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6 : 비주얼 컬처 시대의 엄친아, 광고의 미학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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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나라 산책
   윤동희 | 미술 저널리스트 / boccaccio@hanmail.net
연세대 영상대학원에서 영상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월간미술> 기자, 안그라픽스 편집장, 북노마드 대표를 지냈다. 미술과 시각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계간지 <눈 / noon> 편집위원. 네이버 ‘한국인’, <포춘>, 대한항공 기내지 <Beyond>, W 호텔 등에 기고하고 있다.
 
비주얼 컬처 시대의 ‘엄친아’ 광고의 미학
 

광고 ‘언어’의 기호학적 의미에 시대정신을 입히는 것. 이렇게 된다면 “광고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 형식”이라는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말을 당당히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광고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장 위대한 예술 형식”이라고 말이다.



이제 더 이상 광고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그에 답을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건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압축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 ‘광고’라는 문화 형식이 가장 근접해 있다는 세간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강명구 교수가 지적한 대로 대량생산, 대량판매, 대량소비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속에서 광고는 ‘잉여 가치’를 합법적으로 설파하는 경제적, 문화적 조건이 되었다. 우리가 광고와 대중문화의 사이에 ‘상품미학’이라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미학 용어를 끼워둔 까닭도 ‘소비’라는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의 존재론적 의미를 기꺼이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욕망은 결국 ‘소비’라는 행위로 귀결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고백은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도 광고가 만들어낸 사용가치 없이는 그 운동력을 상실했을 게 분명하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체를 기계화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고자 했던 포드주의(Fordism)를 기점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를 오가야 했다.
과거 파리의 만국박람회가 노동자들을 소비자로 맞이하기 위한 환상적인 스펙터클로 기능했다면, 소비사회로 이행한 오늘날에는 광고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대중매체가 자리하고 있다. 알다시피 광고의 발신지는 일상이 되어버린 대중매체에서 기원한다. 비주얼 컬처(Visual Culture)라는, 이 시대가 낳은 든든한 우군을 등에 업은 텔레비전 영상언어의 중심에는 언제나 광고가 자리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감성의 완성작, 광고
오늘날 모든 사람, 아니 모든 소비자들은 TV를 비롯한 갖가지 미디어에서 기원하는 영상 이미지를 통해 광고와 접선하고 있다. 한 마디로 광고는 비주얼 컬처 시대가 낳은 ‘엄친아’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광고는 ‘미학적 대중주의’라는 용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예술적이며, 동시에 대중적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세대보다 영상언어에 민감한 신인류의 감각과 취향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간지’가 철철 넘쳐흘러야 한다.
때마침 상상 그 이상의 세상을 열어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진화도 광고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과거의 고급문화와 현대의 대중문화 간의 낡은 구분이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울리는 ‘포스트모던 감성’이 광고라는 장르에서 완성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순리가 아닐 수 없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집중에서 해체로 요약되는 이 시대에 형식과 스토리텔링, 표현 양식, 시선 등 모든 영역에서 과거와의 거리두기를 선언한 우리 시대의 광고가 달라진 소비자의 기호에 쏙 들어 맞은 것이다.

물론 비판의 눈초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의 포스트모던 광고가 ‘경제’라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가치를 통해 반기를 들었다면, 이 땅의 포스트모던 광고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의 분위기를 풍기는 광고 중 대부분은 단순히 영상과 카피의 ‘장난’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포스트모던 광고를 단순히 아이디어의 승리로 간주하는 사회의 인식 역시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포스트모던 가치가 광고를 비롯한 모든 비주얼 컬처를 관통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리 없는 ‘퇴행’의 징후를 맛보았다. ‘후크’라는 단어가 대중음악을, ‘막장’이라는 단어가 드라마의 앞머리에 붙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인정한다. 광고가 소비라는 욕망을 부추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광고를 비롯한 문화란 ‘시대라는 이름의 바다를 유영하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고 속에서 가쁜 호흡을 내쉬는 이 땅의 사회적 조건을 외면한 채 단순히 형식과 기법에만 포스트모던 감성을 불어넣은 광고는 한 번쯤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 혹은 담론, 아니 세계관이란 결국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기존의 세계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역사가 공인한 명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한 건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고급예술과 상업적 형식 사이에 선을 긋기 어려울 정도로 넘쳐나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외피’만을 보고 있다는 데 있다. 광고 언어의 시니피앙(Signifiant)이 아닌, 시니피에(Signifie; 의미), 즉 세계의 내적 존재에 깊이 파고들어가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우리가 광고를 가리켜 TV·영화·대중음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라는 지점에 계속해서 자리매김하고 싶다면 이제라도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광고가 문화로 기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광고가 상품의 지표를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컨텍스트(문맥)를 보유한 ‘텍스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품미학이라는 자신만의 인식론적 영역을 고안한 하우크(Wolfgang Fritz Haug)가 광고를 비판한 까닭은 광고가 오직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포스트모던 광고가 ‘시대정신’이 되지 못할 때 그것의 본래 의미는 온데간데없이 휘발되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광고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화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광고라는 미학은 브랜드나 제품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랐다.
비록 많은 광고가 여전히 브랜드와 제품에 종속되었다고 하지만, 광고와 사회의 관계는 물론 광고의 표현·자율성·감각·취향 등에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5초의 예술’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 후기자본주의사회, 소비 사회, 미디어 사회, 신자유주의, 전 지구화 등 다양한 수식어가 덧붙여지는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광고의 미학은 절대적 당위로 다가오고 있다.

머리와 심장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미학
지금 우리는 기호(Sign)와 신호(Signal)에 매우 익숙해 있는, 세련된 소비자 집단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단순히 제품 및 서비스에 예술이 가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머리와 심장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완성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을 원한다. 광고 및 마케팅에 예술을 활용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정형화된 예술작품을 단순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창조적인 감동을 안겨줄 수 없다. 근래 들어 언어와 이미지(시각언어)를 합성해 수용자(소비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옳은 말이다. 광고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 좀 더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대중문화는 물론 당대를 조망해야 한다.
광고장이와 마케터의 시선이 ‘미래의 소비자들’과 교감하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를 둘러싼 비주얼 컬처의 보이지 않는 흐름을 감지하는 것, 그리고 광고 ‘언어’의 기호학적 의미에 시대정신을 입히는 것. 이렇게 된다면 “광고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 형식”이라는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말을 당당히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광고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장 위대한 예술 형식”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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