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이는 심리학 열풍은 의사소통 불가인 사회에서 자신의 마음조차 가늠하기 힘든 현대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심리학 전성시대’다. 서점에는 심리학 관련 서적이 즐비하고, TV에서는 타인의 속마음 원정기를 내보내고 있으며, 다양한 심리치료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과연 심리학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비장의 팁이라도 있는 걸까?
전 국민의 ‘심리 탐구생활’ 열풍
“이번 주‘남녀 생활 탐구’ 봤어? 정말 대박 공감이라니까.”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과제물로 내주었던 탐구생활은 그렇게도 거들떠보지 않던 친구들이 요즘 전혀 다른 ‘탐구생활’에 빠져 열을 올리고 있다. 케이블TV에서 방송되고 있는 한 프로그램 얘기다.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도 남자 몰라요. 사소한 것 하나부터 너무 다른 남녀’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동일한 상황 속에 보이는 남녀의 행동과 심리상태를 코믹 어법으로 풀어내 최근 20, 30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배우들의 실감나는 코믹 연기가 웃음 폭탄을 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궁금해 하던 이성의 심리를 매우 솔직하게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보여줘 시청자의 공감을 얻은 것이 인기 요인이다. 그래서 마치 이 프로그램을 이성심리에 대한 동영상 강의쯤으로 생각하며 ‘열공’하는 시청자가 늘고 있다.
하긴 어디 이성뿐이랴, 그 속을 알 수 없게 눈을 희번덕거리기만 하는 늙은 여우 같은 직장상사의 심리,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알아듣는 듯하면서도 뒤에서는 엉뚱하게 삽질만 하고 있는 후배의 심리부터 시작해, 주식 정보를 혼자 독점하려는 동창의 심리, 계약을 해 줄 듯 말 듯 애를 태우는 거래처 직원의 심리 등, 정말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만 있다면 아마 온 국민이 공부에 전념하는 학구적인 사회가 될 텐데 말이다. 다시 말해 상대의 심리를 알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이 때 아닌 ‘탐구생활’ 열풍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속마음 염탐기의 인기 행진으로 MBC에서도 ‘네 마음을 보여줘’라는 심리탐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전 국민 마음 건강 촉진 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스타와 일반인들의 심리상담을 해 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의 저자 김혜남은 ‘현대사회는 심리전의 사회’라고 표현한 바 있다. 타인의 심리를 적절히 파악하는 자가 결국 현대사회에서는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 위기를 맞던 광고기획자 주인공 멜 깁슨도 여자들의 심리를 읽게 되는 능력 덕분에 일과 사랑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지 않았던가. 그래서 최근 우리 사회는 그 심리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각종 전략들이 난무하고 있다. 심리전에서 우세할 수 있는 각종 책략법들이 서점을 강타하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심리전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훈련하는 각종 심리테스트들이 떠돌고 있다. 직접 전략을 짜기 위해 학생들은 대학의 심리학과로 몰리고 있고, 심리전에서 열세를 느끼는 사람들은 혹시 자신의 전술이 잘못 됐을까 하는 걱정에 각종 심리 테라피스트를 찾기도 한다.
넘쳐나는 ‘타인 마음 공략’집
심리학의 인기는 서점에서 가장 먼저 실감할 수 있다.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 <위험한 심리학> <영화로 말하는 치유의 심리학> <슬럼프 심리학> <살짝 미쳐가는 세상에서 완전 행복해지는 심리학> <당돌한 심리학>등 현대인의 정신적 혼란을 진단해주는 심리서적 출간이 출판계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 발행된 출판전문지 <기획회의>(259호)에서 2009년 출판계 흐름을 정리하며 ‘출판계 키워드 30’을 꼽았는데 5위로 ‘심리학책의 진화’를 언급할 정도다. 한 때는 지속적인 경기 불황으로 인해 스펙 쌓기에 도움이 되는 자기계발서나 처세술이 대세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스펙을 쌓아도 성공과의 거리감이 줄어들지 않자 사회에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다고 인식하고 삶의 의미를 자신의 내면과 주변 관계에서 찾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심리학 열풍 현상에 대해 주간조선(2073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잇따른 경제난에 따른 취업문제와 교육문제, 정치적 혼돈 등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지며 심리학을 통해 빡빡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의 심리학은 사회의 멘토(Mentor·조언자)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멘토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무한경쟁시대에 승자가 되고자 조언을 얻기 위해 서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과 심리를 분석해 비즈니스와 연애에 도움을 주는, 일종의 ‘관계지향형 인간’을 위한 참고서적들을 비롯해, 무한경쟁으로 지친 그들을 다독여주고 위로해 줄 각양각색의 치유서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대 심리 간파극에 좋은 힌트가 될 뿐 아니라, 내 심리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불안해하는 마음을 잠식시켜주는 훌륭한 위안이 된다.
아픈 마음 치료해 드려요
친구 A는 주기적으로 타로점을 본다. 그녀의 질문은 한결같다. 언제 취업이 될까 혹은 언제 애인이 생길까가 아니다. 대신 “제 맘을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원하는 것이 뭘까요?”다. 상담자 입장에서 보자면 참 황당한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을 타로카드가 대신 읽어준다고 생각한다. 우울하거나 불안하지만 그 이유를 모를 때면(내 생각엔 이유를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을 때인 듯하지만) 심리를 꿰뚫어 보고 문제의 원인을 제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싼 돈 내고 알고 싶은 것이 미래가 아니라 고작 자신의 마음이라니. 그녀에게 타로 마스터는 미래 예언자가 아닌, 고민을 들어주고 심리를 안정시켜 주는 상담자인 것이다. 심리상담을 위해 서양인들은 테라피스트를 찾고, 한국인들은 점집을 찾는다 하지 않던가.
하지만 심리학 열풍으로 자신의 내면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무릎이 닿기도 전에 마음을 꿰뚫어 보는 점쟁이 대신,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밀한 진단과 체계적인 치료를 행하는 테라피스트를 찾는 수가 증가하고 있다. 책을 통한 자가치료법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전문가에게 SOS를 요청하기 시작한 것. 그 수요가 늘어나자 방법 또한 다양해졌다. 그 중에서도 색채를 이용해 치료하는 컬러테라피가 인기다. 색이란 특정 파장의 빛에 의해 나타나는데, 뇌하수체에 인지된 그 빛 자극이 자율신경계와 연결되어 인간의 정서와 기분에 영향을 준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뿐인가. 직접 그리고 만드는 미술 행위를 통해 심리를 치료하는 ‘미술치료’, 음식을 매개로 예술활동을 하면서 치료받는 ‘푸드아트테라피’, 상담자와 피상담자가 인형을 매개로 소통하면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인형극테라피’, 영화를 이용한 ‘시네마테라피’, 향기로 심리를 다스리는 ‘아로마테라피’ 등 각양각색의 방법이 심리치료에 이용되고 있다.
소통을 위한 몸부림?
자신의 내면이든 상대방의 내면이든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좋은 의미일 수 있다. 빡빡하고 퍽퍽한 현대사회를 심리학을 통한 자기성찰로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의지의 발현이니까. 설령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빼앗아야 성공한다는 생각으로 심리학에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정보를 수집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결국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니 말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심리학 인기몰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곽금주 교수도 “세계적인 심리학자 조직인 미국심리학회 회원 수만 15만 명에 이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심리학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작 심리서적 두어 권 읽고 인간의 심리를 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심리를 논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며 걱정을 내비쳤다. 이러한 염려가 왜 생기는지는 아래 질문의 예를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다.
Q)초능력 하나만 몸에 지닐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1 투시능력 2 예지능력 3 순간이동 4 염력 5 투명인간 6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
이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심리 테스트 중 하나를 옮겨온 것으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보는 테스트란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은 대인능력, 2는 경제력, 3은 체력, 4는 인내력, 5는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탈피, 6은 이성을 끄는 힘.
물론 재미삼아 해보는 것이니 신빙성 없다 치부하고 가볍게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이렇게 간단한 테스트로 내면이나 무의식 등을 판가름할 정도로 인간이 단순하다면 심리학이라는 학문조차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간혹 타인과 자신의 정확한 심리분석 없이 시중에 무작위로 떠도는 엉터리 테스트 결과로 적성을 결정하거나 심리학 책 한두 권이 말하는 단편적인 내용으로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규정짓고, 타인을 판단하는 행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최근 보이는 심리학 열풍은 의사소통 불가인 사회에서 자신의 마음조차 가늠하기 힘든 현대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부디 열풍이 긍정적으로 방향으로 불어 마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에 활용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