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12시, 귀신보다 무서운 건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다. 샐러리맨을 위로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둔다 그만둔다 하면서도 매달 확인하게 되는 월급일까.
연말이면 욕심 없다 하면서도 은근히 기다리는 보너스일까. 그도 아니면 퇴근길의 소주 한잔일까….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커피다.
이 광고 내용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은 커피로 하루를 채운다. 모닝커피, 식후 커피, 오후 네 시경의 커피, 그리고 야근 중에 동료와 마시는 잡담 같은 커피.
커피, 코란을 이기다
6세기 에티오피아의 양치기 칼디(Kaldi)는 우연히 염소를 흥분시키는 빨간 열매를 발견했다. 소년 칼디도 이 빨간 열매가 16세기 이후 전 세계를 흥분시키는 음료의 원료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커피는 이슬람의 수도승들 사이에서 ‘정신을 맑게 하는 약’으로 불리며 급속도로 확산된다. 정통 사제들은 그것이 사람을 도취시킨다고 선언하고 코란에 의거해 금지시켰으나, 심한 벌칙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들로 급속히 퍼졌다.
흰 드레스셔츠에 쏟은 것처럼 커피는 마침내 유럽을 물들이게 된다. 다시 남미를 거쳐 대규모 커피 재배를 시작해 브라질·콜럼비아·멕시코·과테말라·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생산하며,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약 75%를 차지한다. 코란을 이긴 카페인은 마침내 전 세계를 정복했다.
커피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커피에는 좌파도 우파도 없었다. 그 진한 향에 디드로·볼테르·루소가 엄청나게 커피를 마셔댔고, 청년 장교 시절의 나폴레옹도 잠시 포신을 내려놓고 카페로 달려갔다.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나치 정권에 의해 작품이 화형 당할 뻔한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등 20세기 미술의 거장들도 커피 맛에 반해버렸다. 베토벤·발자크·프란시스 베이컨·조나단 스위프트·예이츠·브람스·헤밍웨이 등은 잘 알려진 커피 애호가다. 바흐는 당시의 커피 열풍을 반영하는 커피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을 배회한 것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아니라 갓 볶아낸 커피 향이었다.
지금 커피 소비량 1위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1896년 고종 황제가 커피 애호가가 된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 11위이다.
커피는 창조의 어머니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이고, 상품은 광고의 어머니이다. 미디어와 마케팅의 눈부신 발달에 힘입어 커피 광고도 발전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맥심)’,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동서식품 프리마)’, ‘그녀가 아름다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레츠비)’, ‘커피와 담배 향을 알았을 때, 소년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아지노모도 제네랄후드)’, ‘이 세상 가장 향기로운 커피는 당신과 마시는 커피랍니다(맥심)’, ‘나를 알아주는 커피가 있다(맥스웰하우스 캔커피)’, ‘뛰면서 즐기는 한잔의 여유(네스카페)’ 등.
스타벅스를 마신다는 것의 의미
현대인은 연간 700만 톤의 커피를 마신다. 환산하면 4천억 잔. 세계 무역량도 석유에 이어 2위다. 커피 소비가 늘어갈수록 부대사업들은 발전하고 있다. 스타벅스는 전 세계적으로 4만 개의 매장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는 것은 커피 재배 농부의 삶에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스타벅스 매장마다 커피 생산 농민을 찍은 사진과 함께 등장하는 광고문구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타벅스가 북미 최대의 공정무역 인증 커피 구매회사임을 자랑하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이를 자랑한다는 것은 커피 생산과 무역에 있어 심각한 불공정 무역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사실 그동안 스타벅스가 공정무역 커피를 취급하게 된 것은 세계화 반대 시위 때마다 노동착취 기업으로 공격받았고, 공정무역 커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고릴라 커피’가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공정 무역은 스타벅스를 착하게 한다.
스타벅스를 생산한다는 것의 의미
애리조나 사막에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멕시코의 커피 재배 농부들의 시체가 반 이상이라고 한다. 목숨을 걸고 일하던 그들은 이제 목숨을 걸고 탈주를 감행한다. 멕시코의 커피 재배 농부들은 그나마 밀입국할 수 있는 땅이 있어 행복한 편이다. 수익이 남기는커녕 오히려 빚만 늘어가는 절박한 현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480원, 1파운드의 커피콩(커피 45잔)을 팔고 농부가 받는 돈이다. 10원, 커피 한 잔을 팔고 농부가 받는 돈이다. 이윤의 1퍼센트는 소규모 커피 재배 농가에 돌아가지만, 99%는 스타벅스와 같은 거대 커피회사, 소매업자, 중간 유통상인들에게 돌아간다. 그렇다. 이쯤되면 커피의 맛은 악마의 유혹이다. 무엇보다 전 세계 커피 재배 농업에 종사하는 50여 개 국 2,000만 명은 대부분 빈곤한 상태에 있다. 심각한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는 커피 맛도 모르는 아동들이라는 점이다.
6세기 소년 칼디, 아니 칼디 할아버지가 오늘날 자신의 후손들이 이처럼 불공정 무역의 희생양이 될 줄 알았다면, 그냥 흥분한 염소를 내버려두고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이 더 건강할지는 몰라도 더 풍요롭지는 않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참고문헌>
박종만, <커피 기행 - 사막과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서 터키까지>, 효형출판(2007) /
김성윤, <커피 이야기>, 살림(2004) /
Starbucks coffee company, Company Fact Sheet (2007년 8월) /
아름다운 커피 홈페이지 http://www.beautifulcoffee.com (2009년 3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