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수퍼히어로 코믹스에 대한 3부작의 마지막회를 쓰며 지면 관계로 이어 각각의 수퍼히어로상(像)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려 언제 기회가 닿으면 하나씩 이야기하리라 생각했었다. 그 첫 번째 대상으로 ‘배트맨’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았다.
1. 기원
본명, 브루스 웨인. 고담 시의 제일가는 유력자. 의사·독지가·기업가인 토마스 웨인의 아들로 가문의 재산과 명예를 그대로 상속받았다.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그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치료하기 위한 일환으로 밤마다 박쥐 옷을 입고 다니며 범죄를 소탕한다. 초능력은 없지만 막대한 재력을 이용한 장비와 작전이 그의 가장 큰 무기. 이런 배트맨의 설정, 즉 ‘권력층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보이 지역 유지가 마스크를 쓰고 악당들에게 징벌을 가한다는 영웅상’은 조로를 비롯한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여러 활극의 주인공들이 즐겨 쓰던 이미지다. 가면 자경단이라는 모티브가 주는 모험적 낭만에 ‘잘나가는 재벌 독신남’이라는, 여성독자를 위한 로맨스 소설적 이미지의 결합은 척 보기에도 양쪽 성별의 취향에 동시에 어필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전형이다. 1930년대 말 최초의 수퍼히어로인 수퍼맨을 만들어 낸 DC(당시는 내셔널 퍼블리케이션즈)에서는 이런 류의 픽션이나 캐릭터가 장사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두 번째 영웅 캐릭터 만들기에 돌입한다. 이에 만화의 황금기가 막 열리던 1939년, 배트맨은 세상에 첫 선을 보였고, 사람들은 일견 기괴해 보이는 이 박쥐 옷 입은 사내를 열렬하게 환영해 주었다.
2. 성장
배트맨은 종종 같은 DC 출신의 수퍼맨과 좋은 비교가 된다. 수퍼맨은 양이고 배트맨은 음, 수퍼맨은 태양이고, 배트맨은 그늘이라는 식이다. 수퍼맨이 ‘바른 생활, 모범생적인’ 아동 지향의 캐릭터라면, 배트맨은 거칠고 음울한 성인 지향의 캐릭터다. 성인 지향답게 초창기의 배트맨은 무척 잔인한 존재였다. 악당들이라 해도 일단 구해주고 감옥에 데려다 놓는 수퍼맨에 비해 배트맨은 실탄이 든 총을 들고 다니며(비록 호신의 목적이긴 하지만) 악당이 위기에 처하면 그냥 죽게 놔두는 냉혈한적인 모습도 여러 번 보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방의 전의를 꺾고 굴복시키는 수퍼맨에 비해 인간 그 자체의 신체능력을 가진 배트맨은 그야말로 지저분한 싸움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변질
그러나 마이너 지향으로 만들어진 배트맨이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인기를 끌게 되고, 덕분에 출판사인 내셔널 퍼블리케이션즈의 만화사업부가 DC로 독립하게 됨에 따라 배트맨은 당시 미국을 휩쓸던 보수주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 된다. 폭력은 완화되었고, 어느 정도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악당이라도 불타는 건물에서 일단 꺼내주는, 조금은 수퍼맨스러운) 사나이로 변한 것 외에도 어린 독자들과의 연결고리를 위해 ‘로빈’이라는 조수 캐릭터까지 달고 다니게 된다. 배트맨의 이러한 눈치보기는 미국 만화가 코믹스코드라는 자체 규제를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어이후 1950년대까지 배트맨의 모습은 그야말로 범죄소탕을 취미로 하는 ‘유쾌한 백만장자’에 불과했다. 모험은 화려하고 가벼웠으며, 악당들은 그저 좀도둑질 정도나 하는….
4. 어둠으로의 귀환
은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더욱 성숙해진 독자들의 취향을 반영하듯 배트맨은 변질된 가벼움에서 벗어나 태생적인 어둠으로 귀환한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주는 압박에 못 이겨 밤마다 어둠 속을 미친 듯 질주하는, 그야말로 ‘암흑의 기사’의 전형은 이때 비로소 제시된다. 이후 배트맨의 악당들은 모두 배트맨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도상학적(圖像學的)인 형태를 띠게 되었고, 배트맨의 싸움은 결국 프로이드적 내면투쟁을 상징하게 된다. 또한 그레코로만(Greco-Roman) 비극에서 다뤄지던 공적 의무와 사적 사정의 첨예한 대립이라는 깊이가 작품에 더해지면서 배트맨 스스로가 얼마나 불안정한 인간인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결국 배트맨은 평범한 히어로에서 안티히어로로 진화한다. 배트맨 50주년 기념작으로 기획된 팀 버튼 주연의 극장판 영화 <배트맨>의 잘 알려진 대사 중 하나인 ‘I’m Your Worst Nightmare(난 네 녀석이 꾸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는 배트맨의 이러한 본질을 잘 짚은 사례라 할 수 있다.
5. 배트맨은 이제 막 시작이다!
지난해의 <배트맨 비긴즈>는 팀 버튼이 만들어 놓은 90년대의 프랜차이즈보다 훨씬 어두워진 모습으로 등장해 새로운 시리즈의 프랜차이즈의 시작을 이야기했다. 이 작품은 오락물이라는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면서도,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던지는 공익과 사리(私利)에 대한 영원한 충돌, 법 권력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인간 본성의 양면성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수작이다. 그러한 심각한 고뇌와 그 고뇌에서 파생되는 쿨한 이미지가 바로 배트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