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6 : WiseBell - 컨셉트의 탄생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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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트의 탄생

 

나는 의자를 좋아한다.
가방을 좋아하고 펜을 좋아하고, 노트북을 타이핑할 때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을 좋아하고 새 차 냄새를 좋아한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날 샤워 후에 갈아입는 속옷의 느낌을 좋아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5월의 밤 산책을 좋아한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살살 머리칼을 만져주는 걸 좋아하고 구름보기를 좋아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하고 골목길을 좋아하고 <골목길>이라는 노래도 좋아한다. 초콜릿을 좋아하고 청록으로 진해지기 전의 연둣빛 가로수잎들을 좋아하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좋아하고 출근하자마자 마시는 첫커피를 좋아한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창밖 보기를 좋아한다. 바지와 신발이 잘 매치되었을 때의 기분을 좋아하고, 조금 긴 플레어스커트를 나풀 나풀거리며 걷는 여자의 모습을 좋아한다. 책장이 넘어갈 때의 소리를 좋아하고, 아주 가끔이지만 전혀 와본 적 없는 지방도로를 드라이브 할 때의 낯섦을 좋아하고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아포카토를 좋아한다. 해가 저무는 붉은 하늘을 좋아하며, 그 위를 가로질러가는 한 무리의 새떼들도 좋아한다. 아주 사소하며 말도 안 되는 얘기만 주고받는데도 계속 웃음이 터지는 자리를 좋아하고, 멍청하게 앉아 야구보기를 좋아한다. 글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며, 아무 생각없이 썼는데 생각이 돼서 생각 있는 사람처럼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좋아한다. 불교를 믿지 않지만 불교를 좋아하고, 모자 쓰기를 싫어하지만 모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명절날이나 보게 되는 텅 빈 서울 시내를 눈 오는 날 개처럼 좋아하고, 아내와 영화보기를 좋아하고 와인 마시기를 좋아한다. 8시간 정도 잠자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특정 동물을 찾아내는 일을 좋아하며, 말을 적게 하는 데도 할 말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가끔 어떤 말의 어원을 알게 됐을 때의 왠지 유식해진 기분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좋으면서 인토네이션이, 가령 신성원 아나운서 같은 톤을 좋아한다. 자작나무보다는 자작나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며 그런 의미에서 은사시나무도 좋아한다......


계속 쓰다보니까 이걸로 책 몇 권도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난 도대체 아무 것도 좋아하는 게 없는 것 같아’라는 우울이 밀려들면서 두서없이 마구 적기 시작했는데 적다 보니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져버렸다. 가끔 장점이 없는 제품을 광고해야 할 때가 있다. 회의실에선 좌절과 냉소가 오가곤 한다.
그럴 때일수록 크로키보다는 세밀화가 필요하다.
누구나 크로키같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다보면 별게 다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바야흐로 컨셉트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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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CCO (Chief Creative Officer) | jjongcd@hsad.co.kr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