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창신(法古創新)
지난 반세기 LG의 광고들은 수많은 명(名) 카피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카피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사람들은 여러 각도에서 이 카피를 모방했고,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이 카피를 떠올렸다. ‘하이테크TV’광고의 카피에서 시작했지만, 앞으로의 행동이나 생활에 지침이 될 만한 가르침으로 작용했다. 하룻밤 사이에도 극적인 변화가 이뤄지는 세상에서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 광고계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손꼽힐만큼 이 카피의 위력은 대단하다. 당시 이 광고 카피를 통해 ‘하이테크TV’가 혼수품 1호로 자리매김했으며, 금성사의 품질을 향한 노력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HS애드 사보 편집실에서는 조봉구 전 LG애드 부사장을 만나 광고카피 탄생 상황에 대해들어보았다. 찾아 뵌 곳은 혜화동 성당 근처의 커피숍이었다. 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 중이시며, 내년 1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LG애드 OB 가운데 한 분인 상지종 신부는 의정부 교구에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카피와 캠페인의 탄생 배경은 무엇인지요?
내가 기억하기에 처음에는 ‘하이테크TV를 장만하시면 10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런 카피였어요. 당시는 실무자가 직접 광고주에 가서 보고 드리고 할 때라서 광고안을 가지고 금성사에 들어갔죠. 하이테크TV 광고는 내가 카피라이터였고, 김희수 씨가 디자이너였어요. 하여간 들어갔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금성사 높으신 분의 오더라고 들었어요. 그 분께서 광고안을 보시더니 제품 광고로 할 것이 아니라, 금성사의 모든 광고에 ‘금성 제품을 장만하시면 10년은 후회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을 넣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길잖아요. 그래서 줄이고, 고치고 수많은 안을 다시 올려서 최종적으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로 결정된 거죠.
그렇게 금성사의 모든 광고에 그 카피를 넣기로 결정된 다음에, 실무자들 사이에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실 불만들이 좀 있었어요. 그때는 광고이론이 많지 않던 때라서 슬로건에 대한 개념이 없었거든요. 대다수의 TV광고가 15초였는데, 그 슬로건이 4~5초를 잡아먹으니 크리에이터들이 제품에 대해서 할 이야기를 못한다는 거였죠. 나중에 그 슬로건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난 다음에 다들 납득을 했죠. 그 광고 카피의 시작은 저였지만, 오랫동안 그 카피가 슬로건으로 지속됐다는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궈낸 캠페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카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제가 임원이 된 다음에 <KAA저널>에 기고한 적이 있어요. 광고회사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광고주에 대한 바람을 적었죠. 좀 더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참을성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광고주들은 광고회사에 비해 너무 빨리 광고효과를 보려고 하고, 한 광고물이나 캠페인에 대해서도 너무 빨리 싫증을 느끼는 것 같았거든요. 광고회사 입장에서 보면 소비자는 이제 겨우 그런 광고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단계인데,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그 제품을 사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고, 광고효과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 광고물을 너무 오래 썼으니 이제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하지 않겠나 하며 초조해 해요.
하지만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오랫동안 변함없는 전략과 일관성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김남주 씨가 광고모델로 나온 ‘라끄베르와 상의하세요’ 광고도 몇 년을 같은 톤을 유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 기억하잖아요? 광고의 주인으로서 그 광고에 대해 광고주의 관심은 각별하지만, 소비자들은 광고주의 관심과는 전혀 관계없이 나름대로 움직이죠.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카피 또한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거의 10년 가까이 같은 슬로건을 유지했기 때문일 거예요. 대한민국의 모든 광고 중에서 한 슬로건에 가장 많은 광고비를 쏟은 사례일지도 모르고요. 결국에는 금성사가 광고주로서 훌륭한 거였죠. 한 가지 주장에 대해 변함없이 투자한다는 건 대단한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 슬로건 광고의 효시라고 봐도 무방할 거예요. 당시에는 같은 슬로건으로 캠페인성 광고를 하는 사례가 없었거든요.
우리나라 광고 CM 중 희대의 히트송은 ‘사랑해요, 사랑해요 LG’가 아닐까 하는데요. '사랑해요 LG' 캠페인은 지금도 CI 변경 성공사례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랑해요 LG’ 광고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광고라는 게 누구 한 명이 만들었다고 할 수 없잖아요. ‘사랑해요 LG’ 캠페인도 그래요. 원래 ‘사랑해요 LG’라는 생각의 오리지널은 당시 윤웅진 상무에요. 그룹의 CI 변경과 맞물려서 비전과 메시지를 런칭 광고를 통해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던 때였는데, 어느 날 윤웅진 상무가 “꼭 로지컬하게 해야 하느냐”고 나한테 말했어요. 지금도 그 순간이 기억나요.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내심 쇼크를 받았거든. ‘전혀 다른 길도 있구나’ 하고. 하지만 그 앞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안 보였어요.
그때 그룹 홍보를 담당하던 분이 당시 심재혁 상무였는데, 제가 심재혁 상무한테 꼭 로지컬하게 해야 하냐고 했더니 굉장히 찬성을 했어요. 그래서 ‘미래의 얼굴’ 심벌마크를 보면서 떠오르는 말들을 생각하다가 ‘사랑해’라는 컨셉트가 나온 거죠.
CM송은 김도향 씨한테 맡겼는데 본인이 가사를 적어왔어요. 거의 무수정 통과가 됐죠. 결국 ‘사랑해요 LG’ 캠페인의 첫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윤웅진 상무에요. 윤웅진 상무가 ‘사랑해요 LG’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도 있지 않느냐 한 거죠. 굉장히 쇼크를 받았던 기억이 나요.
‘사랑해요 LG’ 캠페인 관련해서 인쇄광고도 인상적이었는데, 광고를 보면 다들 알 거예요. 그늘 한 점 없는 막막한 사막, 그리고 사막길을 걷던 길손과 낙타에게 그늘이 돼주는 LG의 빌보드. 그리고 ‘LG의 비즈니스는 사랑입니다’라는 카피. 국민들에게 사랑과 힘이 돼주고 싶은 마음을 담았죠. 그 광고를 만들 때 제가 황량한 사막과 LG의 빌보드 광고판을 당시 조동완 국장한테 얘기했어요. 광고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조동완 국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사막에 LG 간판이 서 있고, LG는 어디에나 다 있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거기에 조동완 국장이 길손과 낙타가 쉬고 있는 걸로 만들었죠.
이현종 대표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조봉구 부사장님을 통해 카피라이팅이 무엇인지, 또 좋은 광고는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이때 광고 보는 눈을 배웠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후배 HS애드인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저는 이현종 대표CD한테 특별히 더 카피라이팅 교육을 시킨 적이 없어요. 이현종 대표CD가 그렇게 말했다면, 같은 이야기를 해도 누구는 불만으로 받아들이고, 이현종 대표CD는 약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죠. 권익표 전 커뮤니케이션윌 회장님이 얼마 전 별세하셨는데, 그 분 밑에서 일을 할 때 하나의 광고 카피를 이백 번씩 쓰게 한 적 있어요. 아직도 그 당시에 썼던 카피를 바디카피까지 기억하는 광고들이 많아요. 나는 그 분이 그렇게 저를 훈련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이현종 대표CD도 제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어서 제가 생각한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광고는 상식적으로 해야 돼요. 옛날에 무슨 광고제작을 하는데 디자이너한테 줄이 삐뚤어졌다고 했더니, 자로 쟀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사람들이 자대고 보나, 눈으로 보지.’ 광고는 전문가들이 만들지만, 보는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아니거든요. 광고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고, 글 솜씨, 그림 솜씨를 자랑하려고 광고를 만들어서는 안 돼요. 글에, 영상에 솜씨를 부리다가 핵심을 잃어버리기 쉬워요. 광고에 대한 제 생각이 변해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처음에는 카피라이팅을 ‘글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조금 지나서 디자이너와 협업하면서 만드는 일종의 포토 에세이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그게 아니고 ‘이게 장사’구나 생각했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건 수단에 불과한 것이구나. 그런데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광고는 장사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사회를 연출해가는 힘이 있구나, 그래서 광고가 사회를 앞서간다고 하는 거죠. 광고에는 사회를 연출해가는 힘이 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아내하고 아이한테 내가 만들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광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집에 가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광고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광고의 기능이 엄청나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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