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의 슬로건이나 아디다스의 슬로건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왜’를 잃어버렸을 때 푸마의 슬로건(?) ‘Play your own game’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딴 생각’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광고가 있었다. 험준한 산을 오르고 무전 배낭여행을 하고 텐트를 치고 비바람을 맞고, 심지어 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개고생’이라는 강렬한 말로 갈무리한다. 이어 ‘집에서 쿡해’가 결론으로 나온다. 그런 개고생의 반대편에 안락과 오락의 간편한 세상이 집 안 당신의 눈앞에 있다고 말이다. 변우민이 등장했던, 소위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 이 광고는 단숨에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문득 ‘개고생’이라는 말의 그 ‘개’는 집을 나가는 것이 고생일까 의문이 들었다. 개를 길러본 분은 알겠지만 개는 집을 나갈 때마다 너무 좋아한다. 개는 규칙적으로 집을 나가 산책하고 더러는 맘껏 뛰어놀 수 있어야 좋아한다. 반대로 개를 하루 종일 집에 가두어두면 우울해지고 소침해지고, 이야말로 ‘개고생’이다. 같이 놀아주고 집 밖을 나갈 주인이 없는 개야말로 불쌍한 개다. 그럼 사람은 개가 아니니까 다르다고 해야 할까. 노약자나 특수한 사례를 빼면 그렇지 않지 싶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젊어서 실컷 고생을 해보고 나이 먹은 뒤 어느 한가한 날에 꺼내는 즐거운 무용담이자 추억이다. 개고생이란 ‘날것의 고생을 원해서 해보는 도전이자 놀이’다. 이 경험을 다양하게 한 사람일수록 삶의 의욕과 의미를 더 많이 찾게 되고 더 많이 누리게 되는 것 같다. 하여 대학생들이 무리지어 국토순례대장정의 개고생을 하면서 울고 웃는 것이겠고, 심지어 냉랭했던 부모 자녀가 해병대 체험캠프를 통해 눈물 콧물 쏟는 개고생을 하더니 서로 부둥켜 앉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일 게다.
‘어떤 생각’
‘생각대로 하면 되고’ 역시 잘 알려진 광고로 계속 변태를 거듭하고 있다. 이때의 ‘생각’이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아주 잠깐씩 떠올리고는 이내 ‘잊어버리는’ 몽상·공상·소망·궁리 등이다. 왜 이내 잊히는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길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고 곧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 실현 불가능한줄 알면서 왜 굳이 떠올리는가? 사람은 충족 불가능한 상상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광고는 ‘순간의 딴 생각’이 ‘바로 그 순간에 이뤄진다’고 함으로써 불가능의 ‘불’을 없애는 주문이다.
궁금했던 것은 이 광고의 핵심이 ‘생각대로 되고’에 있을까, 아니면 ‘하면 되고’에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아마도 ‘생각대로 되고’이지 싶다. 핸드폰 이용 광고이므로 ‘생각대로 손가락 한번 까닥하면 바로 된다’고 해야 멋지게 다가온다. 그런데 여기에 굳이 ‘하면’이 들어간 것은 손가락 놀림이 아니라 소비자의 자발적 욕구와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여 이 핸드폰 이용 서비스는 ‘생각대로 되고’를 ‘준비’해 놓았으니, 소비자 당신이 ‘하면’으로 선택하고 참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단계를 한 호흡으로 만든 절묘한 조합이다.
그런데 ‘하면 되고’만 떼어보면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다. 바로 ‘하면 된다’는, 산업시대의 익숙한 구호를 쿨한 느낌으로 바꾼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하면 된다는 ‘자기계발서’류의 암시와 상통한다. 그러나 마음먹고 해도 번번이 잘 안 되는 것은 세상이 만만치 않아서이기도 하거니와 마음이라는 놈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기 때문이다.
결국 ‘하면 되고’는 ‘해도 해도 안 되고’, ‘되면 하고’, ‘하면 하고’ 등과 같은 여러 결의 다양한 인생 경험들 중 하나인 셈이니, 이것만 맹신하면 큰 코 다칠 수 있는 말이다.
‘Play your own game’
이상 두 개의 광고를 살펴본 요지는 이렇다. 광고의 메시지를 뒤집어 보기도 하고 샛길로 빠져나가서 딴 데로 가보기도 하는 짓이 재미도 있거니와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데 제법 요긴하다는 것이다. 광고란 마치 경주마의 눈 옆 시야를 가리개로 좁히듯 소비자로 하여금 오직 정해진 목표물(상품)을 향해 그것만 보고 달리게 하려고 조급하게 굴곤 한다. 이런 광고는 재미가 없다. 반면에 시야를 터서 여러 갈래의 상념이 뻗어나갈 수 있게 만든 광고는 재미도 주고 상상의 빈 공간을 다채롭게 채워나갈 수 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비가 와도 걷습니다’, ‘당신에게 워킹은 완벽한 스포츠입니다’, ‘그런데 왜?’ ‘러닝화를 신고 걸으시죠?’ 네 문장이 끝인 프로스펙스의 워킹스포츠화 광고다. 러닝은 스포츠고 워킹은 아니라는 고정 관념에 워킹은 진짜 스포츠라는 새로운 관념을 대비시켜 러닝화와 구별되는 워킹화의 독자 영토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여기서 핵심은 ‘비가 와도 걷는다’에 있다. 워킹은 눈비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진정한 스포츠라는 메시지를 직접 말하지 않고도 소비자의 상상으로 감정 이입하게 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취향 탓에 광고에 상품 이미지가 직접 등장하지 않으면서 재미있거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광고를 선호한다. 특히 메인 카피나 슬로건에 주로 반응한다. 창업가 정신 혹은 기업가 정신에 대해서 대학생 등 청년에게 강의를 할 때면 결론 부분에 가서는 다음 세 스포츠 회사의 광고에 등장하는 슬로건을 인용할 때가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 데다가 거기에 또 다른 메시지를 넣어서 이야기를 하면 연상 작용 덕에 기억이 한층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먼저 ‘Just do it’이라는 나이키의 광고 슬로건이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기가 너무 어렵거나 힘이 들어서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는 바로 그것을 하는 것이 기업가 정신의 요체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여럿 모여서 조직을 만들면 조직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만 모두가 회피하게 되는 ‘3D’ 부류의 일이란 게 꼭 있다.
이때에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누가 하려나 지켜보지만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은 바로 그것을 직접 그것부터 먼저 한다. 이 슬로건은 ‘그것이 좋아 보이고 멋지니까 바로 그것을 한다’가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데 기피하는 그것을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다음은 ‘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아디다스의 광고 슬로건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한편에서 누군가는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고 말이다. 이처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관건은 모두가 그 한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믿게 되느냐에 달려있다. ‘저 사람이 그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믿는다’고. 이렇게 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 한 사람의 말대로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응원을 하게 된다.
끝으로 ‘Play your own game’이라는 푸마의 슬로건이다. 이것이 푸마의 광고 슬로건으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새로 부임한 대표가 이 모토를 강조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나름의 존재 가치와 애초의 목적이 있어서 생겨난 법이다. 그러나 일을 하다보면 배보다 배꼽이 커져서 존재가치와 목적을 잊은 채 술이 술을 먹는 방식으로 성장논리에 사로잡혀 되는 대로 여기저기로 마구 뻗어나가서 문제를 일으킨다. 나이키의 슬로건이나 아디다스의 슬로건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왜’를 잃어버렸을 때 푸마의 이 슬로건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나만의 방식’
이야기를 맺자. 광고는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누구나 가장 쉽고 짧고 강렬하게 호흡하는 스토리텔링의 한 형식이다. 이것이 일방향의 전달이 되면 처음엔 눈길이 가도 금세 피로해지고 짜증이 난다.
이에 비해 쌍방향의 공명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는 광고는 제1의 스토리텔링이 되어 제2와 제3의 자발적 스토리텔링을 만나서 변태하며 진화한다. 생명력이 오래 가는 광고는 대체로 이렇다고 생각한다. 반면 금세 막을 내리는 광고를 보면 자기 꾀에 넘어가서 비판과 반감을 사는데, 대체로 의욕 과잉의 산물이자 상상력 빈곤의 자기 폭로일 때가 많다. 안 하느니 못한 광고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