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0 : 왜 이렇게 Gay가 많이 나와?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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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den Birth _ Why ‘Gay’?
   이민희 | 문화 칼럼니스트 / limini@paran.com
팝/재즈 전문 월간지 <프라우드>에서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국내 라이선스 팝 앨범 해설지 작성과 함께 여러 월간지에 대중문화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일하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될까 고민하고 있는 중.
 
왜 이렇게 Gay가 많이 나와?
 

‘게이’는 어감이 아주 수상하다. 완곡하게는 누군가를 놀리듯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 그리고 과격하게는 대상에 대한 혐오를 드러낼 때 쓰는 말인 게 분명하다.

“Korean is gay.” 최근 결국 팀 탈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룹 2PM의 멤버이자 미국 영주권자인 재범이 2년 전 글로벌 커뮤니티 마이스페이스에 남겼던 기록의 일부다. 재범의 저 문제적 문장은 기록의 경위를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여론이 ‘양키 고 홈’으로 단결하는 단서가 되었다. ‘Gay’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는 명사 말고도 통상적으로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뜻의 형용사로 쓰인다는 걸 알아채는 건 미국사람 아니어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언자의 성격을 비롯해 발화시점과 문맥을 함께 고려해 용례를 파악하는 게 사실 우선이고 더 공정하겠으나, 어쨌든 그 ‘게이’는 어감이 아주 수상하다. 완곡하게는 누군가를 놀리듯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 그리고 과격하게는 대상에 대한 혐오를 드러낼 때 쓰는 말인 게 분명하다. ‘게이’는 일반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게이가 아닌 다수’의 보편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프레임 속의 동성애
그런데 우리는 그 ‘일반적이지 않은 무엇’을 자주 보고 있다. 그 일반적이지 않은 게이의 이야기가 작게든 크게든 일상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남자(로 위장해야 했던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설정과 과정의 긴장감을 우리는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2007)를 통해 진지하게 즐긴 바 있다. 이 일반적이지 않은 영역을 보다 과감하게 묘사하려는 시도는 트렌디 드라마보다 영화가 훨씬 유리할 수 있었다. 역사적 팩트의 권위를 동원한 시대극 <왕의 남자>(2005)는 희극과 비극이 안겨주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우정과 사랑의 경계가 희미한 두남자의 기구한 사연에 집중하는 영화였다. 한편 <천하장사 마돈나>(2006)는 부모가 인정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하는 성정체성을 조기에 발견한 소년이 자신을 지키는 과정을 그렸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동성 간의 사랑을 이야기한 영화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가 어떻게 동성애를 다뤄왔고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왔는지를 기록한 문헌이 있을 정도로 많다.
한편 성소수자(性少數者)가 쉽게 노출되는 또 다른 영상으로는 ‘해드’ 혹은 ‘세드’를 꼽을 수 있다. 이른바 ‘미드·영드·일드’ 등의 해외 드라마 혹은 세계의 드라마를 통칭한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보다 풍성하게 접하게 된 분야로, 시즌별로 다운받아 즐기는 다양한 해외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성소수자 캐릭터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었다.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처럼 노골적으로 성소수자 주연 드라마임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상 성소수자의 등장을 일상으로 간주하는 사례들이 더 많다. 성소수자를 마치 옆집 남자, 혹은 3남 2녀 중의 차녀로 소개하면서 그들을 평범한 인간군상의 하나로 묘사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백인이 아닌 다양한 인종에게 배역을 주는 관습과 비슷한 방식이다.

패션계와 십대의 동성애
성소수자가 두드러지는 또 다른 세계는 패션이다. 패션계에서 성소수자는, 특히 게이는 업계의 최전선에 위치해 트렌드를 주도한다. 일례로 패션의 메카 뉴욕에서는 게이가 아니면 그 분야에서 절대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주류 패션계에 입성하기 위해 게이로 위장하는 경우들도 더러 있으니, 패션계에서는 게이라는 성정체성이 사회적 진출과 계급 상승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게이가 패션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의미이자 게이 디자이너 및 스타일리스트의 취향과 작품이 각종 패션쇼와 패션지와 화보를 통해 광범위하게 노출되고 영향력을 갖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그들의 성과는 일상으로 가지를 친다. TV 스타의 코디로, 그리고 이른바 ‘스트리트 패션’으로.
남성 성소수자의 취향이 꼭 이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인식이 ‘그것은 게이의 언어’라고 믿는 클리셰(Cliche)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남자의 화장을 꼽을 수 있으며, 보통 눈을 부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런 남자들을 자주 본다. 누레이브 룩(Nu Rave Look)으로 무장하고 무대에서 노래하는 남자 가수, 혹은 지면이나 브라운관에 마른 육체를 전시하는 남성 모델을 통해서. 피부보정 수준에 머물러 있던 간단한 메이크업이 게이의 언어를 참고해 미학적 연출의 차원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들은 그냥 남자와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그냥 남자보다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 눈썹을 다듬고 눈 끝을 색칠한다. 게이처럼.
한편 현실의 어떤 남성들은 과감한 화장 대신 패션과 문화적 취향으로 게이의 성향으로 판단되는 요소들을 흡수하자 헤테로섹슈얼(이성애자)과 호모섹슈얼(동성애자) 사이에 위치하는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힙스터(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 트렌드에 민감한 이들을 지칭한다)가 게이의 문화를 피상적으로 훔쳐가고 있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했다.
성소수자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또 다른 거대한 군단이 있다. 동인문화 속의 십대다. 좋아하는 스타에서부터 만화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남자를(그리고 여자와 여자를) 사랑으로 묶어 작품으로 완성하기를 즐긴다. 그들이 상상하고 표현하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때때로 글(팬픽)과 그림(야오이)을 넘어 분명한 실체가 되기도 한다. 현실의 소녀를 사랑하는 현실의 또 다른 소녀를, 그리고 그 소녀들의 무리를, 우리는 어느 주말엔가 홍대와 신촌 놀이터를 지나치다 발견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어느 유명한 십대 이반-이반(二般·異般)은 성소수자를 이성애자 ‘일반’과 구분하는 의미로 쓰이는 말- 커뮤니티의 번개다. 소녀를 향한 소녀의 애정이 본래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든, 아직 확실한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십대 시절에만 지나가는 일시적인 바람이든, 이 빈번한 소집회는 곧 동성 사이에서 느끼는 사랑이 사춘기를 통과하는 어느 세대들이 직면한 진지한 관심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려의 시각들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성소수자를 판단하는 고전적인 입장을 제외하고도, 성소수자의 부각을 불편해하는 시각은 존재한다. 사실상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학습하고 있는 성소수자는 그들의 진짜 현실이 아니라 스트레이트가 원하는 그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보이는 게이는 미디어의 작품이자 미디어의 허상인지 모른다. 어느 이성애자가 자신의 이성애적 기질을 현실에서 유지하면서 게이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면 그건 미디어를 통해 개발된 취향에 가깝다. 성소수자의 노출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게 성소수자의 실제적 인권 신장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막말로 모든 게이가 이성애자가 바라는 대로 잘생기고 패셔너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도 명백한 성차별이 존재한다. 매체가 다루기 좋아하는 성소수자는 여자가 아니다. 미디어의 명백한 취향은 (성소수자 전반을 의미하는) ‘퀴어’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하는 훈남 게이인 것이다. 즉 여성 소수자인 레즈비언은 이 사회에서 쉽게 소외된다. 또 다른 차별 문제가 거론되기도 한다. 어느 사회인들 안 그렇겠느냐만, 영향력과 함께 발언권을 갖는 성소수자는, 소위 가방끈이 길거나 사회적인 성취가 있는 인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의 성장을 이성애자의 정치적 위장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거칠게 말해 ‘게이가 유행’이고 동성애 문화에 많이 관대해진 것 같지만 현실사회에서 커밍아웃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노릇인 걸 보면, 이성애자이면서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을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의 정치적 공정성과 정치적 진보성을 증명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화와 현실의 합체
하지만 이런저런 우려들은 성소수자의 입장과 현실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표피적이든 진실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성소수자가 노출된다는 것은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이며, 자연스럽게 치열하게 답을 찾아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성소수자를 관찰하는 방식이 더 다양해지고 첨예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동성에 이끌리는 건 우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위험한 짓이라고 믿거나, 생물학적인 문제라 정신적인 치료를 거듭하면 낫게 되는 질병으로 알고 있었던 관념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논의의 생산이라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달라진다. 대중문화 속에서 이렇게 게이를 자주 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고, 게이가 패션계의 권력자가 될 줄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단어의 의미도 달라진다.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을 뜻하는 ‘게이’는 ‘Merry’와 뜻이 통하는, 명랑한, 쾌활한, 즐거운이라는 의미로 통하던 때가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남자와 일반적이지 않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어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게이는 다시 변화할 수 있다. 더 많은 게이와 만나고, 더 많은 입장과 소통하고, 더 많은 인식을 수정하는 것으로.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