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초는 짧고, 20초는 길다 ②
예나 지금이나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카피라이터가 돼요?”다. 카피는 실무를 하면서 카피로 크는 거란 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방법이 따로 있지 않을까 계속 묻는다. 어떻게 하든 들어만 간다면 카피로 크는 길에 들어선다. 어떻게 클까? 여기 어리버리한 여자 카피라이터가 광고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전설의 카피라이터 신입교육을 받으며 커가는 과정을 소소하게 풀어본다.
인쇄와 라디오보다 힘든 TV-CF 카피. 선배는 "할 말을 길게 다 쓴다. 그 후에 계속 줄여나간다" 이런 말만 던지고 땡!이시다. 해야 할 말을 줄줄이 쓰다 보면 금방 A4지 한 장. 이제부터 줄이자. 처음에는 신나게 줄인다. 이건 중언부언, 요건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다. 줄인다. 또 줄인다.
줄었다. A4지 반 정도로 말이다. 분명히 필요한 말만 남겼는데. 세상은 요지경이 아니라 카피는 요지경이다. 몇 시간을 끙끙거리다 선배에게 숙제검사(?) 받을 시간.
에라 모르겠다. 나도 이해가 안 되게 쭈욱 줄였다. 선배에게 보여준 것은 두 가지. A4지 반 장으로 줄인 카피와 네 줄로 줄인 카피. 보자마자 미친 듯이 웃는 선배, 어찌나 웃어대는지 난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서 있었다. "자, 같이 회의실에 들어가자." 그 날 회의실에서 선배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카피를 줄였다. 두 시간이 넘게 말이다. 카피 안이 하나 만들어졌다.
카피가 정리되었다는 것보다 회의실을 나왔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두 시간을 넘어 세 시간에 가까운 동안 토 나오도록 카피를 썼다. 종이에 쓴 카피도 많았지만 선배 앞에서 카피를 주구장창 읊었다. 무작정 앉아서 카피를 말하라고 할 때 처음엔 정신이 가출했다. 다음엔 입이 막혔다. 삐죽삐죽 말하기 시작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냅다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하니, 웬걸〜 재미있어진다.
그러다 입에서 단내 나도록 말로 카피를 썼다. 회의실에서 나올 때는 탈진상태로 거의 기어 나왔다..
"반전이 없다, 반전 가져와라~"
대우건설이 해외에서 잘 나간다고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간 광고를 만들어야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대우건설이 세운 건물·도로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자랑하고 싶다는 말. 기업PR 광고다.
기업PR 광고의 특징 중 하나가 재미없다,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지구촌 건설 대우건설, 파키스탄 고속도로’ 이런 카피만 써야 하니 당연하다. 그럼 선배는 "아니 이런 걸 누가 보냐. 재미가 없어 재미가. 재미있으려면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반전이 없어, 반전이. 반전 가져와."
<대우건설 기업PR : '인도'편>
반전도 재미도 없었지만 웅장함과 이국적인 풍경의 매력이 컸던 광고
여Na : 우리를 동방의 등불이라 노래했던 타고르의 나라, 인도. 이제, 대우건선이 그 불꽃을 밝힌다.
남Na : 지구촌 건설, 대우건설입니다.
그럼, 반전이 있는 카피는 무엇이냐? 쉐보레 크루즈5 광고가 그 예다. '남자'편, '여자'편 두 편이 멀티로 만들어졌다. 해치백 자동차로 디자인은 섹시하고 기능은 최첨단의 쉐보레 크루즈5. 얼마나 매력적인 차인가 하면, 처음에 보면 한 남자(여자)가 애인에게‘ 넌 너무 섹시해서 사람들이 가만 안 두잖아. 너 한 눈 팔면 안 돼!’ 하면서 몰아세운다. 마지막에 반전이 나온다. 알고 보니 남자가 몰아세운 건 사람이 아니라, 차다! 우와〜죽이게 멋진 차인가보다.
<쉐보레 크루즈5 '남자'편>
남 : 내 눈 똑바로 봐. 그 남자가 네 뒷태만 쳐다보고 있더라. 두 번 다시 그러지마, 알았어? 넌 내꺼야! 내꺼라고!
여Na : 질투를 부르는 숨가쁜 매력. 이것이 크루즈5의 본질이다.
남Na : Sexy & Smart CRUZE5
"요즘 유행어 어디 없니?"
15초 동안에 쓸 카피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브랜드 네임과 슬로건은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그걸 읽는 시간이 짧게는 2〜3초, 길게는 5〜6초가 소요된다. 징글(Jingle)이 있다면 1초는 더 잡아먹는다. 그럼... 카피는 한 줄에서 두 줄 정도가 듣기에 편안하다.
몇 자 안 되는 카피. 소비자의 머릿속에 남기기 위해선 임팩트(?) 있고, 매력적이고, 멋진 카피를 써야 한다.
몇 번의 아이데이션 단계를 거쳐 안이 결정되면 선배는 어김없이 나를 부른다. "요즘 유행어 중에 좋은 거 없냐? 다른 광고에서 안 쓴 걸로." '바빠서 텔레비전을 봐야 알지.'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 그럼 대충 나온다. 안에 맞게 적재적소에 낑겨 넣는다. 문맥 상 본 광고에 못 들어가면 트레일러라는 명목으로 맨 뒤에 따로 붙인다. 보통은 제품광고에 많이 이용된다. 소비자들을 픽 웃게 만들거나, 제품과 관련된 특성, 트라이얼 유도 등을 위한 카피로 많이 쓰인다.
영양구이 광고는 마침 모델이 코미디언 이홍렬. 이홍렬의 유행어인 '넌 잠도 없니'가 트레일러 멘트로 쓰였다. 유행어의 남발은 좋지 않지만, 적재적소에 잘 쓰인 유행어는 소비자에게 웃음을 주어 기억에 남기는 역할을 한다. 카피라이터들이여, 유행어에 민감해져 보자.
<동원 '영양구이'편>
이홍렬 : 밤, 대추, 표고버섯, 뭐? 영양밭솥이냐고? 짠~ 영양구이지.
여1 Na : 밤, 대추, 표고버섯이 쏘옥. 동원 영양구이.
이홍렬 : 후후 우와 영양 죽인다. 진짜… / 여2 Na : 동원 영양구이
이홍렬 : 애들 줄게 어딨어! / 아이 : 아빠! / 이홍렬 : 넌 잠도 없니?
"이런 카피를 써도 되나요?"
유행어는 보통 속어가 많이 사용된다. 줄임 말, 센 말, 인터넷 용어들이 유행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짱!이라는 말도 처음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을 때는 비속어로 분류되어 방송금지 용어였다.
유행어를 카피에 쓰는 일이 많지만, 표준어와 일반적인 정서라는 무형의 커트라인이 존재한다. 보통은 그 선을 지켜낸다. ‘좋은 사람들’ 카피를 썼을 때다.
역시나. 선배답게. 여러 카피 중에 하나를 보시더니 "왜 그 동안 이런 카피를 안 써왔어. 좋잖아. 정말로! 정말로!" '그런 카피를 써도 되나요?' 꼽혔다! "이 카피가 좋으세요?" "물론, '좋은 사람들은 젊은 애들한테 파는 팬티.' 꼽혔다〜 죽인다. 이걸로 가자. 좋아 좋아. 녹음실에 빨리 팩스 보내고 가자."
당시, 누구한테 완전 필이 확 박혀서 찍은 걸 '꽂히다, 꼽혔다'라는 말로 표현했었다. 여자가 뽑기 기계 안의 보디가드 팬티를 입은 남자한테 꽂혀서, 그 남자를 뽑아 허리 줄에 매달고 가는 내용의 보디가드 CF를 만들었다. 여자가 남자를 뽑는 순간에 들어갈 카피가 난항이었는데, '꼽혔다'로 결정된 것이다. 나중에 심의에 걸려 '뽑혔다'로 바뀌었지만, 모두가 좋아했었다. 고정관념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 세상에 안 되는 카피는 없다. 쓰지 말아야 할 카피도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부 다 카피의 소스이다.
<보디가드>
'꼽혔다'가 심의에 걸려 '뽑혔다'로 바뀌었다.
여 : 그래, 역시 보디가드! / 남 : 뽑혔다~ 하하하하
여 : 팬티 이상의 팬티, 보디가드
"사람들이 다 아는 말로 쉽게 써야지"
자동차를 담당하던 시절이다. 처음 회의부터 이상한 분위기였다. 계속 '쉬운 말로 쉽게 한 번에 다 알게 써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비주얼은 차만 나오면 되지 더 뭘. '15초 중에 12초는 차가 나와야 한다'류의 말도 계속.
설마 했다. 진짜 그렇게 하랴.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신차가 출시되면 인쇄의 헤드라인은 000년형 탄생! 신차! 등의 카피로 집행되었다. CF는 다르겠지. 위로를 해보지만, 늘 좌절한다. 같다. '탄생'이 안 들어가면 카피가 아니다. 어느 한 시기에는 그랬다. '탄생'이 쉬운 말의 대명사였다.
<트라제XG 런칭광고>
여Na : 그랜저XG로부터 트라제 XG가 시작됩니다. 또 하나의 XG, 트라제 XG 탄생!
"김태형 선생님 카피는 꼭 봐라. 일본 카피도 봤지?"
카피라이터들이 숙명처럼 듣는 전설이 있다.
“김태형 선생님. 선생님 카피 봤지? 그렇게 좀 써봐.”
웰콤에서 하루는 양주 광고 카피를 쓰다가 풀리지가 않더래. 그래서 김태형 선생님한테 부탁했더니 30분 만에 카피 한 줄 주셨는데, 그게 팔렸단다. '한 병 더 가져올 걸.' 캬`~ 술이 얼마나 좋으면 이렇게 아쉬울까. 우리 딱 한 병만 더 마시자. 이렇게 말하지. 술맛도 술자리의 분위기도 죽음이었을 거다.
김태형 선생님은 한국 카피라이터의 전설이다. 선배는 김태형 선생님의 카피는 꼭 모으도록 했다. 지금 봐도 선생님의 카피는 대단하다. 아니 죽음이다. 선생님과 함께 나오는 두 번째. 일본 광고의 카피다. JR동경과 산토리 위스키의 카피는 카피라이터가 따라야 할 교본처럼 말한다. 저렇게 써라.
<산토리 위스키 광고 카피>
남`: 아버지는 매일 밤 위스키를 마셨다. 산토리 각병을 마셨다. 글라스로 두 잔, 석 잔, 그 당시 소박한 생활 속에서도 각병은 아버지에게 진기할 정도의 사치였다. "멋있는 자전거를 갖고 싶어요.” 어느 날 난 아버지를 졸랐다. 멋지게 반짝이는 자전거는 1만 6천엔. 당시 아버지 월급의 반을 넘었을 게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위스키를 끊었다. 그 빛나는 자전거와 맞바꾼 격이 된 아버지의 위스키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Na: 그 당시 아버지의 위스키, 지금은 나의 위스키. 산토리 각병
지금도 일본 카피라이터 상을 받는(TCC) 카피들에는 산토리의 음료광고가 많다. 틈 날 때마다 자료실로 올라가 TCC 수상연감을 보라. 일본어를 몰라 해석이 안 된다고요〜 음하하〜 베이시스넷에 들어가 해외광고 검색을 하면 아주 아주 친절하게 한글로 해석되어있다.
F.G.I에서 나온 Insight를 카피로?
요즘은 많은 광고들이 F.G.I를 통해 카피 테스트를 한다. 결과가 높게 나와야 광고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까지 카피라이터들은 F.G.I 에서 나온 테스트 결과는 물론, 인사이트(Insight)조차도 싫어했다. 그만큼 F.G.I에 대한 신뢰성이 없었단 증거. F.G.I가 가진 단점 중 하나는 한 사람이 분위기를 ‘ㄱ’이 좋다 라고 몰아가면 다들‘ ㄱ’이 좋다고 결정한다는 점이다. 그런 테스트 결과를 어떤 카피라이터가 믿겠는가.
지금은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찜찜함은 남아있다. 위스퍼 광고를 할 때다. 아주 강력한 흡수력의 신제품이 나왔다. 크기도 더 커졌다. 광고주의 마지막 컨펌을 받은 안은 2개. 2개의 시안이 F.G.I에 붙여졌다. 1번의 키워드는 '양이 많고 진한 날에', 2번의 키워드는 '둘째 날엔.' 담당자들은 2번으로 될 줄 알았다. 둘째 날보다 강력한 키워드는 없다(여자들은 안다). 살아있는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압도적으로 1번이 많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오죽하면 1번 키워드에 2번 키워드를 섞으려 했다. 광고주가 P&G인 상황에선 가당치도 않는 일. 눈물을 머금고 1번 키워드로 광고는 만들어져 방송을 탔다.
<위스퍼>
김민선 : 아〜참! 언니 언니〜〜. / 여: 응? / 김민선: 위스퍼가 확 바꼈다. / 여: 어? 정말? / 김민선 : 쏘옥 흡수하니까 그느낌이 깨끗하고 부드러워서 파우더 한 느낌이야 / 여 : 진짜? / 김민선 : 어〜진짜 / 여Na : 양이 많고 진한 날엔 쏙 흡수하는 위스퍼소프트클린 / 김민선 : 써봐! 옛날 거랑 비교가 안 돼 / 여Na : 위스퍼소프트클린, 나를 지켜주니까
F.G.I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믿지 말라는 것도, 맹신하라는 것도 아니다. 좋은 카피를 쓰기 위해서라면 F.G.I에서 나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그래도 소비자의 말을 듣는 창구다. 선배는 절대 믿지 말라. 시간낭비다 했지만. 광고 상황은 변하는 법. 취할 건 알아서 취하자. <세스코에 대한 이야기부터 다음 호에 계속>
심의섭
Chie Copy | adel@hsad.co.kr
나를 사랑하기가 제일 어렵다. 특히, 크리에이터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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