번에 깨뜨리는 시 한편을 마주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그 꽃> - 고은
차장 카피라이터 시절, 밤샘 후의 고단한 퇴근길. 어느 지하철역에서 마주한 이 시 한 편은, 뜻을 가늠하기 힘든 현학적인 수사로 가득한 세상에 단 한 줄로 마음을 움직이는 기막힌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여유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없던 시절, 울림과 떨림을 주는 참 반가운 시선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디어를 밴딩머신처럼 찍어내던 기계식 생각노동자의 삶에 모멸감을 주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마주한 또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열다섯 줄 시 한편이 주는 150분 영화의 풍경. 15초 시간제약을 핑계로 수없이 포기하고 유기했던 얕은 생각들과 게으름에 대해 따박따박 따져 묻는 것만 같았습니다. 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윤제림 시인의 <폭설>을 소개합니다.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고은 저 <순간의 꽃> 윤제림 저 <사랑을 놓치다>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으로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폭설> - 윤제림
읽으려 하지 않아도, 읽히는 시입니다.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시입니다. 새기려 하지 않아도, 새겨지는 시입니다. 광고하는 우리가 닮아야 할 시선입니다.
앞으로 저는 이 지면을 빌려 세상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아낸 소중한 꽃들, 즉 마음을 움직이는 글, 크고 작은 울림과 떨림을 주는 사진과 그림 등 생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시선들에 대해 공개하려 합니다. 어쩌면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만 얹는 일이지만, 글을 쓰다 보니 욕심은 하늘인데 능력이 땅바닥임을 느끼게 됩니다. 지나다가 좋은 꽃을 발견하시면 지체 없이 제보해주세요.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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