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발전소
그 애와 난 홋카이도에 못 갔다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소식조차 모르고, 꿈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통해 로맨스를 완성하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겨울방학이 되면 함께 홋카이도에 가자고 속삭였던 남자친구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전에, 나를 떠났다. 내 마음도 별로 예전 같지는 않게 식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쨌건 버림 받은 건 내 쪽이었다.
우리는 분명 신촌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느끼한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홋카이도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어째서 고작 한 달을 참지 못하고 나를 떠난 걸까. 나는 그 약속 때문에 슬슬 지겨워지던 키스도 다시 열심히 했고, 처음에는 멋져보였으나 이제는 싫어하는 쪽에 가까운 그 애의 정리벽, 차가운 목소리, 조심성 많은 성격을 도로 좋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그 애가 나를 버린 이유를 생각했다. 그 애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보다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게 가장 큰 상처였다. 내 우주가 붕괴됐는데‘, 나’는 이미 우주가 존재했던 기억조차 없다. 이 우주를 어떻게 재건할 수 있겠는가.
결핍
처음에는 누워서 음악만 들었고, 그 다음에는 몸이 아팠다. 몸의 기능은 쇠했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왜 그 애는 나를 떠났나, 이전에 어떤 조짐은 없었나, 나는 시시한 인간인가, 어떻게 하면 끝나지 않은 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나….
생각은 한 점에서 시작해 가지를 쳐 나가기도 했고, 어떨 때는 한 생각 속에 푹 잠겼다가 기습적으로 생각을 흩뿌리는 액션페인팅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방 창문으로 번지던 붉은 노을이 또렷이 떠오른다. 그때 너무나 많이,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는 와중에 드디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한때 기다렸지만 이제는 끔찍한 겨울이 온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를 하듯 홋카이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애는 홋카이도에 갔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애보다 먼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냥 시간이 흘러 그렇게 된 걸까, 차가워진 공기가 정신을 차리게 한 걸까. 나는 정말 불현듯, 이 시점에서 내가 진정 궁금한 것은 사실관계의 확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궁금하고 욕망하는 것은 부재하는 대상인‘ 그 애’의 히스토리가 아니라, 그 애가 사라짐으로써 내가 겪는 이 엄청난‘ 결핍’을 충족시킬 방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그냥 그 애의 친구를 붙잡고 매섭게 몰아붙였으면 손쉽게 알아낼 수 있는 부분들을, 그저 이불 속에서 공상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핍을 채우려는 상상은, 실제를 보지 않고도 똑같이 그려내는 예언이 아니라 텅 비어 괴사하는 부분을 재생시켜주는 산소의 형태에 가깝다. 그것이 내가 결핍을 통해 배운 상상의 시작이다.
멀티 버전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몸은 회복되고 있었지만, 훗카이도는 고사하고 집 앞 마당에 나가 5분을 걷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떠난 그 애가 눈물을 흘리고 죄를 사하며 돌아오는 버전과, 내가 <Kill Bill(킬빌)>의 고고 유바리처럼 철퇴를 휘두르며 그 애의 사지를 난자하고 밤 12시만 되면 난자된 육신이 다시 재생되어 우리집 벨을 누른다는,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의 콜라보레이션 버전, 또 몸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을 때는‘ 알고 보니 그 애와 내가 이복남매’인 클리쉐 버전도 휘갈기듯 상상했다.
그리고 혼자 낄낄대며 대여섯 개쯤의 이야기를 굴리다가, 어느 순간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천천히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맷은 가장 익숙한 형태인 시나리오가 적당했다. 아, 지금도 그때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나의 이야기와 비슷했는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다 보니 스토리텔링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생겨 캐릭터와 상황과 내러티브가 가감되어 갔다. 나중에는 애인에게 차인 여자 주인공이 홋카이도에 그 남자보다 먼저 가려고 기 쓰는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장편 시나리오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영화와 드라마를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상상으로 완성하는 꿈
나에게 상상은 언제나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뼈아픈 결핍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상적인 대체재를 갈구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들의 숙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연애에 대한 미련, 정말 하고 싶었지만 서슬 퍼런 부모의 반대로 이룰 수 없었던 장래 희망, 언제나 부족했던 돈·시간·재능….
우리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 우리가 손쉽게 그러쥘 수 있는 것이라면 상상 대신 소유하면 될 일이다. 나는 아직도 홋카이도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정말 괜찮다. 우리가 손쉽게 그러쥘 수 있는 것이라면 상상 대신 소유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꿈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통해 로맨스를 완성하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지향
드라마 작가 | paleblue00@gmail.com
드라마·시나리오 작가. 2009년 MBC 드라마 <탐나는 도다>, 2010년 MBC 다큐멘터리 <성공의 비밀>을 썼다.
그 애와 난 홋카이도에 못 갔다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소식조차 모르고, 꿈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통해 로맨스를 완성하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홋카이도 심볼
벌써 10년 전 일이다.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겨울방학이 되면 함께 홋카이도에 가자고 속삭였던 남자친구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전에, 나를 떠났다. 내 마음도 별로 예전 같지는 않게 식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쨌건 버림 받은 건 내 쪽이었다.
우리는 분명 신촌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느끼한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홋카이도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어째서 고작 한 달을 참지 못하고 나를 떠난 걸까. 나는 그 약속 때문에 슬슬 지겨워지던 키스도 다시 열심히 했고, 처음에는 멋져보였으나 이제는 싫어하는 쪽에 가까운 그 애의 정리벽, 차가운 목소리, 조심성 많은 성격을 도로 좋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그 애가 나를 버린 이유를 생각했다. 그 애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보다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게 가장 큰 상처였다. 내 우주가 붕괴됐는데‘, 나’는 이미 우주가 존재했던 기억조차 없다. 이 우주를 어떻게 재건할 수 있겠는가.
결핍
처음에는 누워서 음악만 들었고, 그 다음에는 몸이 아팠다. 몸의 기능은 쇠했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왜 그 애는 나를 떠났나, 이전에 어떤 조짐은 없었나, 나는 시시한 인간인가, 어떻게 하면 끝나지 않은 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나….
생각은 한 점에서 시작해 가지를 쳐 나가기도 했고, 어떨 때는 한 생각 속에 푹 잠겼다가 기습적으로 생각을 흩뿌리는 액션페인팅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방 창문으로 번지던 붉은 노을이 또렷이 떠오른다. 그때 너무나 많이,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는 와중에 드디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한때 기다렸지만 이제는 끔찍한 겨울이 온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를 하듯 홋카이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애는 홋카이도에 갔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애보다 먼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냥 시간이 흘러 그렇게 된 걸까, 차가워진 공기가 정신을 차리게 한 걸까. 나는 정말 불현듯, 이 시점에서 내가 진정 궁금한 것은 사실관계의 확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궁금하고 욕망하는 것은 부재하는 대상인‘ 그 애’의 히스토리가 아니라, 그 애가 사라짐으로써 내가 겪는 이 엄청난‘ 결핍’을 충족시킬 방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그냥 그 애의 친구를 붙잡고 매섭게 몰아붙였으면 손쉽게 알아낼 수 있는 부분들을, 그저 이불 속에서 공상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핍을 채우려는 상상은, 실제를 보지 않고도 똑같이 그려내는 예언이 아니라 텅 비어 괴사하는 부분을 재생시켜주는 산소의 형태에 가깝다. 그것이 내가 결핍을 통해 배운 상상의 시작이다.
영화 <킬빌>
멀티 버전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몸은 회복되고 있었지만, 훗카이도는 고사하고 집 앞 마당에 나가 5분을 걷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떠난 그 애가 눈물을 흘리고 죄를 사하며 돌아오는 버전과, 내가 <Kill Bill(킬빌)>의 고고 유바리처럼 철퇴를 휘두르며 그 애의 사지를 난자하고 밤 12시만 되면 난자된 육신이 다시 재생되어 우리집 벨을 누른다는,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의 콜라보레이션 버전, 또 몸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을 때는‘ 알고 보니 그 애와 내가 이복남매’인 클리쉐 버전도 휘갈기듯 상상했다.
그리고 혼자 낄낄대며 대여섯 개쯤의 이야기를 굴리다가, 어느 순간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천천히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맷은 가장 익숙한 형태인 시나리오가 적당했다. 아, 지금도 그때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나의 이야기와 비슷했는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다 보니 스토리텔링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생겨 캐릭터와 상황과 내러티브가 가감되어 갔다. 나중에는 애인에게 차인 여자 주인공이 홋카이도에 그 남자보다 먼저 가려고 기 쓰는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장편 시나리오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영화와 드라마를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상상으로 완성하는 꿈
나에게 상상은 언제나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뼈아픈 결핍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상적인 대체재를 갈구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들의 숙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연애에 대한 미련, 정말 하고 싶었지만 서슬 퍼런 부모의 반대로 이룰 수 없었던 장래 희망, 언제나 부족했던 돈·시간·재능….
우리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 우리가 손쉽게 그러쥘 수 있는 것이라면 상상 대신 소유하면 될 일이다. 나는 아직도 홋카이도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정말 괜찮다. 우리가 손쉽게 그러쥘 수 있는 것이라면 상상 대신 소유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꿈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통해 로맨스를 완성하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지향
드라마 작가 | paleblue00@gmail.com
드라마·시나리오 작가. 2009년 MBC 드라마 <탐나는 도다>, 2010년 MBC 다큐멘터리 <성공의 비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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