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나이 40.7세, 그 흔한 아이돌 한 명 없이 불안하게 시작된 KBS의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이 일 년 만에 평균 시청률 8%에서 20%로 급상승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모름지기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게 목적인 예능이라면 순정 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뽀얀 얼굴에,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은 초콜릿 복근으로 무장한 아이돌을 최소 한둘은 꽂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신원호 PD는 ‘아저씨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이러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철저히 배신한다. 그리고 일 년. 40대 남성의 리얼한 고군부투기가 예상외로 먹히기 시작했다. 이경규를 포함한 7명의 멤버들은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라는 부제를 가지고 사는 동안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 해봐야 하는 일 등을 매주 하나씩 미션을 통해 실천해 나간다. 그 모습이 유쾌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중년 남성도 충분히 귀여울 수 있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안습’이기도 해서 자꾸만 시선이 간다.
‘아저씨들에게도 저런 꿈이 있었단 말야?’하며 놀라고, ‘그래도 포기 않고 도전하다니 대단한 걸’하고 감탄하다 보면 꽃미남 아이돌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 따윈 금세 잊게 된다. 특히 이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40대 남성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친근한 아저씨들의 무한도전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40대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로망을 떠올리게 하고, 심지어 ‘나도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을 유발한다. 이쯤 되면 아저씨들의 반란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 반란에 벌써부터 많은 40대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로망 찾기’ 프로젝트
영화 <쉘 위 댄스>는 갑작스럽게 무기력증의 기습을 받은 한 중년 남성이 사교댄스를 시작하면서 삶의 활력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중후한 매력의 야쿠쇼 코지와 더불어 강하게 기억에 남은 것이 바로 포스터 문구이다. ‘다시 한 번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자.’ 영화가 개봉된 당시만 해도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그저 주인공을 따라 마음속으로만 스텝을 밟으며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지금 40대 남성들이 달라졌다. 정말 다시 한 번 인생의 주연이 되기 위해 평소 꿈꿔오던 로망을 과감히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 관계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골프 대신 트럼펫이나 색소폰·드럼 등의 악기를 배우거나, 영화 속 야쿠쇼 코지처럼 사교 댄스장을 찾거나, 심지어는 패러글라이딩 ·MTB 등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한다. 마운드에 서보는 것이 꿈이었던 기억을 더듬어 사회인 야구단을 창설하고, 무대 위에서의 열정을 떠올려 직장인 밴드를 만든다. 이런 열풍을 반영하듯 지난 4월에는 홍대에서 제1회 직장인밴드경연까지 펼쳐졌다.
어디 그뿐인가. 디지털 기기에 대한 열망 또한 십대 못지않다. 최근 복잡한 스마트폰 활용법 때문에 쩔쩔 매는 사람들을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스마트폰 활용법’ 강의를 개설하고 있는데, 강좌 신청 고객의 40% 이상이 남성이고, 그 중 60% 이상이 40, 50대 남성이라 한다. 살짝만 건드려도 화면이 확확 바뀌고, 어플리케이션이니 앱스토어니 생소한 단어들이 난무하지만, 디지털 세대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면 고3 수험생으로 빙의해 열공할 수밖에 없다. 40대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이용자도 증가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공식적으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유저가 3억 명인데, 그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연령대가 10대나 20대가 아닌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이라 한다. 물론 해외 유저들을 포함한 수치이긴 하지만 사회생활에 있어 인맥의 중요성을 아는 30?40대들이 적극적으로 소셜 네트워크 형성에 가담한다는 얘기다.
40대 남성은 문화시장에서도 주요 소비층으로 급부상했다. 지난 3월 31일 포크록의 전설이라 불리는 밥 딜런의 내한공연이 있었는데, 티켓 가격이 VIP석은 약 20만 원에 달했지만 좌석은 거의 매진되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팬들을 보니 대부분이 30, 40대. 하지만 10대 팬들로 꽉 찬 여느 아이돌가수의 콘서트장 못지않게 뜨거운 열기와 호응으로 가득했다.
그린데이·시카고·백스트리트 보이즈·휘트니 휴스턴 ·딥 퍼플 등 왕년에 이름 좀 날렸던 스타들이 올해 우리나라를 찾는다. 그들의 음악에 열광했던 팬들이 40대가 되고 문화소비 주체로 떠오르면서 옛 향수를 떠올리게 해준다면 언제든 지갑을 열겠다는 포스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NOMU족
“혹시 여자가 생긴 게 아닐까 했다니까.” 사다주는 옷이면 아무 것이나 상관없이 몸에 걸치던 마흔 줄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쇼핑독립선언’을 외치자 선배는 가장 먼저 ‘바람이라도 피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쇼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남편이 돌연 패션에 관심을 갖더니 급기야 몸에 맞는 의상을 찾아 직접 원정에 나선다면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오해일 뿐. 이들은 늦바람난 아저씨가 아니라 일명 ‘노무족’이다. ‘노무(NOMU)족’이란 ‘No More Uncle’의 줄임말로, ‘난 이제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에요’라고 외치며 아저씨이기를 거부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을 추구하는 40, 50대 남성을 일컫는 신조어다. ‘아저씨’하면 우선 몸무게와 상관없이 불룩한 배와, 면도 뒤에 로션 바르는 것도 귀찮아 해서 항상 각질이 일어난 얼굴, 그리고 늘 무채색 계열의 옷만 입고, 휴일엔 잠만 자거나 업무상 골프나 등산을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노무족은 다르다. 20, 30대 부럽지 않은 탄탄한 몸매에 기초화장품은 기본, 기능성 화장품 사용은 물론이고, 정기적으로 피부관리도 받는다. 아내가 사다주는 옷만 입는 아저씨와 달리 혼자서도 적극적으로 쇼핑에 나서며 밝은 색 캐주얼을 주로 입는다. 휴일에는 레포츠나 취미생활을 즐긴다.
노무족들은 생각한다. ‘마음만 젊다고 해서 정말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젊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래서 벤자민의 시계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투자가 아깝지 않다고.
이유 있는 반란
이렇게 40대 남성들이 자신의 로망 찾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저씨라는 단어의 속박에서 벗어나 젊어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소외되었던 문화생활에서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우선 갑작스레 찾아온 무력감과 무기력증을 꼽을 수 있다. 태엽이 감긴 장난감시계처럼 집과 직장을 오가다보니 어느 날 문득 돈 버는 기계로 전략하고 말았다는 회의감이 든다. 물론 윗세대의 40대들도 이러한 회의감에 빠졌었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월급봉투 두께와 상관없이 가장의 권위라는 것이 살아있던 때가 아니었던가.
두 번째는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인생도 2모작이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에게 마흔은 후반기 시작을 알리는 힘찬 호루라기 소리와 같다. 전반전 경기가 끝날 때쯤 지쳐있던 선수들이 휴식시간에 심신을 다잡고 후반전 초반에 다시 활기찬 움직임을 보이듯, 제2의 인생의 청춘이라 할 수 있는 40대에 진입하자 다시 한 번 새로운 목표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세 번째, 40대에 들어서면서 현저하게 떨어진 체력 때문이다. 체력 하나 만큼은 대한민국의 제일이라 자부했는데 갈수록 밤이 무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 그러다 보니 ‘왜 이러셔,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아직 짱짱하다고’라며 자기 증명을 하려는 심리가 작동되는 것이다. 또한 40대는 그 윗세대와는 달리 문화 소비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고, 문화도 즐겨본 사람이 즐기는 법. 20대는 빈털터리였고, 30대는 직장생활로 바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40대가 되어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 문화소비자로 적극 나선 것이다. <남자의 자격>이 인기를 얻은 것은 그들이 매번 미션을 성공해서가 아니다.
부족하지만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비로소 당신에게 남자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라고 적힌 ‘자격증’을 수여하고 싶을 정도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로망이 있다면 늦지 않았다. 그래봐야 이제 고작 마흔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